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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너갈 뻔한 원세훈 단죄, '촛불'이 성공시킬까

판사,검사, 사법개혁절실하다

by 석천선생 2017. 7. 8.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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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7.07. 20:36 수정 2017.07.07. 21:36

[토요판] 커버스토리
'원세훈 단죄'로 가는 다섯고비

[한겨레]

국정원 심리전단에서 일하는 김하영씨는 노트북을 이용한 불법 선거운동 여부를 확인하려는 경찰과 선관위원 및 민주당 관계자들에 맞서 2012년 12월11일 밤부터 자신의 서울 역삼동 오피스텔 방문을 걸어잠근 채 이틀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김씨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13일 오후 자료를 삭제한 뒤 노트북을 경찰에 제출했다. 대선이 끝난 뒤인 2013년 1월4일 오후 김씨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수서경찰서에 들어서고 있다. 김봉규 <한겨레21> 기자 bong9@hani.co.kr
▶ 국가정보원의 18대 대선(2012년) 개입을 지시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파기환송심 결심 공판이 오는 10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립니다. 최종선고는 7월말이나 8월초쯤 나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원 전 원장을 국정원법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검찰이 기소(2013년 6월14일)한 이후 만 4년 만입니다. 그동안 재판에서 그는 2심(법정 구속)을 빼고는 1심(집행유예)과 3심(원심 파기)에서 사실상 승리했습니다. 파기환송심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전까지는 그의 편인 듯했습니다. 사법부의 최종 판단은 어떻게 나올까요?

18대 대통령선거를 불과 엿새 앞둔 2012년 12월13일, 국가정보원장 원세훈은 심리전단 요원인 김하영(당시 28살)의 노트북 컴퓨터를 경찰에 넘겨줄지 말지를 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회의 때 부하들은 하나같이 노트북을 내놓지 말자고 했다. 특히 김하영의 상관인 심리전단장 민병주와 3차장 이종명은 “보안상의 이유”를 들어 버티자고 했다. 경찰도 구체적 물증이 없어 노트북 압수수색 영장을 칠 엄두를 못 내고 있긴 했다.

그러나 원세훈은 김하영의 노트북을 경찰에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나름의 ‘결단’이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김하영의 오피스텔 방문 앞에서 11일 저녁 7시쯤부터 계속됐던 민주당 의원 및 당원들의 농성이 막 풀렸던 때였다. 물론 원세훈은 노트북에 범법 행위의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유명 사립대 컴퓨터공학과 출신의 김하영은 이틀간의 ‘셀프 감금’ 동안 이미 187건의 파일을 영구 삭제했다. 국정원 전문가한테 원격으로 충분한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노트북에서 설령 일부 자료가 나오더라도 그 정도는 경찰을 ‘제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원세훈에게 있었음이 틀림없다. ‘노트북을 열어봤는데 대통령선거에 개입한 아무런 증거가 없더라’는 경찰의 발표가 나오면 ‘거봐라, 이제 국정원을 욕보이지 말라’고 큰소리를 칠 속셈이었다. 하지만 원세훈의 꾀는 그로서는 두고두고 땅을 치면서 후회할 결정적인 패착이 되고 말았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운명은? 통상적인 절차를 고려하면 파기환송심 선고는 7월말이나 8월초쯤 나올 가능성이 높다. 검찰이 원세훈 전 원장을 기소한 시점으로부터 따지면 결론에 이르기까지 무려 4년2개월이 걸리는 셈이다. 사진은 원세훈 전 원장이 2015년 2월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원 불법 대선 개입 의혹 사건’ 항소심 선고를 받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가는 모습.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국정원 댓글’ 발생 직후부터 훼방
경찰 수사책임자 권은희 내쫓고
검찰수사 뒷받침 채동욱 찍어내
수사팀장 윤석열은 심지어 징계 황교안 요구로 원세훈 불구속
1심, 집행유예로 사실상 면죄부
2심, “원, 법정구속” 정의 세웠으나
3심, “주요 증거 배척” 원심 파기 파기환송심, 원 노골적 편들기
판사 태도에 검사 항의 퇴장도
촛불집회 후 공정 분위기 감지
“최종 선고뒤 다시 파헤쳐야”

첫째 고비, 경찰 상부의 통제 뚫은 권은희

상부의 지시를 받은 김하영은 12월13일 오후 3시 노트북과 데스크톱 컴퓨터 본체를 경찰에 제출했다. 그러면서 “지난 10월(2012년) 이후 3개월 동안 문재인·박근혜 후보에 대한 비방·지지 글에 대해서만 확인”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노트북을 깨끗이 청소하긴 했지만,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추가적인 안전장치를 마련한 셈이다.

이 단서 조항은 경찰이 12월16일 밤 “대선 후보에 대한 비방·지지 게시글이나 댓글을 게재한 사실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거짓 발표를 하는 큰 핑곗거리가 됐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14일 김하영 노트북의 메모장에서 삭제된 텍스트 파일을 복구해 인터넷 사이트에서 사용된 아이디와 닉네임 40개를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이들이 쓴 정치 및 선거 관련 자료를 인터넷에서 무려 100쪽 넘게 찾았다. 그러나 경찰은 찾아낸 자료를 모두 폐기하고, 아이디와 닉네임은 댓글이나 게시글은 아니라는 변명 아래 버젓이 거짓말을 했다. 서울경찰청장 김용판이 주도했다. 사이버수사대는 김하영 노트북에서 찾은 아이디와 닉네임도 수사를 맡고 있는 수서경찰서에 19일까지 넘겨주지 않았다. 국정원의 선거 공작을 감추기 위한 꼼수였다. 원세훈의 계산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판단했는지, 심리전단장 민병주는 경찰의 수사 결과 중간발표 다음날(12월17일) 김하영에게 “경찰 공식 발표도 났고 이제 가닥이 잡혀가고 있으니 마음 편히 갖길 바랍니다. 마음 깊이 고맙고 미안합니다”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원세훈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수서경찰서 수사과장 권은희(현 국민의당 국회의원)의 존재였다. 권은희는 김용판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경찰관이었다. 그는 수사관으로서의 자기 직분에 충실했다. 당시 수서경찰서엔 수사를 하지 말라는 식의 은근한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 김용판과 경찰청 고위 관계자는 권은희에게 직간접으로 수사를 축소 내지 중단하라는 압력도 넣었다. 하지만 그는 팀원들을 독려했다. 수서경찰서 수사과 직원들은 국정원 아이디와 닉네임 40개를 가지고 방대한 인터넷 바다에서 게시글과 댓글을 찾아 나섰다. 겨우 몇개를 찾아서 위에 올리면 ‘그게 무슨 선거 관련이냐’는 식으로 퇴짜를 맞기 일쑤였다. 그는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12월22일 김하영이 활동했던 인터넷 사이트인 ‘오늘의 유머’와 ‘보배드림’의 서버를 압수수색했다. 국정원이 저지른 대선 댓글 공작의 주요 증거가 처음으로 확실하게 확보되는 순간이었다.

‘국정원 불법 정치개입·여론조작 고발 기자회견’이 지난 4월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지방검찰청 인근에서 열려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가 인터넷 여론 조작을 위해 민간인으로 구성된 ‘알파팀’을 운영한 국정원에 진상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경찰은 2013년 2월4일 느닷없이 권은희를 송파서 수사과장으로 전보 발령내 아예 수사에서 배제했다. 그럼에도 국정원 대선 공작의 실체를 덮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드러난 뒤였다.

둘째 고비, ‘채동욱 찍어내기’ 쫄지 않은 윤석열

경찰은 2013년 4월18일 4개월에 걸친 수사를 마치고 김하영 등 국정원 직원 2명과 일반인 협력자 이아무개 등 3명을 기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달아 사건을 검찰로 넘겼다. 원세훈에게까지는 아직 칼끝이 미치지 못했다. 원세훈으로서는 꼬리를 적절하게 잘라내는 게 시급한 과제였다.

하지만 검찰 분위기는 원세훈의 바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검찰총장 채동욱은 경찰한테서 사건을 넘겨받은 당일 부장검사 2명과 검사 10명으로 특별수사팀을 꾸렸다. 팀장엔 강골로 소문난 윤석열(당시 여주지청장)을 임명했다. 채동욱은 뒷날 <중앙일보>와의 인터뷰(2017년 6월2일)에서 “(총장에 내정된) 그즈음 곽상도 민정수석이 전화통화에서 ‘원세훈 사건을 원칙대로 처리해 달라십니다’라고 전했다. ‘대통령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해서 대통령이 관여가 안 됐구나 싶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태스크포스(TF)팀을 설치해 신속하고 철저하게 수사하겠다고 세게 간 거다”라고 말했다. 곽상도(현 자유한국당 의원)는 이에 대해 “다른 일로 통화하다 대통령 지시를 전한 것 같은데 원칙대로 하라는 말은 증거가 있으면 증거대로, 엄정하게 수사하란 뜻”이라며 “말한 사람 입장에서 해야지, 왜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냐”(<오마이뉴스> 2017년 6월2일)고 반박했다. 청와대와 검찰총장 간의 커뮤니케이션 오류 때문인지 아니면 신임 검찰총장의 정의감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윤석열 특별수사팀이 구성된 것은 원세훈에게는 최악의 수였다.

윤석열 팀은 일주일 만인 4월25일 민병주를 시작으로 이종명(4월27일), 원세훈(4월29일)을 차례로 소환했다. 또 치밀한 수사를 통해 포털업체와 국정원에 대한 압수수색도 실시하는 등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수사팀은 국정원의 인터넷 댓글 활동이 원세훈이 원장에 취임(2009년 2월)한 이후 그의 지시로 시작됐으며, 19대 총선과 18대 대선이 치러지는 해인 2012년 2월에는 인터넷 여론 조작을 하는 심리전단을 4개 팀 70여명으로 확대한 사실도 밝혀냈다.

18대 대선을 여드레 앞둔 2012년 12월11일 밤 민주당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과 선관위원 등이 서울 역삼동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의 오피스텔 앞에서 김씨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 김씨는 도리어 민주당 의원 등이 자신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감금했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의 문병호, 강기정, 우원식(왼쪽부터) 의원과 권은희 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오른쪽 둘째)의 모습이 보인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윤석열 특별수사팀의 ‘돌직구 수사’에 놀라 뒤늦게 제동을 걸고 나선 건 박근혜 정권이었다. 법무장관 황교안이 총대를 멨다. 황교안은 국정원의 정치공작 책임자인 원세훈을 국정원법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하려는 수사팀에 대해 공직선거법 적용을 집요하게 반대했다. 선거법 위반이 될 경우 박근혜 정권의 정통성이 훼손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1주일가량 버티다가 결국 여론에 밀려 원세훈에 대해 선거법을 적용하되 불구속 기소하는 것으로 절충했다. 비로소 국정원의 정치 공작을 단죄할 법적 기초가 마련됐다.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가 있던 날(6월14일) 서울 서초구청에서는 채동욱의 혼외 자식을 확인하기 위한 불법적인 가족관계부 열람이 이뤄졌다. 국정원 직원이 구청 간부에게 부탁한 일이었다. 결국 그해 9월 <조선일보>의 보도를 계기로 채동욱은 물러났다. 정권의 입김이 작용한 명백한 ‘보복’으로 원세훈 재판이 평탄하게 흘러가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하지만 특별수사팀의 팀장 윤석열과 부팀장 박형철은 쫄지 않았다. 이들은 채동욱이 쫓겨서 물러난 다음달인 10월에 3차장 이종명과 심리전단장 민병주를 원세훈과 같은 혐의로 추가 기소한 데 이어 심리전단 5팀의 요원 3명을 긴급체포해 조사했다. 또 추가 수사로 확인한, 트위터를 통한 국정원의 정치 및 선거 개입 혐의를 두차례나 공소장에 추가했다.

검찰 수뇌부는 수사팀이 상부의 결재 없이 국정원 직원을 체포하고 공소장을 변경한 것은 항명이라며 두 사람을 징계하고 이듬해(2014년) 1월 한직으로 내쫓았다. 하지만 원세훈이 주도한 국정원의 정치 공작은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통해 이미 낱낱이 드러난 뒤였다.

셋째 고비, ‘지록위마 판결’ 뒤집은 2심

박근혜 정권의 비호로 구속을 면한 원세훈이 기댈 마지막 언덕은 법정이었다. 채동욱과 윤석열 등이 밀려나면서 정치적 환경은 그에게 매우 좋아졌다. 대통령 박근혜부터가 국정원의 잘못을 반성하고 고칠 기미는커녕 잘못이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는 그해 9월 여야 대표와의 3자회담에서 “지난 정부에서 일어난 일을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재판 결과가 나오면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사실상 국정원을 껴안겠다는 공개적인 메시지였다.

원세훈(왼쪽)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이 2013년 8월16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국정원 댓글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청문회’에 출석해 의원들의 심문에 답하고 있다. 원 전 원장은 “국정원 댓글을 지시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으며, 김 전 청장은 “권은희 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에게 외압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보수적인 양승태 사법부가 이런 정권 핵심부의 의중에 영향을 받은 것일까. 2014년 9월11일에 이뤄진 1심(서울지법 제21형사부, 재판장 이범균) 판결은 원세훈의 승리였다. 1심 재판부는 불법 혐의의 양대 증거 가운데 ‘오늘의 유머’ 등 인터넷 사이트에서 이뤄진 댓글과 게시글은 증거로 받아들였으나 검찰이 애써 찾아낸 트위터 글은 거의 다 배척했다. 대부분의 트위터 글은 5팀원이었던 김기동의 이메일 첨부파일에서 나온 ‘425 지논 파일’과 ‘ssecurity(씨큐리티) 파일’을 근거로 찾은 것들이다. 1심 재판부는 이 핵심적인 두 파일에 대해 “김기동이 법정에서 ‘파일을 작성한 기억이 전혀 없다’는 취지로 진술한 이상 이 각 파일은 형사소송법 제313조 제1항에서 정한 진술증거로서 증거능력이 없다”고 밝혔다. 작성자가 법정에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전문(傳聞)법칙을 적용했다. 게다가 공직선거법 위반에 대해서도 “심리전단 직원들이 계획적 능동적으로 선거운동을 하였다고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 기소 때 황교안이 주장했던 ‘공직선거법 적용 배제’와 같은 논리이다.

결국 1심은 원세훈에게는 징역 2년6개월 및 자격정지 3년에 집행유예 4년, 이종명과 민병주에게는 각각 징역 1년 및 자격정지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오죽했으면 성남지원 부장판사 김동진은 법원 내부 통신망에 ‘법치주의는 죽었다’는 제목의 글을 올려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주장하는 것)의 판결”이라고 공개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원세훈의 안도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2심 재판부(서울고법 제6형사부, 재판장 김상환)가 법 그물을 다시 촘촘하고 단단하게 작동시켰기 때문이다. 2심(2015년 2월9일)은 1심과 달리 공직선거법도 유죄로 판결했다. ‘425 지논 파일’과 ‘씨큐리티 파일’에 대해서도 “김기동이 트위터 활동을 위해 수시로 참고하며 필요한 내용을 계속 추가 보충한 것이므로 ‘업무상 필요로 작성한 통상문서’로 볼 수 있다”며 증거 능력을 인정했다. 원세훈에게 징역 3년 및 자격정지 3년을 선고해 법정 구속시켰다. 이종명과 민병주에게는 각각 징역 1년 및 자격정지 1년, 징역 1년6개월 및 자격정지 1년6개월에 집행유예 2년씩을 선고했다.

국정원의 댓글 공작이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나자 시민단체와 학계, 종교계 등 각계각층에서 시국성명이 발표됐으며, 전국 주요도시에서는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규탄하는 촛불집회도 열렸다. 제16차 범국민촛불대회가 2013년 10월19일 저녁 서울광장에서 국정원정치공작대선개입시국회의 주최로 열려 참석자들이 “국정원도 모자라, 국방부도 선거개입”을 규탄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넷째 고비, 대법원·파기환송심 기류 바꾼 ‘촛불’

값을 치르던 원세훈은 대법원의 도움으로 또다시 법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해 7월16일 대법원 전원 합의부(재판장 양승태, 주심 민일영)는 주요 증거 능력에 대한 2심의 판단이 잘못됐다면서 전원일치로 원심을 깼다. 트위터를 통한 국정원의 정치 공작을 파헤치는 핵심 열쇠인 ‘425 지논 파일’과 ‘씨큐리티 파일’에 대해 대법원은 다시 1심을 편들었다. 2심 재판부가 이 파일에 대해 ‘업무상 통상 문서’(형소법 315조)로 해석한 데 대해 이는 잘못이라고 결정했다. 작성자를 알 수 없는 성매매 여성들이 업소에서 일하면서 적어놓은 남성들의 아이디와 전화번호 등의 전자문서를 통상문서라고 했던 대법원 판례(2007도 3219)와 달리 통상문서의 범위를 매우 좁힌 판결이었다. 두 문서를 증거에서 배제함에 따라 대법원은 씨큐리티 파일에서 나온 269개의 트위트 계정과 이와 연결된 계정 422개에서 작성한 수십만건의 트위트 및 리트위트 글도 무효화했다. 파기환송하면서 유무죄 판단을 하지는 않았지만, 대법원은 2심 판결을 뿌리부터 흔들었다. 복잡한 법리를 내세웠으나, 사실상 원세훈에게 도망갈 길을 열어준 꼴이었다.

실제로 그해 9월부터 시작된 서울고법의 파기환송심(형사6부, 재판장 김시철)은 이례적일 만큼 편파적으로 진행됐다. 본격적인 재판에 앞서 원세훈을 보석으로 석방(2015년 10월6일)부터 했다. 변호인과 검사가 아니라, 원세훈 쪽에 유리한 입장에 선 판사와 이에 맞서는 검사가 설전을 벌이는 희한한 모습이 매번 연출됐다. 김시철이 4차 공판준비기일(2015년 10월30일) 도중에 <손자병법>을 인용하며 국정원 심리전단의 댓글 활동을 중국의 용병술에 대입한 데 항의해 부장검사 박형철이 퇴장하기도 했다. 또 김시철은 11차 공판(2016년 5월30일) 때는 “실행 행위가 개별적으로 인정돼야 공모공동정범에 있는 피고인들에게 유죄 판단이 가능하다. 이 전제가 안 되면 유죄 판단을 할 수 없다”고 발언했다. 공동정범은 1·2심에서도 인정됐던 사실관계였다.

원세훈에게 면죄부가 주어질 것 같은 분위기로 진행되던 파기환송심은 지난해 10월부터 시작된 촛불집회와 올 3월10일 박근혜 탄핵으로 새 국면을 맞았다. 올 2월 법원의 정기 인사로 그동안 지루하게 재판을 끌던 김시철 재판부가 물러났다. 3월부터는 김대웅 재판부로 바뀌었다. 이전 재판부가 스무차례나 심리를 진행했던 데 비해 새 재판부는 오는 10일 결심까지 네차례로 종결한다. 또 검찰의 공소유지팀도 한동안 1명으로 겨우 명맥만 이어갔지만, 박근혜 탄핵 직후 열린 21차 공판(3월13일)부터는 다시 3명으로 늘었다. 새 재판부의 공판에서는 재판장과 판사의 어이없는 갈등도 사라졌다. 억압적인 정권의 퇴장으로 법원이 훨씬 더 공정한 판단을 할 가능성이 커졌다.

검찰은 2013년 4월 국정원의 댓글 사건을 전담하는 특별수사팀(팀장 윤석열)을 구성해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갔다. 특별수사팀은 국정원 압수수색을 통해 댓글 작성이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의 지시에 의해 이뤄진 사실을 밝혀내고, 그해 6월 원 전 원장을 국정원법과 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국정원은 이에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의 혼외 아들에 대한 정보를 서초구청에 확인했고, 결국 채 총장은 그해 9월30일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퇴임식을 마친 뒤 총장이 차에 오르려 하고 있다. 김봉규 <한겨레21> 기자 bong9@hani.co.kr

다섯째 고비, 최종 판결은 진실 규명의 시작

통상적인 절차를 고려하면 파기환송심 선고는 7월말이나 8월초쯤 나올 것으로 보인다. 검찰의 원세훈 기소로부터 따지면 결론에 이르기까지 무려 4년2개월이 걸리는 셈이다.

원세훈 등 책임자 3명에 대한 사법적 판단이 끝나더라도 국정원의 대선 공작 사건이 법적·정치적으로 완전히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정원의 어긋난 과거를 뿌리뽑고 단죄하는 일의 출발점일 뿐이다. 18대 대선 댓글 사건만 하더라도 전모조차 아직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찰과 검찰 수사로 심리전단의 4개 팀 가운데 3팀과 5팀의 구성과 역할은 비교적 자세하게 밝혀졌다. 두 팀은 각각 4개 파트로 나누어 일했다. 3팀의 경우 1파트는 총괄, 2파트는 블로그, 3파트는 다음 아고라, 5파트는 인터넷 커뮤니티 및 카페를 담당했다. 5팀 4개 파트는 모두 트위터 담당이었다. 3팀은 팀장을 포함해 24명, 5팀은 팀장 포함 23명이었다. 이 중에 구체적인 불법행위가 비교적 자세하게 드러난 곳은 김기동이 일했던 5팀과 김하영이 소속됐던 3팀 5파트 정도이다. 3팀의 1·2·3파트뿐 아니라 1팀(총괄 기획)과 2팀(네이버 등 대형 포털 담당)은 팀원 수도 밝혀지지 않았을 정도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지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또 김하영의 활동이 발각된 이후에 국정원이 어떻게 경찰을 통제해서 대선 사흘 전에 ‘국정원의 대선 개입이 없었다’는 식의 거짓 발표를 했는지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 검찰총장 채동욱 찍어내기에 국정원이 어떻게 개입했는지도 밝혀내야 할 과제다. 국정원 말단 요원이 “우연히 화장실에서 들은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서초구청의 가족관계부를 들춰보도록 했다”는 변명은 더는 통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는 어떻게 연결됐는지도 명백하게 규명돼야 한다. 권은희는 지난 4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 사건은 밝혀진 것보다 아직도 안 밝혀진 게 훨씬 더 많다”며 “국정원 티에프에서 국정원과 정치권력의 관계, 국정원과 경찰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세훈 등 불법행위에 대한 지시자뿐 아니라 지시를 받아 실행한 하급 직원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일도 국정원 개혁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산이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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