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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서양과학 수용의 한계성

올바른역사,웨곡된역사

by 석천선생 2017. 1. 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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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과 기술의 발달 

 

 

(9) 실학의 서양과학 수용의 한계성

 19세기 중반 실학자들 사이에는 조급한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있었지만, 그들이 그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던 근대 서양의 과학기술 수용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고종 13년(1876)의 개국과 함께 한국사의 서술에서 실학은 개화사상으로 탈바꿈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리고 개화사상가들의 노력은 조선의 정상적 역사변환을 가져오지 못한 채 곧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흔히 사학자들은 개화기의 실패를 당시 지도층의 정치적 실패에 큰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설명하지만, 그 실패의 원인은 바로 실학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한국의 식민지 경험은 실학시대에 그 뿌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뿌리의 정체는 다름아닌 실학시대의 조선이 이웃 나라들에 비해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에 크게 뒤져 있었다는 사실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다.603 이미 앞에서 간접적으로 시사한 바와 같이 조선의 실학자들에게는 서양 과학기술을 접할 기회가 절대 부족이었다. 16세기 말부터 중국과 일본에는 끊임없이 서양선교사들이 드나들며 서양 과학기술을 전수해 주고 있었다. 이에 비해 조선에는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서양선교사가 찾아온 적이 없다. 조선실학은 서양과학을 중국에서 번역된 한역과학서를 수입해다가 공부해서 습득해 갈 수밖에 없었다.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이 자기집에 앉아서 강도 높게 직접 접할 수 있던 서양과학을 조선의 실학자들은 겨우 중국에 가서야 간접으로 약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예로 든 이익에서 최한기까지의 경우가 이런 경향을 잘 보여준다.
 중국과 일본이 직접 서양과학에 접할 수 있었던 데 비해 조선이 간접적 접촉밖에 할 수 없었던 원인은 조선의 지리적 위치가 서양사람들의 항로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주 간단한 이 지리적 조건이 동아시아 세 나라의 실학의 위상을 크게 달라지게 만드는 직접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중국·조선·일본의 실학은 그 특징적 경향을 들어 각각 考證學·北學·蘭學이라 부를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세 마디 역사적 용어는 세 나라에서의 실학이 과학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특징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처음부터 서양과학의 유입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대범한 태도를 보였다. 초기의 천문역산학 소개가 일부 중국인 천문학자들의 반발을 사기는 했지만, 머지않아 서양의 천문역산학은 중국의 궁정 안에서까지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여 서양선교사들의 거점이 되었다. 그러나 차츰 서양과학의 우수성이 인정되기 시작하자 중국인들은 우수한 서양과학의 내용을 하나하 나 들어 그것이 원래는 고대 중국에 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梅文鼎(1733∼1849)이나 阮元(1764∼1849) 등이 바로 그런 서양과학의 중국원류설을 주장한 것이다.
 서양과학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 그럴수록 중국인들은 더욱더 그들의 전통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의 실학은 고증학으로 특징을 삼게 된 것이다. 고증학은 그것대로 훌륭한 학문적 경향이지만, 그것이 서양과학을 받아들이는데 효과적 대응은 아니었고, 또 그것이 과학을 직접 산출할 수 있는 학문적 방법도 아니었다. 中華의 자존심 속에서 중국의 실학은 전통의 재평가에만 눈을 돌릴 수 있었을 뿐이지 새로운 학문을 수용하는 일에는 극히 소극적이었다.
 비슷한 정도의 직접적 자극을 받은 일본의 경우에는 그 실학이 정반대의 경향으로 나타났다. 역사상 언제나 외래문화의 수용에 적극적이었고, 또 외래문화에 대한 갈증 속에 빠져 있던 쇄국을 실시중인 德川시대에 일본 지식층은 적극적으로 서양과학을 배우려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17세기 초 한때 극심한 쇄국정책을 강행하던 일본은 곧 九州 서쪽 끝의 長崎에 중국인과 화란인만의 상주를 허가하고 그들과 교역을 계속했다.
 1740년에 이미 德川幕府는 유학자와 의사를 지명해서 화란어를 배우게 했고, 재야지식층 사이에 화란어를 배워 서양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1774년 杉田玄白(1733∼1817) 등이 화란어 해부학책을 번역해 낸≪解體新書≫는 일본역사상은 물론 동양사상 최초의 서양과학서의 번역이다. 중국인으로서 직접 서양언어를 배워 서양과학서를 번역한 일은 19세기 후반에나 시작되었고, 한국의 경우에는 20세기에 들어올 때까지 그런 일은 일어난 적이 없다. 동양 3국 가운데 실학시대에 서양언어를 직접 배워 서양과학을 습득한 나라는 일본뿐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시작된 일본의 실학인 난학은 19세기 초까지에는 서양과학의 상당 부분을 이미 일본인들 스스로의 번역과 번안을 통해 습득해 둔 상태였다. 뉴턴의 근대물리학을 소개하는 책이 일본 난학자에 의해 19세기 초에 이미 나왔고, 라브와지에(Lavoisier)의 근대화학 역시 1839년에는 책으로 소개되었다.
 난학을 가르치는 학교로 번성했던 蘭學塾은 1853년 미국 페리제독이 동경만을 침략한 이후에는 洋學塾으로 바뀌어, 서양을 배우는 길을 영국과 미국 등으로 바꿔 갔다. 1854년의 개국과 함께 상당한 사회적 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의 서양과학 수용은 난학 이후 아주 순탄하고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이미 실학시대에 근대과학의 대강이 모두 부문별로 전공서적이 되어 일본학자에 의해 출간되어 있었고, 이제 근대적 대학이 설립되기만 하면 그대로 근대과학은 제도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정도였던 것이다. 1877년 정식으로 일본 최초의 근대 대학으로 문을 연 東京大學은 그 전신이 서양과학책 등을 일본어로 번역하던 기관이었다. 즉 일본에서는 양학기관이 근대 교육기관으로 그대로 간판을 바꿔 달 수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일본의 실학이 그대로 근대과학으로 이어지는 모습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조선·중국·일본의 실학 속에서 근대 서양과학의 수용 노력은 크게 다르게 전개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큰 차이가 세 나라의 최근세사를 갈라 놓은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이 서양선교사들과 서양상인들을 통해 직접 서양의 문명과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우고 있던 몇 세기 동안 조선의 선비들은 오직 간접적인 길밖에 서양문명에 접할 방법이 없었다. 이 기간은 조선 쪽에서 볼 때 순전히 서양 과학문명의「간접수용의 시대」였으며, 이것으로써 이미 경쟁에는 절대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 시기 조선에도 서양 근대과학의 내용에 눈뜬 선각자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눈에조차 근대과학이란 그저 신기한 지식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근대 과학기술의 잠재력을 인식한 선각자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시간은 흘렀다. 그리고 부득이 나라의 문을 열고 외국과의 교류를 시작할 수밖에 없는 그런 때는 왔다. 고종 13년 일본의 압력 아래 조선정부는 드디어 나라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6년 안에 미국과의 우호조약을 맺으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서양과의 교류를 정식으로 시작하였다. 고종 19년(1882) 조선과 미국이 첫 외교관계에 서명했을 때 조선인 가운데는 한 사람도 그 조약의 영어 원문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전혀 아무런 준비도 안 되어 있었지만 ‘은둔의 왕국(Hermit Kingdom)’ 조선은 국제사회에 편입되어 갔던 것이다.
<朴星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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