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는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빌미로 한반도 곳곳에 일본군이 주둔해 있던 상황
모두 일본의 승리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영토는 동아시아 대부분
중국 대륙(티벳 고원은 사실상 쓸데가 없음)
만주
대만
동남아 전체
일본이 이렇게 광활한 식민지를 갖게 된 이유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대식 무기로 무장하여 강력한 군대를 양성할 수 있었던 것.
반면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외세 배척은 물론 개화파조차 척살하기에 이르러,
재래식 군대로 서양과 분쟁을 일으켜 불공정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 빌미를 마련하였으며
경복궁 재건 등으로 국력이 쇠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일본과 전쟁을 하면 백성 전체를 사지로 몰아넣는 것밖에 안 될 수가 있다.
물론 나치 독일이 서유럽을 장악하였을 때 스위스가 중립국으로써 살아남았던 것처럼
외교 처세술로 살아남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는 없겠지만...
군사의 수는 물론 기술까지 매우 뒤떨어져 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역사에 만약은 없다.
이완용이 아니었다면 한민족은 광기로 폭주하는 일제의 손에 말살되었을 수도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서도 최악으로 평가되는 난징대학살 사건 때
35만 명 정도의 중국인이 일본 순사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것을 보면...
당시 사진.
매우 끔직하여 링크로 대체한다.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
김대중의 IMF극복을 위한 희생양으로 대우그룹 외 수많은 기업들이 공중분해된 것과 같은 이치
당시 대륙을 침범한 일본은 식민지를 수탈하던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서구 열강들을 뛰어넘는 반인륜적인 행위를 하였다.
한일, 중일 감정이 수그러들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
실제로 이완용의 유언에는 이젠 일본이 아닌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라는 내용이 있었다.
동북아 대륙에서 남한만의 적화를 막을 수 있었던 이승만의 선구안을 갖고 있었던 것.
하지만 그는 반드시 재평가 되어야 함이 옳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
아직까지도 한국인들은 이완용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데
1907년 고종이 이토히로부미 몰래 헤이그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명을 밀사로 보낸게 결국 발각이 된다.
이때 이토히로부미가 고종에게 명령한 것이
1.자살
2.일본에 직접 가서 천황폐하께 엎드려 용서앙망
둘중에 하나 선택하라고 했는데 고종이 두개다 할수 없다며 징징 울고 있을때 이완용이 와서 고종을 도와준다
즉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남으로써 책임을 피하라는 것이었고 고종은 그 지혜에 감복하며 이완용을 최고의 충신이라고 칭찬하면서 순종을 즉위시키고 자신은 물러남으로써 위신을 지키게 된다
영화 덕혜옹주 전반부에서 고종이 이완용을 비난하는건 다 거짓임, 실제로는 이완용을 가장 총애했음
그리고 을사조약 체결 이후 성난 백성들이 이완용의 집을 불태웠는데 이 때 고종은 크게 분노하며 국고를 털어 이완용의 집을 근사하게 새로 지을 것을 명령하고 이완용의 저택을 재건축하기 위해 백성들을 대거 동원함
실제로 그 당시의 조선인 시각으로서는 충신이다.
시대가 바뀌고 나서야 매국노라고 조롱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덕혜옹주같은 대한제국 미화시킨 어이없는 영화 만들고 있는게 더 웃긴짓
'나의 생사는 논할 가치가 없지만 조선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소생할 수 없다.
이 몸이 죽어서
이 일을 방지할 수 있다면
지금 죽는 것이
영광스러운 것이다." -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친일파 매국노 이완용
출처: http://khariles.tistory.com/740 [백과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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