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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의 과학

올바른역사,웨곡된역사

by 석천선생 2017. 1. 7.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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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의 서양 과학

 

한영호 (건국대, 기계공학)
        

Ⅰ.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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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전근대 과학을 대표하는 학문으로 천문학을 손꼽는다. 천문현상과 통치자의 권위가 직결되었던 고대 사회에서 천체 관찰의 결과가 쌓이고 운행 예측의 정확성이 추구되면서 천문학이 제왕의 과학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이 땅의 과학사에서도 예외일 수 없었으며, 15세기 전반 조선 세종 때는 독자적인 역법 체계를 갖추고 당시 세계 최고의 수준이던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 적도 있다.


그러나 문명사적 관점에서 15세기는 동아시아의 과학기술 수준이 서양에 비해 점차 뒤떨어지게 된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14세기말부터 시작된 문예부흥기와 발맞추어 과학 전반에 걸쳐 다양한 성취가 있었으나, 동아시아의 문명을 주도하던 중국에서는 명 왕조가 들어서면서 학문의 여러 분야에서 쇠락의 기미가 뚜렷한 가운데 수학적 추론과 관찰을 기본으로 한 과학 활동 역시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6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동서양간에 과학기술의 격차가 현저하여 천문학을 중심으로 한 서양 과학이 일방적으로 동양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예수회 선교사들이 西敎와 더불어 서양의 과학저술을 적극적으로 소개하였으므로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서양 과학의 정수가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동아시아로 이입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17세기 이후의 동아시아 제국은 서교와는 상당한 갈등 관계를 유지한 채 서양의 선진 과학을 수용해 나가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서는 서양 역법을 수용하는 과정 중에 상당한 정치적 갈등까지 빚었으나, 조선의 경우 청조가 時憲曆을 채택한 후에 이를 도입하였으므로 비교적 순탄하게 서력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시헌력법을 도입하기로 결정하는데는 큰 반대가 없었다 하더라도, 서양 천문학의 결실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역산 과정을 익혀야 하는 관상감의 실무자들은 고난의 세월을 오랫동안 겪어야 했다. 명말에 『崇禎曆書』를 편찬하는 동안 徐光啓를 비롯한 西洋曆局의 참여자들이 역법의 중국화를 위하여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전혀 서양 천문학과 수학에 대한 이해가 없던 조선의 관상감원들에게는 이것조차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645년 김육이 인조에게 개력을 상소한 후 1654년 효종이 新曆의 시행을 반포하기까지 10년 가량의 준비 기간이 소요된 것은 시헌력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미 七政算이라는 독자적인 역법을 가지고 명의 大統曆과 대등한 수준을 유지하였던 조선 관상감의 입장에서는 자체적으로 작성한 역서의 오류를 막기 위하여 청에서 역산이 어떻게 개선되고 얼마나 정밀해졌는지를 끊임없이 파악할 수밖에 없었으며, 마침내 영조 20년(1744)에 행성의 타원궤도론 등을 반영한 『曆象考成後編』의 방식을 소화하는데 이르기까지 백년에 걸친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렇게 조선의 관상감이 서양 선교사의 직접적인 참여도 없이 독자적으로 서양 역법의 계산 방식을 소화해나가는 동안 천문학을 비롯한 서양 과학에 대한 수용의 길이 자연스럽게 넓혀졌으며, 이것이 實學이라는 새로운 학문 사조를 조선에 정착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명청간의 왕조 교체를 주변국의 지도층으로서 힘들게 겪은 당시 대부분의 조선 사대부들은 유학에 더욱 집착하면서 자신들만이 중화의 전통을 계승하였다고 자처함으로써 청조에 대해 심정적으로 반발하고 있었다. 서학에 대한 조선 사대부들의 일반적인 반응 역시 청이 앞장서서 받아들인 학문이었다는데 대한 거부감이 앞서 있었다. 그 결과로 조선에서도 서양 과학의 우수함을 여러 경로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으나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서교와의 갈등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상황이 전개되었고, 결국 서학에 대한 소극적 무시 풍조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주변의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조선에서는 훨씬 오랫동안 서양 문물의 영향이 미미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제왕을 위한 학문이면서 고대 과학의 정수인 천문역산에서 발휘된 서양 과학의 수월성은 이를 바라보는 일부 조선 학자들의 시선을 긍정적으로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더 나아가 서학 전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실학의 전개와 확산에 도움이 되는 배경을 제공한 셈이다.


15세기 후반부터 조선의 사상계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던 주자학적 사유체계를 흔들고 변화시키는데 작용한 여러 외적 충격 중에서 가장 강렬하였던 것이 바로 서양 과학에서 제시한 우주론을 비롯한 새로운 체계의 자연관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관의 확산은 중앙 권력에서 약간 멀어진 입장에서 당시의 사회 체제가 가졌던 불합리성에 대해 비판적이던 학자들 사이에서 먼저 일어났으며, 그 중에서 이익을 비롯한 성호학파, 이광사 등 양명학파, 그리고 홍대용을 위시한 북학파의 학자들이 특히 서양 과학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던 그룹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전통의 주관적 인식 체계 속에 얽매어 있던 자연, 즉 사물의 이치를 끌어내어 객관적 관찰 대상으로 옮겨 놓아 조선의 실학과 서양의 과학기술을 접목시키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조차도 대부분은 사유를 통하여 사물의 이치를 관념적으로 탐색하는 유학자의 고답적인 자세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밀려들어오는 서양 과학의 봇물에 실제로 몸을 부딪히며 새로운 학문을 익히고 연구하면서 서학을 제대로 소화하고자 나선 학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공리에 맞서서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을 위하여 등장한 학문을 실학이라고 규정할 때 실학이 지향하는 바 가운데는 자연의 이치를 밝혀 실용을 위하여 활용하고자 하는 자연과학적 성취도 마땅히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지만, 실학의 세기로 불려지는 조선의 18세기에 과연 과학자라 할만한 이가 몇이나 있었을까 하는 점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신법 역산과 수학에 관한 저술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실물이 남아있거나 또는 기록을 통하여 제작의 흔적이 확실한 조선 후기의 천문의기들은 소수를 제외하면 소위 실학자로 분류되는 자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생존의 차원에서 서양 과학에 매달렸던 관상감원들과 몇몇 관련 학자들의 손에 의한 것이 전부이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의 신법 천문의기 제작과 천문학을 비롯한 서양 과학의 수용을 구태여 실학의 테두리 속에서 평가함은 다소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다소 모호한 일반론적 인과 관계 속에서 서양 과학이 실학에 미친 영향을 유추하는 선에서 둘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데 그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18세기 조선에서 제작된 서법 천문의기들을 예로 들면서 서양 과학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 이 땅에 수용되었는지를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8세기를 전후반기로 나누어 시기별로 제작된 신법의기들을 구분해보면 뚜렷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으므로 이를 비교해봄으로써 지금까지 의기의 개관 소개나 사실의 평면적 나열 수준에 머물었던 조선 후기의 과학적 성취 과정을 좀 더 입체적으로 구성해보고자 한다. 

 

Ⅱ. 18세기 조선의 서법 천문의기

 

 Ⅱ-1) 신법 천문도와 평혼의의 복제 - 전반기

 

Ⅱ-1-1) 「赤道南北總星圖」

 

예수회 선교사 利瑪竇(Matteo Ricci, 1552-1610)가 포교와 더불어 전한 서양 과학 역시 동양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하늘과 땅에 대한 과학이었으나 그 정확함에 있어서는 동양에 비해 월등히 앞선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먼저 전한 것이 땅의 과학이었으며, 오랜 탐험과 광범위한 측량의 결과가 집적된 세계지도였다. 利瑪竇는 중국 광동성에 닿은 다음 해인 1584년에 최초로 한역 세계지도를 소개한 이래 「坤輿萬國全圖」(1602년), 「兩儀玄覽圖」(1603년) 등 10여 판본 이상의 서구식 세계지도를 제작하였다. 利瑪竇 이후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것이 艾儒略(Julius Aleni)의 「萬國全圖」(1623년에 간행된 『職方外紀』에 수록)와 南懷仁(Ferdinand Verbiest, 1623-1688)의 「坤輿全圖」(1674년) 등인데, 이것들 모두가 곧바로 조선에 전해져 전통 우주관인 천원지방설과 중국 중심의 華夷적 세계관에 깊이 잠겨있던 조선의 식자층에 일대 충격을 가하였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하늘의 과학을 대변하는 서양 천문도는 중국에서도 세계지도에 비해 상당히 늦게 소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 영향을 끼친 것은 더욱 먼 훗날의 일이다. 중국 최초의 서구식 천문도인 「赤道南北總星圖」는 利瑪竇의 다음 세대 선교사인 湯若望(Johann Adam Schall von Bell, 1591-1666)에 의해 1634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완성되었다. 서구식 천문도의 제작이 늦었던 것은, 제대로 된 세계지도는 전혀 없었지만 매우 높은 수준의 고유한 천문도를 보유한 중국에 이를 능가하는 천문도를 만들어 내놓을만한 지식과 자료를 利瑪竇 등 초기 선교사들이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탓이 크다. 또 그럴 능력이 있어 망원경과 다양한 의기로 세밀하게 관찰하여 얻은 서양 천문학의 선진 정보를 추가하였다 하더라도 중국 천문도의 권위를 드러나게 손상시키지 않았어야 했으며, 더욱이 희랍신화에 근거한 서양 별자리에 포함된 항성 각각을 同定하여 유구한 전통을 가진 동양의 별자리로 바꾸는 일도 만만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구식 지도가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상대적으로 쉽게 등장한 것이라면, 서법 천문도는 황제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쳐 어렵게 출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역법을 도입하여 시행함에 따라 오직 이것의 정착과 개선에 여념이 없던 조선 관상감이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서법 천문의기를 처음으로 제작한 것은 숙종 34년(1708)의 일이다. 이 해는 곧 청의 흠천감으로부터 시헌력 칠정표를 구입해 옴으로써 신법 시행 50년만에 처음으로 중국의 것과 일치하는 역서를 작성할 수 있었던 해이기도 하다.


 이 해 조선에서 제작된 첫 서법 천문의기는 湯若望의 천문도였다. 이 신법 천문도는 제작된지 74년이 지나 1708년에 조선에서 복제된 것으로 두 곳에 기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관상감에서 湯若望의 「적도남북총성도」를 임금에게 바친 기사에 1,120여 자에 이르는 장문의 설명을 첨부하였고, 또 당시 영의정이던 崔錫鼎이 남긴 序文에서도 이 천문도의 내력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총성도는 조선 관상감이 중국에서 들여온 印本을 模寫하여 8帖 乾象圖로 다시 만든 것인데, 최석정이 건상도에 대한 글을 별도로 남긴 것을 보면, 조선 최초의 신법 천문도가 이 때 제작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제작된 곤여도와 달리 숙종 34년에 만든 건상도라고 확신할만한 실물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 8폭 병풍으로 만든 湯若望의 「적도남북총성도」가 발견되어, 이것이 숙종 때 조선에서 모사된 것일 수 있다는 추측을 낳았으나, 제1첩에 최석정이 아닌 徐光啓의 서문이 실려있어 불확실한 면이 있으므로 좀 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다.

 

『증보문헌비고』에 실린 湯若望의 「적도남북양총성도설」은 『恒星曆指』와 『恒星圖說』을 인용한 것이다. 이 글의 첫 부분에서는 한 개의 원 속에 중위도 지방에서 보이는 모든 항성을 그린 見界總星圖, 즉 「天象列次分野之圖」와 유사한 옛 방식이 아니라, 적도를 경계로 두 개의 원으로 나누어 남극 주위의 恒隱界도 포함한 남북 총성도를 택한 이유를 언급하고 있다. 즉 古圖의 항현권과 견계는 남북간 지점에 따라 같지 않으며, 圓體인 渾天은 적도 이남으로 갈수록 天道가 줄어드는데 비해 견계총성도에서는 점점 넓어지므로 형체가 상이하여 별을 그려 넣기가 어려운 반면, 적도를 경계로 성도를 둘로 나누면 경위도가 서로 대응하고 이치와 형세가 부합하므로 별의 위치가 어긋남이 없이 모두 분명하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또 측정과 추보의 편리를 위해 원주를 365도 1/4로 나눈 日度가 아니라 원주를 360도로 나눈 平度를 활용함과, 1,812개의 별을 여섯 등급으로 구분한 것, 그리고 황도경위도에 관한 사항과 망원경의 활용까지 언급되어 있다. 


 이 총성도설은 중국의 천문도로부터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기는 하지만 뒤이어 제작된 다른 천문도들을 볼 때 오히려 『항성역지』 등을 통하여 항성의 좌표 변환에 활용된 기하학적 방식과 총성도 작법을 이해하는 계기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오랜 동안 정확한 역서 작성에 매달려 있던 조선의 관상감이 천상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형태의 천문도로 눈을 돌리는 계기도 동시에 제공한 것이 바로 숙종 34년의 이 천문도였다고 할 수 있다.


 한 차례 신법 천문도를 모사한 경험을 쌓은 관상감은 6년 후 또 다른 천문도를 완성하였다. 실록에 의하면 관상감정 許遠이 연경에서 구입해온 『儀象志』와 圖本을 숙종 40년(1714)에 완성하였는데. 書 13책과 도본 2책을 唐本, 즉 중국에서 들여온 책으로부터 模出하였다고 한다. 이 때 펴낸 책과 도본은 곧 南懷仁의 『靈臺儀象志』와 「靈臺儀象志圖」을 가리킨다. 그런데 1674년에 완성된 南懷仁의 『영대의상지』가 세월이 지나면서 오차를 보이자 乾隆 9년(1744)부터 17년까지 戴進賢(Ignatius Kögler, 1680-1746) 등이 이를 개수하였고, 그것이 곧 『欽定儀象考成』이다. 南懷仁의 『영대의상지도』를 직접 보지 못한 상태에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흠정의상고성』에 수록된 「항성전도」 등과 『영대의상지도』의 천문도는 서로 좌표만 다를 뿐 같은 형태일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숙종 40년에 만든 도본 속의 천문도는 적도좌표 방식이었을 것이며, 戴進賢의 『흠정의상고성』에 실린 견계총성도인 「恒星全圖」 또는 「赤道南北恒星圖」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Ⅱ-1-2) 「黃道總星圖」

 

청조의 천문도를 대표하는 것으로 바로 앞에서 언급한 적도식 천문도들 외에 戴進賢과 利白明(Fernando Moggi)이 공동으로 제작한 「황도총성도」가 있으며, 이 천문도 역시 조선에 큰 영향을 끼쳤다. 擁正 원년(1723)에 제작된 「황도총성도」는 영조 17년(1741) 조선에 전해졌는데, 실록은 이듬해에 관상감이 이를 참조하여 새 성도를 만들었다고 적고있다. 『承政院日記』에 의하면 성도가 남북 두 개의 그림으로 平分된 총성도이며, 모든 별들을 6등으로 나누어 표시하였고, 또 태양의 흑점이나 목성의 위성 등 七政을 망원경으로 관찰한 모습도 포함되었다고 하였다.


물론 이 기사만으로는 영조 18년의 천문도가 戴進賢의 「황도총성도」를 옮긴 것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천문도 중에서 칠정의 망원경 모습을 싣고 있는 것은 모두 황도총성도이고, 또 1년전 역관 안국린 등이 북경 천주당을 찾아가 戴進賢, 徐懋德(Andre Pereira)과 깊이 교제하면서 여러 星表와 數表를 구하여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더욱이 戴進賢의 「황도총성도」가 망원경으로 관찰한 칠정을 그린 중국 최초의 천문도인 동시에 황도극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천문도이므로 그렇게 추정될 수밖에 없다.


戴進賢의 천문도를 원본으로 삼아 영조 18년에 모사가 시작되어 그 다음 해에 완성된 조선의 천문도는 이용범에 의하여 현재 법주사에 소장되어있는 「황도남북양총성도」(보물 제848호)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 뿐만 아니라 법주사 천문도의 실체를 추적하는 과정 중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戴進賢 등이 만든 그림2의 「황도총성도」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가로 62.2cm, 세로 39.5cm인 두꺼운 한지에 직경 30.5cm의 원 두 개가 좌우로 자리잡은 국립중앙도서관의 목판 천문도에는 법주사의 총성도에서는 탈락된 원본의 제작 연대와 제작자에 관한 기사 한 줄이 추가되어 있어, 1742년 조선 관상감에서 일어난 일의 전후를 완전히 밝히게 되었다. 
 

최근까지 「신법천문도」로 불려진 법주사의 황도총성도는 그림3에서 보듯이 戴進賢의 그것을 모사하였음이 확실하지만, 戴進賢의 허술한 소형 목판 원본에 비해 법주사의 것은 질긴 고급 갈포 위에 그린 높이 183cm, 길이 451cm의 거대한 8첩 병풍이다. 이 천문도의 제1첩에는 ‘新法天文圖說’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2의 하단에서 옮겨온 戴進賢의 설명문과 나란히 일월오성의 망원경 모습이 자리잡고 있다. 여러 개의 흑점을 표시한 태양이 맨 위에 있으며, 바로 아래에는 무늬로 표면의 坳突을 나타낸 태음이 있다. 그 아래의 오성은 태양에서 멀리 떨어진 순서대로 나열하였는데 고리와 다섯 개의 달을 거느린 토성과 네 개의 위성을 대동한 목성에 이어 화성, 금성, 수성에 이르기까지 적, 백, 황, 청, 회색의 서로 다른 색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 마지막 제8첩에는 천문도의 모사에 관여한 관원들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다. 1,066성의 황도북총성도와 789성의 황도남총성도에는 남북극과 적도, 그리고 30도 간격의 赤經 곡선까지 추가되어 있어 대체적인 적도좌표를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천문도를 큰 병풍에 확대 모사할 때 작은 원본 천문도 한 장만으로 많은 별들의 위치를 결정하였을 리가 없는 만큼 이 때 조선의 관상감이 정확한 황도좌표가 명기된 별도의 星表를 확보하여 참조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戴進賢 등이 「황도총성도」를 만들 때 근거로 삼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의상고성』에 실린 恒星黃赤經緯表를 조선에서도 미리 입수하여 영조 18년부터 활용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Ⅱ-1-3) 「新舊複合天文圖」

 

앞에서 언급된 대로 법주사의 천문도 외에도 戴進賢의 「황도총성도」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 국내외에 3점이나 남아있다. 경복궁의 국립민속박물관과 영국 캠브리지의 휘플과학박물관(Whipple Museum of Science), 그리고 일본 오사카의 南蠻문화관에 각각 소장된 「신구복합천문도」가 그것이다. 사소한 일부분을 제외하면 동일한 이들 천문도에는 그림4에서 보듯이 「천상열차분야도」와 「황도남북양총성도」가 나란히 그려져 있으며, 양 총성도의 상단에는 戴進賢 「황도총성도」의 설명문이, 하단에는 『漢書天文志』 이후 별자리의 변천 자취가, 그리고 제8첩에는 칠정의 망원경 모습이 실려있다. 높이 168cm에 전체 폭이 464cm인 경복궁의 이 천문도에는 「천상열차분야도」에 담긴 전통 천문학과 「황도남북양총성도」가 대변하는 서양의 신법 천문학이 공존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천상열차분야도」와 짝을 이루는 신법 천문도로 적도총성도가 아니라 「황도남북양총성도」를 택한 것과 전체적인 배치를 보면 그 때까지 끈질기게 유지되어 왔던 천문역산의 전통이 새로운 천문 지식의 수용을 통하여 변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을 강조하는 듯하다. 농경사회의 최대 관심사인 기후 변화는 절기로 표현되고, 절기는 황도상의 태양의 위치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므로 청이 시헌력을 도입하면서부터 황도를 24등분한 定氣法을 채용하여 절기를 예측하였다. 또 역산의 최대 관심사인 칠정의 운행이 황도 주변에 모여 있으므로 日躔과 月離, 그리고 五緯의 정확한 위치를 예측하는데도 황도좌표가 유리하다. 더욱이 정확한 역서 작성을 위하여 백년의 세월동안 큰 대가를 치른 끝에 戴進賢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드디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조선 관상감의 입장에서 칠정산 시대의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비견할만한 천문도를 골랐다면 戴進賢의 「황도남북양총성도」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 「신구복합천문도」의 제8첩에 실린 오위의 망원경 관찰도는 다음과 같이 서양의 천체 관찰 성과와 연결된다. 먼저 목성을 돌고 있는 네 개의 위성은 갈릴레오가 1610년 1월에 이미 발견하였으므로 새로울 것이 없지만, 경도 측정에 중요한 기준이 되는 이 위성들의 공전주기는 1668년에 이른 후에야 카시니(Giovanni Domenico Cassini)가 정확한 측정값을 제시할 수 있었다. 토성의 경우에도 1655년 호이헨스(Christiaan Huygens)에 의하여 토성의 가장 큰 위성이 발견되었고 곧이어 이듬해에는 모양이 변하는 토성의 꼬리가 실은 얇은 고리라는 사실도 규명되었지만, 나머지 네 개의 위성은 1684년에 카시니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戴進賢이 카시니의 정밀한 관측 성과와 케플러(Johannes Kepler)의 행성 타원궤도론을 반영하여 『역상고성후편』을 발간한 것이 건륭 6년(1741)이다. 최신 서양 천문 지식을 담은 戴進賢의 이 책을 조선에서 구입해 들인 것이 영조 21년(1745)이므로, 조선의 관상감도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서구의 수준에 상당히 가까이 다가간 적이 있었음을 이들 천문도와 역서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Ⅱ-1-4) 「渾天全圖」

 

「적도남북항성도」와 함께 『의상고성』에 나란히 수록된 戴進賢의 「항성전도」는 湯若望의 「적도남북총성도」보다 거의 한 세기쯤 뒤에 제작되었으나 서구식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 옛 천문도의 외형을 취하고 있다. 그림5의 「항성전도」에서 보듯이 적도좌표 방식의 중앙에는 恒見圈이 표시되어 있으며, 그 바깥의 별자리는 28宿로 구분하였고, 또 外輪까지 12次로 나눈 것이 중국의 옛 방식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 항성도는 동양 고유의 천문도가 가지고 있던 약점을 고치기 위하여 천구를 투영기하의 방식으로 평면화한 것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 등 구법 천문도를 살펴보면 적도와 황도가 같은 크기로 그려져 있으므로 두 天道가 교차하는 춘분점과 추분점이 천문도의 중심, 즉 북극점에 대하여 대칭을 이루지 못하고 제법 벗어나 있다. 그러나 戴進賢의 견계총성도인 「항성전도」는 『항성역지』에 소개된 대로 서양 기하학의 입체투영(stereographic projection)을 거친 것이므로 구법 천문도와 외양은 비슷하지만 춘분점과 추분점이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고, 또 동지점이 하지점보다 적도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등 작도 체계가 완전히 다른 천문도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그림6의 「혼천전도」를 살펴보면, 서양 천문도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그 근본에 어두웠던 이 땅의 학자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시행착오를 읽는 듯하다.  이 천문도의 제작자는 북극이 중심이어야 할 적도조차 약간 이동시켜 춘추분점이 서로 대칭의 위치에 있음을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적도의 이동은 동서 어느 쪽의 천문도 작성 원칙에도 어긋나는 것이므로 적도 및 황도총성도를 모두 제작한 경험을 가진 관상감에서 이런 엉뚱한 방식을 택하였을 리가 없으며, 따라서 「혼천전도」는 아직 서양 천문학의 깊은 부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던 민간 학자의 손으로 제작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황적거도인 23.5도를 반경으로 하는 중심원이 그려진 것을 보면 양극을 동시에 표시하는 서구식 총성도를 모방하고자 하였음이 분명하며, 심지어 적도를 등분한 시각선에 황도를 등분한 절기선을 일치시킨 기상천외함도 결국 신법천문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 천문도의 제작시기는 戴進賢의 「황도총성도」가 전래되고도 상당한 세월이 지난 18세기 후반 이후일 것이다.

 

「혼천전도」의 중앙을 점하고 있는 성도는 그렇다 하더라도 천문도 주변에 기록한 내용을 살펴보면 이 천문도의 제작자가 서양 천문학의 새로운 지식을 상당히 앞장서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즉 천문도의 상단에 배치한 七政周天圖에는 칠정의 망원경 모습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크기와 지구로부터 떨어진 거리, 운행속도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또 일월교식도와 이십사절태양출입시각도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하단에는 이십사절신혼중성, 티코 브라헤의 우주 체계를 소개하는 七政新圖, 현망회삭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구조를 그린 七政古圖까지 소개하고 있어 당시 천문에 관심을 가진 민간 학자들이 어느 정도 수준에서 새로운 지식을 수용하고 있었는지를 가늠케 하고 있다.

 

Ⅱ-1-5) 平渾儀

 

서양 천문학의 중국 유입은 먼저 서양의 대표적인 천문의기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607년 利瑪竇에 의해 『혼개통헌도설』이 한역 출간되었고, 곧이어 1611년경 熊三拔(Sabbathinus de Ursis)이 『간평의설』을 저술하면서, 球體인 혼천의를 대신하여 이를 평면에 투영시킨 서구식 의기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서법 의기가 제작되어 중국의 것으로 태어나는 과정 중에 의기의 제도 역시 서양에서의 것 그대로가 아니라 부분적이나마 변화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변화로 중세 서양 천문의기를 대표하던 평면구형 아스트로라베가 利瑪竇가 소개한 그대로의 혼개통헌의가 아니라 평혼의로 바뀐 것을 들 수 있다. 아마도 혼개통헌의는 특정 위도에서만 활용 가능한데다 취득 정보가 많은 만큼 활용법이 복잡하였기 때문에 좀 더 간편한 형태의 평혼의가 선택되었을 것이다.


평혼의는 혼개통헌의에서 지평좌표 등이 그려진 內盤(plate) 대신 남북총성도 또는 견계총성도를 바탕으로 활용하였으며, 적도와 황도뿐만 아니라 여러 밝은 별들을 배열하여 현란하기까지 한 아스트로라베의 外輪(rete)을 단순화시킨 평혼의의 外盤은 지평과 朦影 정도만 나타내도록 한 것이다. 주야 겸용인 서양의 아스트로라베로 별을 측정할 때는 북극을 중심으로 남회귀선까지의 소수의 밝은 별들만 대상으로 삼는데 비해, 평혼의는 천문도가 바탕을 구성하고 있으므로 見界내의 모든 별자리가 측정대상이며, 따라서 中星의 출입을 살펴 절기의 변화를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실록 등 조선의 공식 기록에서 남아있는 아스트로라베類의 제작 흔적은 숙종 44년(1718) 6월의 中星儀와 簡平儀가 유일한데, 시헌력에 맞춘 중성의 새로운 추산과 관련된 것으로 보아 이것이 조선에서 제작된 첫 평혼의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의기의 실존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며, 다만 평혼의의 제도를 갖춘 평면 의기 몇 점이 국내외에 유물로 전해지고 있다.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의 박규수가 만든 평혼의와, 서울시립박물관의 평혼의, 그리고 현재 파리천문대가 소장하고 있는 간평의가 대표적인 것들이다.


셋 중에서 제작 년도가 강희 19년(1680)으로 가장 앞선 것으로 보이는 파리의 간평의는 최초의 서울 주재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플랑시(Collin de Plancy)가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천문대에 남아있다. 뒷면 상단에 “簡平儀”라고 의기명을 새긴 그림7의 이 평혼의는 유럽으로 건너가기 전 분명히 조선에 있었던 것이지만 조선의 관상감에서 제작된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의기의 뒷면 하단에 “康熙十有九年歲在庚申初夏御製”라고 정확한 제작의 시기와 주체를 밝히고 있으며, 『황조예기도식』의 「御製簡平儀」 기사에서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푸른 색 바탕 위에 금색으로 성좌를 그려 넣어 매우 화려한 느낌을 주는 이 의기는 『황조예기도식』의 외관 스케치나 제도에 관한 기사와 비교하여 거의 차이가 없다. 淸宮에서 공식 제작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 의기는 양국간의 정식 절차를 통해 조선 왕실에 전해졌을 것인데, 결국 韓末의 혼란 가운데서 프랑스로 떠나고 만 셈이다. 조선 최초의 서법 평면의기인 숙종 44년의 중성의와 간평의는 康熙의 어제간평의가 18세기초에 조선에 전해진 후 이를 복제하여 만든 것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파리 간평의의 제도는 기본적으로 적도남북총성도와 동일하다. 의기의 바탕을 이루는 성도는 적도를 경계로 남북 兩天으로 나누고 28宿가 아니라 12궁과 24절기로 등분한 다음, 천구의 평면 투영 원리를 지켜 별자리를 매우 정교하게 그린 것이다. 항성의 좌표는 이 의기의 제작자인 南懷仁이, 康熙帝의 명을 받아 자신이 1674년에 완성한 『영대의상지』와 부속 도본을 참조하였을 것이다. 앞면의 地盤은 지평선과 이에 수직인 赤緯線, 그리고 북극이 중심인 황적거도 크기의 時盤으로 구성되는데, 지평 위의 항성들이 관심의 대상이므로 몽영선은 제외되었다. 그러나 뒷면과 달리 지평선 아래를 지반으로 가리지 않았으므로 이들의 출입을 예측하고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천구의 남극을 향하여 바라본 적도 이남의 하늘은 중앙이 솟아오른 南地平 위에 표현되며, 이것이 곧 뒷면의 모습이다. 뒷면의 지반은 지평선 아래를 매워 계절별 밤의 길이를 동심원호로 나타낸 후 이것을 昏, 五更, 晨으로 구분하여 항성의 위치로부터 야간 시각을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림9의 서울시립박물관에 소장 중인 평혼의는 파리천문대의 간평의가 남북총성도를 內盤의 성도로 삼았는데 비해 견계총성도를 택함으로써 매우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의기의 중심부만 비교하면 두 의기 사이에 큰 차이가 없지만, 서울시립박물관의 평혼의에는 적도 이남의 見界에 이르기까지 모든 별을 앞면에 그렸으므로 지평선이 성도를 둥글게 감싸는 흔하지 않은 모습이 되었다. 따라서 뒷면에는 성도를 그릴 필요가 없으므로 완전히 매워진 外盤에 절기에 따른 밤의 길이를 그리고 昏, 五更, 晨으로 구분하였다.

 
185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의 평혼의에는 의기의 테두리에 桓堂創製라는 銘이 새겨져 있다. 최근 이 의기의 제작자가 대동강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는 瓛齋 朴珪壽(1807-1877)로 밝혀졌는데, 그의 후손家에서 두꺼운 한지에 덕수궁의 평혼의와 동일한 제도를 그린 의기가 발견되면서 조선의 서법 평면의기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될 수 있었다.

 

Ⅱ-2) 기하학의 수용과 신법 의기의 창제 - 후반기

 

Ⅱ-2-1) 簡平儀

 

간평의에 대하여 『항성역지』는 혼의를 평면 투영하여 얻은 것이라는 점에서는 평혼의와 동일하지만 적도면의 無限遠에 있는 照本에서 춘분점을 정면으로 바라본 천구의 모양을 그린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춘분과 추분을 잇는 선에 수직이면서 양극과 二至를 지나는 대권 평면 위에 투영되어 절기를 나타내는 적도와 그 거등권은 직선으로 표현되며, 또 시각선에 해당하는 양극을 지나는 다른 경선들은 곡선의 弧로 표현된다고 하였으므로 熊三拔의 『간평의설』에 소개된 의기와 제도가 동일하다. 그러나 이러한 투영 방식으로는 천구의 뒤쪽 半球가 가려지기 때문에 천구의 앞뒤에서 동일한 태양의 운행 이외의 것은 도시하기가 곤란하며, 따라서 간평의는 평혼의처럼 星圖用으로는 활용될 수가 없다.


조선에서 아스트로라베類의 평면 관측의기가 제작된 것은 1718년의 기사가 전부일 정도로 공식적인 제작 기록이 드문 편인데, 특히 간평의는 평혼의보다도 제작 기회가 더 적었는지 실제 의기로 사용되었던 유물은 아직 한 점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나마 홍대용의 測管儀 제작 기록과,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에 “石製節氣表板”이라는 이름으로 소장된 간평의 석판, 그리고 앞서 언급한 평혼의와 함께 박규수의 후손가에서 발견된 지판 간평의가 현재 찾아볼 수 있는 것의 전부이다.


1770년을 전후하여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는 홍대용의 측관의가 18세기의 여러 의기 중에서 주목되는 이유는 18세기 전반의 천문도 등은 중국에서 들여온 것을 복제하는 수준에서 제작되었으나, 이것은 서양 기하학과 투영의 원리를 활용하여 만든 조선 최초의 의기이기 때문이다. 홍대용은 『數理精蘊』에 실린 기하학의 원리를 실용의 관점에서 나름대로 정리하여 자신의 저서 『籌解需用』에 포함시키는 등 서양 수학을 체계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입체 의기인 혼천의를 평면에 투영한 측관의, 곧 간평의의 제도를 파악하여 스스로 서법 평면의기를 설계, 제작하였다. 籠水閣의 여러 의기 중에서도 西法의 활용이 가장 두드러진 측관의에 대하여 홍대용은 새 의기의 제도는 분명 서양의 천문의기에서 유래되었으나 의기의 형태는 方圓을 벗어나지 못하고 관측의 방식은 勾股의 활용에 지나지 않으므로, 唐虞가 남긴 선기옥형의 옛 법이나 西法에 의한 새로운 의기이거나 기하학의 적용에서 서로 상통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球體인 혼천의는 제도가 복잡하여 제작과 활용에 편리하지 못하고 관측 의기로서 효용에 한계가 있으므로 다양한 쓰임새에 비하여 제도와 용법이 간편한 서법 평면의기로 혼천의를 대체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는 측관의를 만들기 전에 다녀온 燕行을 정리하면서 “泰西의 법은 산수를 근본으로 삼고 의기로 관찰하여 만물을 재고 헤아리니 무릇 천하의 遠近, 高深, 巨細, 輕重을 눈앞에 모아 손바닥을 보는 듯하다”고 소회를 적은 글에서 잘 드러나 있다.

 

혼천의의 삼진의에 속한 환들을 평면의기인 측관의의 내반 위에 투영할 때, 적도환은 天常遊旋이므로 내반 위에서 하나의 직선, 곧 적도선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황도환의 경우 절기에 따라 적도로부터의 각도가 바뀌게 되므로, 내반 위에 그려지는 황도선은 적도선과 평행인 여러 개의 절기선으로 투영될 수밖에 없다. 내반의 너비가 적도 좌우로 23.5도씩 펼쳐짐은 황도의 최대 거적도가 23.5도이기 때문이다. 남북 양극을 잇는 極線은 적도선과 중심에서 직교하며 내륜의 주천도 눈금에 연결된다.


춘추분에는 황도가 적도와 일치하므로 내반의 적도선이 곧 춘추분을 나타내는 절기선인데 비해, 다른 절기의 경우 해당 거적도의 正弦만큼 적도선에서 멀어진다. 예를 들어 춘분 후 세 번째 절기인 입하에 해당하는 절기선을 내반 위에 그리자면, 먼저 적도 상하에 황도를 나타내는 두 반원을 그리고, 이것과 적도선이 만나는 점으로부터 춘분과 입하 사이의 黃經差 45도만큼 황도원을 따라 좌측으로 옮겨간다. 양 반원을 따라 좌로 45도 옮겨간 상하의 두 점을 적도선과 나란하게 이으면 이것이 입하의 절기선이며, 황경차의 正弦값만큼 적도선과 간격을 가진다. 따라서 춘추분에 가까운 절기선들은 그 간격이 성긴 반면 동하지에 다가갈수록 절기선의 간격이 조밀해진다. 이러한 작법을 통해 내반 위에 적도선 좌우로 6개씩, 모두 13개의 절기선을 그려 1년 24절기를 정확히 나타낼 수 있다.


시각선은 태양의 日週운동을 내반 위에 옮긴 것인 만큼, 절기에 따라 시각선의 눈금이 지나가는 위치가 다르다. 춘추분의 경우, 적도와 일치하는 황도를 따른 태양의 등속 원운동이 적도선 위에서 단진동의 궤적을 가진다. 따라서 二分日의 시각 눈금은 적도선을 지름으로 하는 원, 즉 내륜에 새긴 주천도분을 등분하고, 이를 적도선 위에 투영하여 구한다. 주천 360도를 3도3/4로 나누어 하루를 96刻으로 정한 시헌력법을 따랐다. 내륜 위의 96개의 눈금을 적도선 위로 투영하면 극선의 상하에 24개씩 시각 눈금이 구해진다. 다른 절기의 시각 눈금은 해당 절기선 위에 표시된다. 동하지의 경우에는 태양이 二至線 위에서 단진동의 궤적을 그린다. 따라서 二至線을 지름으로 하는 원을 그리고, 그 원주 위의 눈금 96개를 二至線 위에 투영하여 이 날의 시각 눈금을 구한다. 절기선을 가로지르는 시각선을 그리자면 매 절기선마다 시각 눈금을 구한 후, 동일한 시각의 눈금을 횡으로 연결하여야 한다. 午正初와 子正初에 해당하는 시각선이 內輪의 원호에 일치하므로 적도선 위의 해당시각 눈금을 중앙점으로 삼고, 二至線 위의 눈금을 좌우점으로 삼아, 이 세 점을 지나는 원호를 그려 시각선을 완성하였다. 그림10(a)에 보인 내반의 눈금선은 仰釜日晷의 눈금선이 影針과 춘추분의 오정점을 잇는 방향에 수직인 면에 투영되었을 때 나타나는 것과 동일하다.

 

내륜의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외륜은 내륜과 중심축을 공유하는 동심륜이다. 내반이 적도선을 중심으로 좌우로 二至의 거적도에 해당하는 너비를 가지는데 비해, 외반은 축심을 지나는 지평선을 상변으로 하고 아래로 약간의 너비를 가진다. 내반에서 적도선에 수직인 극선을 따라 관통하는 실을 내륜에 잇듯이, 외반에서도 지평선에 수직인 천정선 및 수선을 따라 관통하는 실을 외륜의 눈금에 이어 놓았다. 외륜의 주천도분을 외반의 지평선에 투영하여 수선 좌우에 수선과 평행한 세로 선들을 그리면, 수선에 가까울수록 점점 성기고 멀수록 점점 조밀하다. 이것이 직응도분이다. 그림10(b)는 외륜과 외반의 형상을 나타낸 것이다.

 

Ⅱ-2-2) 新法地平日晷

 

15세기 전반에 처음 만들어진 후 궁궐 안팎에서 널리 쓰인 앙부일귀는 햇살이 항상 통을 관통하도록 혼천의의 望筒을 움직이면서 다른 쪽 끝에 도달한 빛의 궤적을 반구면 위에 받아내는 방식으로 눈금을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앙부일귀는 影表의 그림자가 구면에 언제나 수직으로 던져지므로 상이 뚜렷하여 계절과 시각을 정확히 읽을 수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반면에 시헌력의 도입과 더불어 들어온 조선 후기의 서양식 해시계들은 모두 규표의 그림자를 평면 위에서 받아내었으므로 외양이 매우 단순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평면 해시계의 눈금의 형상은 규표의 그림자가 투영되는 면의 기울기에 따라 서로 다른 변환을 거치는 만큼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다. 그 중에서도 신법지평일귀는 지평면 위에서도 시각과 절기를 동시에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이므로 조선 관상감이 큰 관심을 가졌던 의기이기도 하다.


조선 최초의 서구식 평면 해시계는 1645년 소현세자가 청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것으로 추정되는 신법지평일귀인 것 같다. 현재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에 전시중인 이 해시계는 가로 120.3cm, 너비 51.5cm, 두께 16.5cm인 흰 대리석 판 위에 절기선과 시각선을 새긴 것으로, 무게가 자그마치 310kg에 달하고 있다. 보물 839호로 지정된 이 거대한 해시계의 표면 상단 중앙에는 ‘新法地平日晷’라는 이름이, 오른쪽에는 제작 연도와 제작자에 관한 간단한 기록이 남아 있다. 또 午正線의 위쪽에 삼각형 모양의 影針을 꽂았던 흔적도 남아 있다. 지평일귀의 영침이 단순히 면에 수직인 기둥이 아니라 삼각형인 것은 표 전체의 그림자로는 시각을, 중간의 뽀쪽한 그림자로는 절기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덕수궁에는 조선 관상감이 湯若望의 평면일귀를 원본으로 하여 새로 제작한 또 다른 신법지평일귀가 소장되어 있는데, 가로 58.9cm에 너비가 38.2cm인 검은 대리석에 새긴 이 해시계는 현재 보물 8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앞 측면에 “漢陽北極出地三十七度三十九分”라고 새긴 것으로 보아 이 지평일귀는 숙종 39년(癸巳, 1713) 청의 何國柱가 한양의 정밀한 북극고도를 잰 이후에 제작된 것이 분명하다.

 

앞서 중국에서 들여온 해시계는 燕京의 북극출지도에 의거한 것이므로 한양의 절기와 시각을 읽는데 오차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교정하고자 한양의 위도에 맞추어 새로운 것을 제작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신법지평일귀를 만든 때에는 조선 관상감이 해시계의 눈금 작도법에 통달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많은 한역 서양서 중에서 유일하게 擁正 원년(1723)에 출간된 『수리정온』에 지평일귀의 작도법이 실려있는데, 조선에서는 정조 20년(1796)에 서호수, 성주덕 등 관상감 관계자들이 편찬한 『國朝曆象考』에서 이를 부분적으로 수정 정리하여 소개하였다. 또 순조 18년(1818)에 성주덕이 편찬한 『書雲觀志』 역시 이 내용을 전재하면서 정조대에 만든 지평일귀의 제도는 『수리정온』에 그려진 일귀법을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정조 13년(1789)에 관상감 영사 김익의 제청에 의하여 한양의 북극고도에 맞춘 새로운 지평일귀를 감원 김영이 제작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궁중유물전시관의 보물 840호일 것으로 추정된다.

 

Ⅱ-2-3) 簡平日晷와 渾蓋日晷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에는 통상적인 지평일귀와는 전혀 다른 모양의 눈금을 갖는 평면일귀도 소장되어 있다. “乾隆五十年乙巳仲秋立” 즉 정조 9년(1785) 가을에 제작되었다는 銘을 가진 이 의기는 길이 129cm에 너비는 52.2cm, 그리고 두께가 12.3cm인 잘 다듬은 艾石 위에 簡平日晷와 渾蓋日晷로 명명된 두 종류의 해시계 눈금을 나란히 새긴 것이다. 그림9에서 보듯이 이 평면 해시계는 중국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가 없는 독특한 형상의 절기선과 시각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우 특이한 체계의 눈금이었기에 해석이 어려웠고, 그런 탓에 여태껏 이 해시계의 제도에 대한 본격적인 규명이 시도된 적이 없었다.


그림12의 좌측에 보인, 마치 앙부일귀를 평면에 투영해 놓은 듯한 눈금을 갖춘 의기를 간평일귀라고 부른 것은 熊三拔의 『간평의설』에서 다루는 의기와 제도가 유사하기 때문이며, 그림의 우측에 새겨진 의기를 혼개일귀라고 이름지은 것 역시 利瑪竇가 『혼개통헌도설』에서 소개한 의기와 작도법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혼개통헌의와 간평의는 天球를 평면상에 투영하여 표현하는 방식에 의해 구분되는데, 平面球形 아스트로라베(planispheric astrolabe)의 중국판인 혼개통헌의는 천구의 남극에서 바라본 동지선 이북의 천구를 적도면에 투영한 의기이고, 반면에 간평의 곧 로자(Rojas)형 범용 아스트로라베(universal astrolabe)는 천구 밖 무한원점에서 바라본 천상을 양극을 지나는 면 위에 직교 투영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혼개일귀는 천구상의 天頂점, 즉 한양의 북극고도에 해당하는 북위 37도 39분 15초의 위치에서 바라본 황도를 지평면에 투영하여 절기선과 시각선을 그린 것이며, 간평일귀는 天頂에서 천구 밖으로 무한히 뻗어나간 위치에서 지평면에 직교 투영한 황도의 궤적을 절기와 시각에 맞추어 그린 것이다. 그림13은 혼개일귀에서 이미 완성된 계절선 위에 시각선이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아날렘마(analemma)를 이용하여 간단히 도시한 것이다.

 

해시계를 눈금의 제도에 따라 분류하면 20여 종에 이른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평면일귀들은 모두 西法에 근거하여 제작된 것들이므로 먼저 서양의 해시계 중에서 이 두 일귀와 유사한 것을 조사해 본 결과 간평일귀의 눈금 구성이 16세기경 서양에 등장한 일종의 지평일귀인 오트리드(Oughtred)식 해시계와 상당히 닮았음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눈금을 그리기 위한 투영법을 분석해 보면 오트리드형 해시계는 간평일귀와 상반된 방식으로 투영된 것이며, 오히려 이것이 겉보기는 완전히 다르지만 혼개일귀와 깊은 상관관계를 지녔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편 조선에 전래된 서양 과학의 경유지였던 중국의 자료들 가운데서도 덕수궁의 이 일귀들과 닮은 의기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으며, 더욱이 한역 서양 과학서 중에서도 이 의기의 제도를 직접적으로 서술한 곳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선의 이 특이한 평면일귀는 西法을 따른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직접 의기를 보고 복제하듯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처음 만들어진 창작품임이 분명하다. 앞서 언급한대로 최초의 서법 평면의기인 혼개통헌의와 간평의의 제도와 용법은 『혼개통헌도설』과 『간평의설』에서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혼개일귀와 간평일귀의 제작이 가능하였다고 여기기는 어려울 것 같다. 즉 이 일귀들은 천구의 여러 평면 투영법 가운데서도 응용의 수준이 매우 높은 예에 해당되므로, 視學과 투영에 관한 기하학적 기본이 제대로 다져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이해조차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앞의 두 평면일귀는 『항성역지』에서 다루고 있는 투영법의 분류 및 일반 원리에 더하여, 『수리정온』에서 예로 제시한 지평일귀의 제작법까지 습득한 후에 비로소 창작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이 의기에는 제작일자 외에도 황도와 적도의 교차각을 23도 29분으로, 또 한양의 북극 고도를 37도 39분 15초로 최신의 정확한 값을 銘文에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관상감에서 공식적으로 만든 궁궐용이었던 듯하다. 또 관상감 관련자 중에서도 서양 천문학과 평면 투영에 필요한 기하학적 지식을 고루 갖춘 자의 주관 하에서 이것이 제작되었을 것인데, 정확한 근거는 제시될 수 없지만 관상감의 제조를 역임한 적이 있는 徐浩修(1736-1799)에 의하여 간평 및 혼개일귀가 창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생부 徐命膺(1716-1787)와 더불어 양대에 걸쳐 이조판서와 관상감의 제조를 지내면서 서력에 근거한 역산의 확립과 서법 의기의 제작에 깊이 관여하였던 서호수의 유저 목록 가운데 『역상고성보해』,『수리정온보해』,『율려통의』,『渾蓋圖說集箋』 등이 포함되었음을 보건대, 18세기 후반에 평면 투영에 관한 한 서호수보다 더 해박하였던 학자는 없었던 듯하다.

 

Ⅱ-2-4) 赤道經緯儀

 

서양 천문학의 유입은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의기인 혼천의의 제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먼저 湯若望 등이 『숭정역서』를 통하여 적도좌표 방식을 위주로 하던 중국 혼천의와 구별되는 황도 방식에 중점을 둔 서양 혼천의의 제도와 용법을 소개하였으며, 그를 이어 청 흠천감을 관장한 南懷仁은 측정의 정확도를 유지하고 의기의 편의성을 높일 목적으로 혼천의를 분리하여 적도경위의와 황도경위의로 대체 제작하였다.  


南懷仁이 康熙 12년(1673)에 완성한 적도경위의는 정조 13년(1789) 金泳에 의하여 조선 관상감에서도 제작되었다. 김영은 역관 이덕성 등과 더불어 羅雅谷(Jacobus Rho)의 『測量全義』와 南懷仁의 『영대의상지』를 참조하여 의기의 제도를 세우고, 지평일귀와 함께 한양의 북극고도에 맞춘 신법 의기를 각 두 벌씩 만들어 한 쌍은 관상감에 두었다고 한다.


子午規, 赤道規, 四游規의 세 환으로 구성된 김영의 적도경위의는 환이 넷인 『측량전의』의 제도보다는, 그림14에 보인 南懷仁의 것을 택한 것이다. 받침에 해당하는 반원 雲座 위에 외경이 3척인 자오규를 고정시킨 후, 이것의 허리에 적도규를 부착하여 적도좌표계를 형성하였고, 그 가운데 들어있는 사유규가 극축을 자유롭게 선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종래의 혼천의가 三重七圈이었는데 비해 이 적도경위의는 二重三圈으로 단순화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적도경위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정밀측정을 위하여 눈금을 細分化한 것이다. 자오규의 경우 對角線比例를 활용하여 1도를 60분으로 나누고, 적도규 역시 1刻을 15등분하였다. 눈금을 옛 방식으로 나눌 경우 元明의 대형 의기에서도 1도를 10등분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서양에서 활용된 대각선 비례에 의한 각도의 분할 기법이 도입되면서 훨씬 작은 의기로도 60등분으로 세분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대형 의기인 南懷仁의 적도경위의에서 적도권의 每度를 6개의 장방형으로 나누고, 매 장방형은 대각선비례에 의하여 10등분하며, 窺表의 눈금을 또다시 4등분하여 15초 단위로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을 보면, 조선의 의기에서도 규표에 의한 세분까지 활용하여 15초 단위의 정밀 측정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역산을 비롯한 천문학의 수준이 결국은 천체 측정값의 정밀도에 달려 있음을 단적으로 나타낸 예로 한양의 북극고도와 관련한 『증보문헌비고』의 다음 기록을 들 수 있다.

 

“한양의 북극고도는 37도 39분 15초이다. … 북극의 出地度는 곧 적도와 천정 사이의 각도인데, 만일 측정이 정밀하지 못하여 고도 차이가 1분에 이른다면 춘추분의 계산에 필히 한 시간이나 차이가 생기며, 동하지의 예측에는 하루 또는 이틀의 차이가 생긴다. 日躔에 이런 오차가 생기면 月離와 五星의 경위도가 틀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북극고도의 측정은 가장 정밀해야 하며, 간략한 값을 취함을 허용할 수가 없다.

 

정조 13년의 적도경위의 제작 시 『新法中星紀』와 『漏籌通義』도 동시에 편찬되었는데, 새로운 중성기는 정조 7년(1783)의 최신 항성 적도경위도에 한양의 정밀한 북극고도를 적용하여 절기별 시각에 따른 중성을 추보한 것이므로, 조선이 보유하였던 천문관측서 중에서 이것보다 더 정밀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4. 맺는 말

 

서양 역법의 채택 이후 17세기 후반의 중국과 18세기 전반의 조선이 이를 정착시켜 나가는 과정을 비교해보면, 중국에서는 스스로 學人의 입장에서 서양 과학의 수용에 적극적이던 康熙帝의 61년 통치가 있었고 흠천감과 무관한 재야 士人층의 두터운 공로가 있었는데 비해, 조선에서는 천리경을 窺日影이라 하니 불경스럽다하여 깨버린 영조의 51년 치세가 있었고 역서 작성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고 있던 관상감의 中人층 감원들의 헌신적인 역할이 거의 전부였다는 점이 뚜렷하게 대비된다.


유학 자체가 格物致知를 중시하는 학문이었던 만큼 조선 후기에도 많은 유학자들이 천문역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이치를 탐구하였으나, 오직 사유를 통하여 上通天文下達地理하고자 한 조선 성리학의 철학적 방법은 관측 결과에 따라 전혀 새로운 이론 체계로 변환될 수 있는 자연법칙의 성립과정에는 적당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과학 지식을 받아들이는데도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다만 관상감의 領事 또는 提調를 역임하였던 자들이나 재야의 일부 학자들이 천문학 등 서학 전반에 우호적이었기에 조선의 실학이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작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선교사들이 소개한 서양 과학을 거의 일방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양국이 마찬가지이었지만, 梅文鼎을 비롯한 중국의 재야 학자들은 西法中國源流說로 스스로를 달래며 四夷의 학문을 소화하여 마침내 『사고전서』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성취를 이룬 반면, 오히려 청의 예를 보고도 애써 서학을 외면하다가 西敎를 빌미로 그 동안 이룬 과학의 작은 성과조차 짓밟아 버린 東夷 사대부들의 작태는 역사의 눈총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신법 의기를 통하여 서양 과학의 자취를 찾는다면 두 나라 사이에 더 큰 차이가 드러난다. 『황조예기도식』에 등재된 중국의 서법 의기들은 선교사들의 제작 참여 여부를 떠나 일습이 체계적으로 갖추어졌는데 비해, 조선 후기에는 세종 때와 같은 의기창제 프로젝트가 기획된 적이 없었으므로 대부분 산발적인 模作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독자적인 역법 운용에 전력을 기울이던 관상감이 있었고, 비록 소수에 불과하지만 홍대용이나 서호수 등 기하학의 바탕 위에서 새로운 천문을 익힌 학자들이 있었으므로 앞서 살펴본 정도나마 신법 의기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셈이다. 선교사들이 남긴 것이 대부분인 중국의 의기들만큼 크기나 精度 등에서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의기는 당대 조선의 서양 과학에 대한 지식의 전부가 반영된 것이라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지평일귀나 간평의 등은 단순히 신법 의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수학인 기하학을 이해하는 도구이자 정확한 측량을 통한 복리후생의 수단으로 인정되면서 그 가치가 중국에서보다 훨씬 더 귀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법 의기의 수용과 제작을 통하여 천문 지식만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방식과 방법론을 익힐 기회는 있었다 하더라도 실학의 세기가 남긴 과학 성취는 그 폭과 깊이에서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무엇보다 후세에 전하여 더 나은 결실로 이어지지 못하였으므로 끝내 불모의 과학이 되고 만 것이 또한 18세기의 조선 과학이다. 새로운 학문의 주역이었어야 할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들조차 사회개혁의 방안을 제시하면서도 이용후생의 실천적 기틀을 마련하는데는 소홀하였으며, 더욱이 새로운 과학에 대한 스스로의 무지를 깨치기 위한 노력이 전혀 미흡하였다는 점이 오늘날에 던지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20세기의 벽두에 국가의 암울한 현실을 앞에 두고 터져 나온 실학이라는 화두가 21세기의 첫머리에서는 어떤 의미로 재론되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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