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서양과의 첫 접촉으로는 인조 9년(1631) 중국에서 돌아온 조선의 사신 鄭斗源이 여러 가지 서양문물을 들여왔다는 기록이다. 그가 주로 서양선교사 로드리게스로부터 받아온 서양문물은 망원경(千里鏡), 기계식 시계(自鳴鍾), 그리고 서양식 소총(紅夷砲)를 비롯해서 천문도와 천문서, 역법서와 지리서(職方外紀), 서양풍속기 등이었다. 조금씩 서양에 대한 지식이 스며들고 있었음을 뜻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것이 처음은 아니어서, 예를 들면 선조 36년(1603) 이미 서양지도가 북경에서 들어온 적이 있고, 광해군 6년(1614)에 쓴 것으로 보이는 李睟光의 글 가운데 북경에서 몇 년 전에서야 처음 나온≪天主實義≫에 대한 논평도 실려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후 청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가 인조 22년 귀국하면서 들여온 훨씬 많은 서양문물은 국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특히 당시 중국에서 크게 활동하고 있던 독일출신의 선교사 아담 샬과 잘 사귀었고, 소현세자의 부인을 비롯한 가족 일부가 가톨릭이 되어 귀국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소현세자는 물론 조선정부가 중국에 보낸 사신은 아니었지만, 그의 영향은 보통 사신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다만 그는 귀국하자 곧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죽고 말았다.
결국 조선 후기의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의 도입은 당시 중국을 찾아갔던 조선사신들에 의해 다소간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조선 지식층이 갖고 있던 유일한 서양접촉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일본이나 중국에는 서양선교사들이 지속적으로 들어오고 또 상주하고 있었지만, 조선에는 아직 서양선교사가 나타난 일이 없었다. 중국에서 선교사들이 써내고 있는 서양을 소개하는 책자를 통해 서양에 대한 지식을 조금씩 쌓아 가고 있었던 당시의 조선 사대부계층 학자들이나 중인학자들은 중국에 가는 때를 이용하여 서양선교사들을 직접 만날 기회를 찾기 시작했고, 그 결과 17세기 이래 적지 않은 직접 접촉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조선은 중국이 명나라였을 시절에는 한 해에 한 번 이상의 중국사절단을 파견하였고, 청으로 바뀐 다음에는 그 횟수가 줄었지만, 그래도 한 해에 한 번씩은 반드시 중국사신을 파견했다. 그것이 조선의 중국에 대한 우호였고, 조공이었으며, 또한 가장 중요한 국제무역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 기회야말로 조선의 관점에서는 가장 중요한 서양의 과학기술이 조선에 스며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불행히도 수많은 사신들이 중국을 찾아갔지만 막상 그들 가운데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글로 남겨 준 사람은 아주 드물 정도이다. 예를 들면 숙종 30년(1704)의 李頤明(1658∼1722), 숙종 38년의 金昌業(1658∼1721), 영조 8년(1732)의 李宜顯(1669∼1745), 영조 42년의 홍대용 등이 서양선교사를 찾아가 만났고 그렇게 기록에 남기고 있다. 하지만 홍대용이 그래도 약간의 상세한 기록을 남겨 서양선교사들을 만나 과학적 대화를 조금 한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지, 다른 학자들의 선교사와의 만남은 그저 호기심 이상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나마 홍대용을 정점으로 그런 관심은 사그라졌던 것으로 보인다. 홍대용보다 11년 뒤인 정조 원년(1777)에 사신으로 갔던 李 은 선교사들이 살고 있던 교회에 찾아가 聖畵를 구경하기도 했지만, 별로 선교사들을 직접 만날 생각은 보이지 않고 있다. 홍대용의 친구로 홍대용의 지전설을 높이 평가했던 당대의 대표적 문필가 朴趾源도 정조 4년 중국에 갔을 때 선교사들을 일부러 찾아가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한 일은 별로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던가는 금방 짐작할 수 있다. 대체로 정조 전반기(1780년대)에 대해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정약용의 글에 의하면 당시 조선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서학서를 읽는 것이 일대 유행이었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즉각적으로 보수세력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것은 정조 후반기(1790년대)에 중국을 방문했던 여러 학자들, 특히 실학자로도 꼽히는 徐浩修, 柳得恭의 중국방문기에도 서양선교사를 찾아가 만났던 흔적은 없고, 서양 과학기술에 관한 기록 자체가 드문 것은 바로 그 당시의 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순조 원년(1801) 辛酉邪獄을 겪으면서 그런 경향은 완전히 잠재워졌다. 기독교가 크게 박해를 받기 시작하는 상황에서는 다른 과학기술분야라도 서학의 일부로 알려져 있었던 만큼 제대로 용납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순조 4년 북경을 방문한 어느 학자는 신유사옥 이후 중국을 방문한 조선인 학자들은 천주당 같은 곳은 아예 얼씬도 하지 않으려 했다고 기록에 남길 정도다. 순조 32년 연행사의 서장관으로 북경을 방문했던 金景善은 洋術은 지금 두 나라가 다 금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음험하고 사특함이 심하여 스스로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서양의 그림 그리는 법이나 여러 가지 신기한 기구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지 않고, 보고싶기도 하다면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선배 연행학자들 가운데 김창업·홍대용·박지원의 기록이 상세하다고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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