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기행과 서양 과학의 전래동의어 북경 여행, 조선 실학의 숨은 추동력
조선은 병자호란으로 청에 패배해 해마다 청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약속했다. 청나라의 수도 북경은 흔히 연경(燕京)으로도 불렸는데, 이 때문에 북경에 파견된 조선 사절단을 연행사(燕行使)라고 불렀다. 조선후기 연행사의 왕래는 나라 바깥 정보의 수집 통로이자 문화 교류의 장이었다. 특히 조선의 입장에서 볼 때, 북경은 선진문물을 경험하고 수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었다.
북경은 조선이 서양 과학을 흡수하는 거의 하나밖에 없는 통로이기도 했다. 조선의 사신들은 북경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 과학 서적을 구입해 국내에 들여왔으며, 조선의 학자들은 이런 책을 탐구하며 서양과 서양 과학에 대한 지식을 넓혀갔다. 또 연행에 참여한 조선의 학자들은 가톨릭 성당인 천주당(天主堂)을 방문해 서양 문물을 경험하고 과학에 밝은 서양 신부들에게 수학과 천문학을 배우기도 했다.
조선후기에는 거의 매년 두세 차례 연행사가 파견되었고, 그때마다 다양한 모습의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탁월한 유학자이자 과학사상가로 이름이 높았던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북경 여행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북경을 체험함으로써 새로운 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서양 과학을 흡수하여 학문적 시야를 확대한 조선후기 지식인을 대표한다.
홍대용은 수학, 천문학, 우주론 등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발군의 성취를 보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몸소 북경에 가 그곳 문물을 체득했던 연행의 경험이 그 가운데서도 단연 중요할 것이다. 『의산문답(毉山問答)』이나 『주해수용(籌解需用)』에서 보이는 천문학과 수학 방면의 성취는 연행에서 중국의 학술 경향을 목격하고 천주당에서 서양 과학을 접한 이후에 이 방면의 연구에 깊이를 더한 결과로 볼 수 있다. 홍대용의 북경 여행이 그의 학술적 성취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홍대용은 열두 살 때부터 남양주의 석실(石室)서원에서 스승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의 지도를 받았다. 석실서원에서 10여 년을 수학한 후에는 서울에 거주하면서 중앙의 신진기예들과도 교유했다. 이십대 중반에는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 깊이 사귀었으며, 황윤석(黃胤錫, 1737~1805)과도 교분을 가졌다.
특히 석실서원에서 학문을 배운 것을 계기로 홍대용은 평생 천문학과 수학 방면에 관심을 갖고 깊이 탐구해 들어갔다. 석실서원은 경학은 물론 우주 변화의 원리를 주역의 괘나 수학적 원리에 연결시켜 논의하는 상수학(象數學)의 전통이 강한 곳이었다. 당시 석실서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학인들 사이에서 선배인 김석문(金錫文, 1658~1735)의 역학(易學)이 많이 알려져 있었다. 김석문은 지구가 자전한다는 설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홍대용의 지전설도 선배인 김석문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조공을 드리러 북경에 간 연행사들과 그 일행이 북경 거리를 지나고 있는 장면으로, 오른쪽 하단의 인물들이 조선 사신들이다. 홍대용 역시 연행사에 동참할 기회를 얻어 북경으로 향했다.
홍대용은 이십대에도 수학과 천문학에 대한 관심을 계속해서 넓혀갔던 듯하다. 그는 이십대 후반의 나이에 나주 목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호남에 내려가 화순 동복에서 천문학과 기계 제작에 밝은 나경적(羅景績)을 만났다. 그는 나경적에게 부탁해 기계식 혼천의(渾天儀)를 두 대나 제작했다. 혼천의는 천체운동을 관측하는 기구이자 운동 원리를 보여주는 시연 기구로, 당시로서는 가장 대표적인 천문 기구였다. 여기에 태양의 위치, 달의 위상 변화 등이 그대로 구현되도록 했다.
특히 기계식 혼천의는 서양의 기계를 참고하여 만든 톱니바퀴로 각 부분의 회전 속도를 조절했기에 굉장히 정확했다고 한다. 이때 제작된 혼천의는 나중에 충청도 천원에 있던 홍대용의 고향집에 건설된 농수각(籠水閣)에 설치되었다. 이후 홍대용은 혼천의로 직접 천문 관측을 하는 것은 물론 천문학을 깊이 연구한 듯하다. 그는 북경에서 중국 학자들에게 자신이 농수각에 천문 기구를 설치한 일과 천문학 연구를 했던 일을 언급하기도 했다.
1765년(영조 41) 홍대용은 작은아버지 홍억(洪檍, 1722~1809)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북경을 여행했다. 신년하례에 맞추어 동짓달에 파견되는 동지사행에는 보통 300~500명의 대인원이 동원되었다. 사절단은 정사(正使)가 통솔하고, 그 아래에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을 두었다. 통역 및 여러 가지 예물의 운반과 인도를 맡은 사람들도 있었다. 자제군관은 정사, 부사, 서장관이 각각 몇 명씩 데리고 갈 수 있었다. 이들은 특별히 맡은 임무가 없었기에 자유롭게 여행하며 세상에 대한 지식을 넓힐 수 있었는데, 그런 까닭에 사절단에 임명된 사람은 자기 가문에서 촉망받는 젊은이들을 자제군관으로 데려가는 일이 많았다.
홍대용은 일찍부터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오직 학문에만 힘쓰는 학자가 되려고 했다. 그가 어린 나이에 석실서원의 김원행을 찾아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홍대용은 학문적인 명망을 인정받아 나중에 세손(훗날의 정조)을 보필하는 자리에 임명되는 44세(1774)까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했다. 그가 작은아버지의 자제군관이 되어 북경을 갈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학문적 재능에 대한 집안의 기대가 더해진 결과일 것이다.
홍대용이 북경 여행을 위해 준비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알찬 일정을 꾸리는 데 도움이 되었던 두 가지는, 앞서 여행한 사람들의 여행기를 읽은 것과 중국어 회화를 익힌 것이었다. 당시에 북경을 다녀온 사람들은 여행기를 작성했는데, 대개 연행기(燕行記)라 불리는 것들이었다. 당시 인기가 높았던 연행기는 홍대용의 스승인 김원행의 작은할아버지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이 쓴 『노가재연행기(老稼齋燕行記)』(1712년의 연행을 기록)였다.
홍대용은 이 책을 여러 차례 숙독하면서 여정을 가늠하고 볼거리와 생각거리를 점검했다. 또한 중국어에 능통한 역관에게 중국어를 배우며 여행을 준비했다. 그는 중국어 실력을 늘리기 위해 여행하는 내내 일부러 역관과 중국어로 대화했다. 홍대용은 중국 땅에 들어서자마자 중국인에게 말을 걸어 자신의 중국어 실력을 시험해보기도 했다. 나중에 그는, 어려운 주제에 대해 중국어로 토론할 정도는 못 되었지만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흥정하는 정도는 거의 문제가 없었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김창업이 중국 사신 일행과 함께 북경에 다녀온 후 쓴 이 연행일기는 9권6책으로 한문본이 규장각에 전한다. 이중 일부는 한글본으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는데, 홍대용 역시 이 책을 여러 차례 숙독하면서 북경 여행을 준비했다.
홍대용은 북경 여행 후에 각각 한문본과 한글본의 두 가지 여행기를 남겼다. 『담헌연기(湛軒燕記)』와 『을병연행록』이 그것이다. 두 책은 서술 형식은 물론이고 내용도 많이 다르다. 한문본 『담헌연기』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견문을 주로 기록한 사대부 학자들을 위한 여행기라면, 『을병연행록』은 날짜별 일기 형식으로 개인적인 신변 기록이 많아 여성과 서민들을 위한 여행기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홍대용이 어머니와 집안의 부녀자들을 위해 쓴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책에는 『담헌연기』에는 없는 여행 일정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어서 북경까지 오가는 여정과 경험한 일들에 대해서 샅샅이 알 수 있다. 반면 『담헌연기』는 북경에 도착해서부터 겪은 일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는 중국인 선비들과 나눈 대화 내용과 주고받은 편지가 실려 있어 홍대용의 사상을 탐구하는 데에 좋은 자료가 된다.
홍대용이 1765년부터 이듬해까지 사은사 일행을 따라 북경을 다녀온 후 그 견문을 주제별로 기록한 연행록이다. 6권6책의 한문 필사본으로, 담헌연기, 연행잡기, 간정필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기적인 사신인 동지사의 경우 음력 11월 초에 서울을 출발해 북경까지 2개월, 북경에서 2개월 정도를 머무른 다음, 다시 북경에서 서울까지 2개월로 총 6개월 정도가 걸렸다. 1765년(영조 41) 12월 27일(음력) 북경에 도착한 홍대용은 다음 해 3월 1일(음력) 떠나기까지 약 2개월간 북경에 머물렀다. 이 기간 중에 여러 가지를 구경하고 경험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인 지우를 사귄 것과 천주당을 찾아서 서양인 신부를 만난 것이었다. 그는 서점 거리인 유리창(琉璃廠)에서 과거시험을 보러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 중국인 학자들을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또한 세 차례나 천주당에 찾아가 서양의 문물을 견학하고 서양신부들과 대화했다.
홍대용이 북경에서 사귄 중국인은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이었다. 이들은 남쪽의 절강성 출신으로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북경의 유리창에 머물고 있었다. 유리창은 명나라 말기부터 책방과 골동품 가게가 번창하고 지방에서 올라온 과거 지망생들이 머물곤 하던 문화의 거리였다.
지방의 과거시험을 통과한 이들은 중앙에서 치르는 시험을 보기 위해 북경으로 올라와 이곳에 체류하며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안경을 구입하려고 애쓰던 조선 사신단의 한 사람에게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주었는데, 홍대용은 그 호의에 감사하는 뜻으로 이들을 직접 찾아갔다. 그리고 마음이 맞아 여러 번 자리를 함께하며 필담으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홍대용은 나중에 이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간정동회우록(乾淨衕會友錄)』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1765년 동지사 일행으로 북경에 갔던 홍대용이 육비, 엄성 등 청나라의 석학들과 가졌던 학문 교류를 보여주는 서찰이다.
홍대용은 세 사람 중에서 특히 엄성과 깊은 친교를 나누었는데, 그와는 귀국 후에도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았다. 엄성 또한 홍대용과의 학술적인 교유와 우정을 잊지 않았다. 홍대용과 나눈 필담과 둘 사이에 오간 편지는 엄성의 유언에 따라 『일하제금합집(日下題襟合集)』이라는 책으로 편찬되었다. 이 책은 1999년에야 북경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음이 알려졌는데, 여기에는 홍대용을 비롯해 정사, 부사, 서장관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어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홍대용의 손자인 홍양후(洪良厚, 1800~1879)는 1826년에 북경에 갈 기회를 얻었는데, 조부와 엄성이 맺은 인연의 흔적을 찾아 엄성의 후손들을 수소문했다. 아쉽게도 홍양후는 엄성의 후손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가 남긴 편지는 후손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조선과 중국 사이의 국경을 넘어서 삼대에 걸친 인연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홍대용이 중국인들과 교유한 것을 기록한 『간정동회우록』은 조선의 젊은 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조선의 학자가 외국 학자와 학술적 논의를 하고 국경을 초월하여 우정을 나눈 예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특히 이 책에 감동하여 서문을 썼다. 박지원, 이덕무(1741~1793), 박제가(1750~1805), 유득공(1749~1807) 등 홍대용과 깊은 교분을 맺었던 학자들은 이후 앞서거니 뒤서거니 북경을 방문했다. 이들이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려는 “북학(北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경향을 연 데에는 홍대용의 북경 여행이 끼친 영향이 컸다.
홍대용이 머물 당시 북경에는 남당(南堂, 1601년 건립), 동당(東堂, 1628년 건립), 북당(北堂, 1703년 건립), 서당(西堂, 1723년 건립) 등 네 개의 천주당이 있었다. 이중에서 남당과 동당은 조선의 사신들이 머무는 숙소와 가까워서 특히 많이 찾았다. 예수회에 소속된 천주교 신부들은 포교를 위해서 성당을 이끄는 한편 청나라 정부를 위해 일했다. 청나라 정부는 수학, 천문학, 지도 제작 등 중국보다 뛰어난 서양 지식이 필요한 분야에 이들 신부를 관리로 등용했다.
홍대용은 선배들의 여행기를 읽었던 덕에 북경에 오기 전부터 천주당과 천주교 신부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서양인 신부들이 천문학과 역법에 대해 굉장히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이 때문에 청나라에서 이들에게 관직을 주어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북경에 천주당이 네 곳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예수회 소속 천주교 신부들은 중국뿐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서양의 지식을 전수해준 주역들이었다. 『정교봉포』의 저자 황비묵은 남천주당의 주임신부였으며, 아담 샬은 서양 천문학서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숭정제에게 바친 인물이다.
홍대용은 1777년 음력 1월 9일, 19일, 2월 2일 등 세 번에 걸쳐 남천주당을 찾았다. 당시 남천주당에 기거하던 신부는 둘이었는데, 유송령(劉松齡, A. von Hallerstein)과 포우관(鮑友管, A. Gogeisl)이라는 중국식 이름으로 불렸다. 유송령은 당시에 청나라의 천문관서인 흠천감(欽天監)의 책임자로 있었고, 포우관은 부책임자 격이었다. 이들은 흠천감을 이끌고 있었던 만큼 수학과 천문학에 매우 밝은 사람들이었다.
홍대용은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화, 파이프오르간, 망원경, 자명종 등을 구경했다. 서양화는 원근법을 적용하고 색이 진한 유화물감으로 그려진 성화가 대부분이었기에, 조선 사신들의 눈에는 대단히 이국적인 그림으로 여겨졌다. 자명종은 시각마다 종이 울리도록 설계된 기계식 시계인데, 당시로서는 서양의 발전된 기계기술을 대표하는 기구였다. 또한 홍대용은 망원경으로 태양을 관측했는데, 흐린 날씨에 해를 보는 것처럼 눈을 깜박거릴 필요가 없고, 아주 작은 것도 자세히 볼 수 있어서 참으로 기이한 기구라고 감탄했다. 아마도 태양 관측을 위해 빛을 줄여주는 장치를 부착했기 때문에 눈을 깜박거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천체관측용 망원경이 극히 드물었기에 홍대용도 전에는 망원경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망원경의 렌즈에 그려진 가늠선을 몰라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홍대용은 천주당에서 탁월한 음악적 감각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가 난생 처음 접한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해 보이자 서양 신부는 깜짝 놀랐다. 예리한 관찰력으로 악기의 구조와 조음의 원리를 한눈에 파악하고, 평소 알고 있던 음률을 연주해냈던 것이다. 홍대용은 평소 거문고 연주자로 이름이 높았으며, 음악에 대해서는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특히 현악기는 무엇이든지 연주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박지원에 따르면, 홍대용은 서양에서 들어온 양금의 연주법을 개발하여 보급하기도 했다. 양금은 홍대용이 살았던 시기보다 앞서 들어와 있었지만, 이 악기를 조선의 곡에 맞추어 연주한 것은 홍대용이 처음이었다.
청나라는 1645년부터 예수회 신부들이 전해준 서양 천문학을 적용하여 만든 시헌력(時憲曆)을 사용했다. 예수회 신부들은 중국인들과 협력하여 서양 천문학에 관한 책을 한문으로 번역해 소개했다. 조선에서도 1654년부터 이 역법을 적용했지만 관련 서적에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았다. 조선에서는 관상감에서 일하는 천문관원 중에서 우수한 사람을 중국에 파견하여 질문하거나 관련 서적을 사오도록 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천문관원을 파견하는 것이나 전문가를 접촉하여 궁금한 것을 질문하는 것이나 관련 서적을 사들이는 것 모두를 금지했다. 조선에서는 신분을 위장시킨 천문관원을 청나라에 파견하는 사신들에 딸려 보냈다. 조선의 천문관원들은 북경 천주당의 신부 중에서 천문학에 밝은 사람들을 찾아갔다.
홍대용이 참가한 사절단에는 조선의 관상감에서 비밀리에 파견된 이덕성(李德星)이라는 천문관원이 있었다. 이덕성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중국에 파견되어 천문학 지식을 습득한 베테랑이었다. 이덕성은 홍대용이 남천주당을 찾아갈 때 두 번이나 동행하여 긴 시간 천문학에 관한 내용을 문의했다. 하지만 대화의 주제는 매우 전문적인 내용이었기에 통역이 있다고 하더라도 서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덕성이 우리말로 물으면 조선 통역관이 중국어로 말을 옮겼다. 하지만 천문학을 전혀 모르는 통역을 가운데 두고 논하다보니 의사소통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홍대용은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누어도 시원하게 의사가 통한 것이 없다며 한탄했다. 하지만 이렇게 더딘 과정을 통해서나마 조선에서는 서양 천문학을 완전히 습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계속해서 천문관원들을 파견하고, 또 새로 구입해온 책으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8세기 후반 정조 시대에는 중국의 천문관원들과 거의 대등한 천문학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
신년을 축하하거나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의례를 수행하는 것은 연행사의 일차적인 임무였다. 또한 북경을 오가며 청나라의 사정을 정탐하여 보고하는 것도 그들에게 부과된 몫이었다. 나아가 연행사에게 부여된 또 하나의 중요한 임무는 중국에서 출간된 최신 서적이나 요긴한 책을 구입해오는 것이었다. 『규장각지(奎章閣志)』(1784)에는 중국 도서의 구입 절차와 원칙이 명시될 정도로 연행사들의 서적 구입은 새로운 학술과 문물 수입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사신단에 속한 개인들도 다투어 최신 서적들을 구입하려 했다. 이들이 입수한 서적들은 국내에서 널리 유통되었고, 그 결과 18세기 후반부터 서울에는 방대한 양의 서적을 보유한 수장가들이 여럿 나타났다. 18세기에는 과학기술 관련 도서들도 상당수 수입되었다. 17세기 말까지 조선의 유학자들은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교과서로 삼고 주자(朱子)와 역대 유학자들의 책을 해설로 삼아, 이기(理氣)나 심성(心性)의 문제를 주로 논의했다. 수학, 천문학 등은 그런 유학자들이 그다지 중시하지 않아도 좋은 지엽적인 학문에 속했다.
그런데 18세기 초부터 청나라에서는 고증학의 기풍을 타고 수학과 천문학이 고대 경전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청나라 정부 주도로 『수리정온(數理精蘊)』(1723)이나 『역상고성(曆象考成)』(1723) 같은 전문적인 수학, 천문학 서적이 출간되었다. 또한 매문정(梅文鼎, 1633~1721)의 『역산전서(曆算全書)』(1723)와 같이 수학과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개인의 저작도 출간되었다. 이러한 과학기술 서적들은 재빠르게 조선에 수입되었으며, 그 양도 굉장히 많았다.
18세기 후반 서울의 학자들은 중국을 통해 손에 넣은 서적들을 폭넓게 학습하고 토론했다. 그러는 사이 수학이나 천문학처럼 과거에는 중시되지 않았던 과학기술에 속하는 전문 지식들이 유학자들이 탐구해야 할 중요한 지식으로 인식되었다. 홍대용이 수학과 천문학에 관심을 두고 깊이 탐구했던 것은 18세기의 조선 학계에 이런 학문을 중시하는 인식의 전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홍대용은 북경에서 많은 과학서적을 구입해왔던 것 같다. 황윤석은 그의 일기 『이재난고(頤齋亂藁)』에서 당시로서는 구하기 쉽지 않은 거질의 책인 『수리정온』 『역상고성』 『역상고성후편』 등을 홍대용에게서 빌려 봤다고 쓰고 있다.
홍대용의 『주해수용』은 실용 산술에서부터 방정식, 서양의 삼각함수, 천문기구 제작법 등을 폭넓게 다룬 수학책이다. 여기 실린 내용을 분석해보면 홍대용이 『수리정온』 같은 서양 수학을 담은 전문적인 수학서를 깊이 이해하고 저술에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북경 여행의 경험이 홍대용의 학술과 사상에 미친 영향은 『주해수용』에 실린 수학 문제에서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북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인 요양(遼陽)에 우뚝 세워진 백탑(白塔)의 높이를 구하는 문제를 내고, 이에 대한 풀이법을 설명했다. 특히 풀이에는 삼각함수 코사인(cosine) 값을 이용하는 방법이 포함되어 있다. 서양 수학의 이론을 이용하는 문제에 여행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요양의 백탑을 등장시킨 것을 보면, 북경을 오가며 얻은 새로운 지식과 견문에 그가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홍대용의 다른 저술인 『의산문답』의 의산(毉山)은 북경으로 가는 길에 지나쳤던 의무려산(毉巫閭山)의 다른 이름이다. 『의산문답』에서는 허자(虛子)가 실옹(實翁)을 만나 지구가 둥글다는 파천황의 사실을 알게 되고, 허례허식을 버리고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으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홍대용 자신에게도, 그리고 그가 깨우치고자 했던 당대의 수많은 사람에게도, 타성과 인습에 젖은 허학(虛學)을 버리고 실증적 학문으로 나아가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바로 중국을 오가는 여행길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나아가 『의산문답』에서 홍대용은 실옹의 입을 빌려 기일원론, 지전설, 무한우주설, 탈중화주의 같은 심오하고도 획기적인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지구가 둥글다는 설을 믿지 않으려는 당시의 고루한 선비들을 비판하며, 기가 회전하기 때문에 땅이 둥글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 또한 기가 회전하기 때문에 기에 감싸인 지구는 회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지전설을 제안하기도 했다.
당시까지 많은 사람들은 하늘은 둥글지만 땅은 네모졌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중국은 문화가 번성한 세상의 중심이고 주변의 오랑캐들은 중국의 교화를 입어야 한다는 중화주의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홍대용은 지구가 둥글다면 중심과 주변이라는 생각이 성립할 수 없고, 따라서 중화와 오랑캐의 구별도 없어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의 상식을 뒤엎는 이러한 생각들은 홍대용이 평생 연마해온 학문 전체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북경 여행의 경험과 수학과 천문학 같은 과학기술 지식에 대한 탐구가 그의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한국의 코페르니쿠스라 할 수 있는 김석문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지전설을 주장해 새로운 우주관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의 밑에서 학문을 한 홍대용 역시 그와 같은 천문학적 입장에 서서 조선의 과학을 이끌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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