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08.17. 13:46 수정 2019.08.17. 13:56
애석하게도 올여름 휴가 계획은 없다. 그러나 크게 억울한 마음을 먹고 있지는 않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자전거를 타고 일터로 향하는 잠깐의 시간 속에서, 땀을 한 바가지 흘린 뒤 먹는 빙수 한 숟갈 속에서, 서울에 올 때마다 만나는 환대의 얼굴들 속에서 짬짬이 틈을 노려 행복해할 줄 아는 기술이 생겼기 때문이다
.
특히 얼마 전 읽은 승효상(67) 건축가의 <묵상>(돌베개, 6월 출간)이라는 책을 통해 나는 올해 여름의 확실한 휴가를 대체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로마에서 파리까지 14일간 2500여㎞에 이르는 수도원 순례 여정을 담은 500쪽이 넘는 두툼한 이 기록은 내가 함께 여행한다는 실감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색채에 현혹되는 일 없이 공간만을 분명하게 감각할 수 있도록 저자가 모두 흑백으로 찍었다는 유럽의 오래된 수도원들에서는 고집스러운 거룩이 진하게 묻어나왔다. 순례길의 시작부터 끝까지 저자를 따라다닌 불면처럼 나 역시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오래 붙잡고 있다 놓아버린 신앙의 손을 생각했다.
승효상 건축가의 고향은 부산 구덕산 아래 피난민촌. 해방 직후 월남했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난하게 된 부모님의 인생을 따라 그렇게 되었다.
그 뒤 부모님이 만들다시피 한 교회에서 먹고 자라면서 종교와 신앙심 역시 그에게는 그냥 주어진 자연스럽고 당연한 삶이었다. 그러나 점점 그 일이 당연하지 않게 여겨졌다.
신이 무엇인지, 내가 왜 신을 믿어야 하는지 끊임없는 질문과 의심에 시달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을 직접 공부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그는 결심했지만 정작 독실한 믿음을 가진 집에서 그의 결정을 반대했다.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너는 그림도 곧잘 그리니 건축을 공부해라, 꼭 서울대에 가라, 그래서 이 가세를 바로 세워달라, 눈물로 간곡하게 당부하는 누님의 부탁을 그는 거절하지 못했다.
오늘날 그는 마산 양덕성당, 경동교회, 하양교회 같은 종교를 위한 건축물, 신동엽문학관과 쇳대박물관 같은 예술을 위한 건축물, 고 노무현 대통령 묘역, 용산공원 같은 역사적 공간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활약하는 한국의 대표적 건축가가 되었다.
만약 두 갈래 선택의 길에서 원래대로 신학의 길을 밟았다면 오늘날 그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나는 승효상의 다른 얼굴이 계속 궁금했다.
잘못된 건축, 사람들 불행하게 만들어
지난 9일 저녁 승효상 건축가의 사무실이자 집이기도 한 ‘이로재’(이슬을 밟는 집이라는 뜻)를 찾았다. 지난달 팟캐스트 방송을 위해 처음 만난 뒤 두번째 만남이었다. 와인빛 녹의 옷을 입은 근사한 건물을 잠시 구경한 뒤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달 팟캐스트에서 ‘본인의 설계를 거쳐 지어진 건물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는 질문에 ‘아, 또 실패구나 하고 느낀다’고 대답하셨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지으면 분명 행복하실 겁니다’라고 확신하며 설계를 마치지만 막상 공사에 착수하게 되면 번번이 저의 무능력과 부족함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또 좌절하고. 이때까지 쭉 그랬습니다.
”
―정작 선생님이 만드신 그 건물에서 사는 사람들은 충분히 만족해할 수도 있을 텐데요. ‘실패작이다’라는 말은 자칫 거기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슬프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제 건물에서 살아가는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렇지만 ‘실패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런 실패감이 ‘한번 더 도전하고 싶다’는 추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태 제가 이렇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건축’이라는 말이 얼핏 이상주의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냥 편리하게 지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지금 우리나라가 경제지수로 따지면 세계 12위입니다. 그런데 행복지수는 54위라고 합니다. 보통은 몇 나라를 빼면 경제지수가 높으면 행복지수도 같이 높아지거든요.
이런 불균형한 상태는 건축의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유엔에서 만든 행복지수를 따지는 기준을 보면 절반 이상이 집이나 도시환경에 있어요. 우리가 잘못 만든 건축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 겁니다. 우리가 사는 집은 집이 아니라 부동산이에요.
집이란 것을 공고히 유지할 생각이 없는 겁니다. 몇 년 후 집값 오르면 빨리 팔고 더 큰 집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니 전부 유목민이고 떠돌이죠. 편리하다고 무조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건축은 오래 걸리고 더뎌서 그렇지 거기 사는 사람을 바꿉니다. 제가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만든 집에서 사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가능성은 있죠.
그들이 행복해지면 나는 정말 내 목적을 달성하는 게 됩니다.”
그는 행복을 위해 ‘편리’가 아니라 오히려 ‘불편’을 대놓고 시도한다. 대표적인 건축물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집, 수졸당일 것이다.
동선이 간단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그곳에 대해 승효상 건축가는 집 안에서 사람이 끊임없이 움직이기를 바라는 것이 건축 의도였다고 밝힌 바 있다.
“방과 방 사이가 길어지고 어떤 방은 외부를 통해서만 연결된다. 불편한 집이 되었다. 그러나 그 불편이 사유로 이어지고 가족의 단란을 만들며 결국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이다.”(<승효상 도큐먼트>)
―건축가이니 모든 건축을 예사롭지 않게 보시겠지만 <묵상>이라는 책을 보니 평소에 여행 가실 때마다 그 일대의 수도원과 묘역을 찾아보는 것이 버릇이라 하셨어요. 특별히 끌리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저는 묘역과 수도원을 통해 평화를 느낍니다. 묘역은 산 자를 위한 공간이에요. 죽은 자의 기억을 가지고 스스로 성찰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거죠. 거기에 죽은 자는 없습니다,
사실상 아무것도 없어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묘역은 삶의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가장 본질적이고 절실한 감정을 느끼게 해요. 수도원 역시 죽음의 공간입니다. 살아 있지만 사회적으로 죽음을 선언한 자들, 자기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추방한 사람들의 공간. 묘역과 똑같아요. 묘역과 수도원의 공통점은 거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항복했다는 사실입니다.
묘역에 묻힌 사람들이 유한한 삶에 항복했다고 한다면, 수도원에 있는 사람들은 신에게, 진리에 항복한 사람들이죠. 거기엔 그래서 평화가 있어요. 결국 평화를 얻기 위해 가는 거예요.
”
―묘역이나 수도원에서 느낄 수 있는 평화를 도시 안에서 느낄 방법은 없을까요?
“우리의 일상에서는 얻기 힘들지요. 우리 일상 속에는 탐욕, 분노, 거만 이런 것들이 항상 있잖아요. 이런 것을 다스릴 수 있는 영성의 공간이 옛 우리 건축들에는 있었습니다.
문방, 사랑방, 정자, 사당 같은 것들요. 오늘날 우리가 이런 공간들을 다 쫓아냈죠. 도시나 사회 속에서도 성스럽고 경건한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경건한 공간이라 함은 묘역이나 종교적 시설이나 그런 곳일 텐데, 교회들은 상업시설보다 더 못난 곳으로 변했고 묘역은 다 외곽으로 쫓겨났고. 저는 제가 만드는 건축에서는 항상 사유가 가능한 공간을 만들려고 합니다. 기능적이지는 않지만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
―선생님의 건축에 대한 가치관은 언제나 한결같았나요?
“아닙니다. 저도 처음에는 건축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흔히 남들이 생각하는 대로 공부 잘하고 그림 잘 그리고 이래야 건축을 하는구나 그렇게만 알았는데, 그게 얼마나 허황된 생각이었는지 빈으로 유학을 갔을 때 알았습니다.”
가난할 줄 아는 건축을 찾아
그는 1971년 서울대 건축공학과에 입학했지만 반독재 학생운동에 따라다니느라 학교 수업에 소홀했다. 그럼에도 홀로 건축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졸업 뒤 바로 김수근 건축가의 제자로 들어간다.
하지만 1980년 일어난 광주민주화운동을 지켜보며 나라에 대한 깊은 환멸에 시달려 도피하듯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그곳에서 아돌프 로스라는 건축가를 통해 건축으로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장식은 죄악이다”라는 말로 유명한 아돌프 로스는 관습과 전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던 19세기의 건축을 종결시키고 20세기 모더니즘을 연 건축가였다.
그의 대표적 건물인 ‘로스하우스’는 당대의 과시적 장식에 익숙한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파격적으로 덤덤한 건물이었고 그 때문에 경찰서까지 끌려갈 정도였다고 한다.
“아돌프 로스를 보며 건축을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구나, 확인했어요. 그러니까 내가 무엇 때문에 건축을 하게 된 건지 알게 된 거예요. 사람들과 사회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을 먹게 된 것이죠.”
그는 김수근 선생 문하에서 지낸 15년의 시간을 통과하고 독립하며 ‘빈자의 미학’이라는 화두를 세웠다. 금호동 달동네를 보고 영감을 받아 가난한 건축이 아니라 가난할 줄 아는 건축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는 그는 초대 서울시 총괄건축가(2014~2016)를 거쳐 지금은 국가건축정책위원장(2018.4~)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
―국가건축정책위원회는 무슨 일을 하는 곳인가요?
“대한민국의 건축과 관련된 모든 정책을 심의하고 조정하고 자문에 응하는 일을 합니다. 둘러보면 건축이 아닌 일이 없습니다. 모든 정치나 경제활동의 결과는 건축으로 남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후손에게 전달되고요. 그게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이 위원회는 만들어진 지 꽤 됐는데 사실 그동안 제대로 활용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5기 위원장입니다.
원래는 이 자리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후배들이 하도 해야 한다 강권을 해서 떠밀리듯 맡았습니다. 기왕 이렇게 맡았으니 작심을 하고 지금의 제도를 새로운 시대에 맞게끔 바꾸어보려고 집중하고 있습니다. 내년 4월이 임기 만료인데 온갖 일을 다 하고 있습니다
.”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3기 신도시 아파트를 옛 방식이 아니라 새 시대에 맞게 짓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옛날 공급자 위주의 방식이 아니라 수요자 위주의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이지요. 아직도 기존의 시스템이 바뀐 시대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파트만 보더라도 정부가 얘기해서 건설회사가 지으면 선분양으로 판매합니다. 자기가 사는 집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산단 말입니다. 후분양으로 바꿔야지요. 내가 살 집이 어떻게 만들어진 집인지 알고 사야 하지 않겠어요?”
여기에 더해 우리나라의 건축 시스템을 선진적으로, 혹은 그보다 더 좋게 바꾸려고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발주, 설계, 공사에 이르는 건축의 단계들이 모두 다 후진적이라고 그는 강하게 비판했다.
“정부에서 설계를 맡기는 방법이 지금까지는 설계비를 무조건 싸게 써내는 사람한테 주는 식이었습니다. 그런 설계가 좋기 힘들죠. 그렇게 만들어진 게 우리나라의 동사무소, 파출소, 이런 건물들입니다.
국민들은 랜드마크 같은 걸 보고 살지 않아요. 동사무소나 파출소 같은 일상의 건축들을 보고 삽니다. 우리들이 항상 곁에 두고 마주하는 이런 건축들에 더 신경을 써야지요. 공정한 경쟁체계에서 좋은 건축가가 맡을 수 있게끔 바꾸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건축은 아무래도 재산에 관한 문제이다 보니 유착관계가 무척 많습니다. 비리 같은 것이 굉장해요. 아주 오래되고 광범위한 일이라 손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는 최근 새 광화문광장 조성사업과 관련해서 일부의 곱지 않은 목소리를 듣고 있다. 2021년 새롭게 바뀔 예정인 서울 광화문광장이 너무 ‘승효상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광화문광장 재조성을 위해 꾸려진 광화문포럼이 제안한 안건이 있었지만 1년여의 검토 뒤 기본계획안으로 결국 채택된 것은 2005년 승효상 건축가와 당시 문화재청장이었던 유홍준이 공동으로 제시한 안이었다.
이 기본계획안을 바탕으로 국제설계공모를 해 지난 1월 당선작을 발표했는데, 이 공모의 심사위원장 역시 그였다.
“저는 더 좋은 안이 있으면 얼마든지 수긍할 마음으로 계속 임했습니다. 애초 광화문포럼에서 제안한 것은 차도를 지하에 만들고 지상을 다 도보로 하자는 것이었는데요. 이미 하부에는 지하철 노선 3개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상적이긴 하지만 공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하더라도 조 단위의 돈이 드는 일일 겁니다. 더군다나 차와 사람을 분리한다는 것은 옛날의 도시계획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공해만 더 유발하는 셈이 될 것이고 차량에 더 집중하는 꼴입니다. 분리하지 않되 통행이 우선인 도시를 만들어야지요.”
―서울시의 총괄 건축가였고 현재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인 선생님의 안이 이미 내정되어 있었던 게 아니겠느냐는 의심도 있었습니다.
“제가 제안을 했건 홍길동이 제안을 했건 그것은 저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일입니다. 저는 그것이 승효상의 위대한 작품으로 남길 바란다는 생각을 조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의 안은 그때보다도 훨씬 진전된 것이고요. 저는 앞으로 차량이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차의 불편함, 차가 유발하는 공해 때문에 다른 방법의 교통이 미래엔 등장할 것입니다. 저는 나중에는 사대문 안에는 대중교통을 제외한 모든 차량 통행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보행 위주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 첫 시작이 새 광화문광장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미래의 건축은 어떻게 돼야 할까요?
“인공지능(AI)은 건축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겁니다. 어떤 스타일이든 다 설계할 수 있는 세상이 될 거예요. 그러나 인공지능이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 영성입니다.
건축이 살아남는 방법은 스타일이 아니라 본질을 계속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살아남는 것이 건축이 살아남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묵상>이라는 책도 썼습니다.”
마지막 책은 <빈자의 미학 해설판>
―<묵상> 이후의 책은 더 안 쓰실 건가요?
“제가 처음에 쓴 책이 <빈자의 미학>(1996년)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지 모르면서도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어요.
그동안 저는 그 선언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책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면, 마지막으로 <빈자의 미학 해설판>을 쓰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성공한 건축물을 하나는 만들어야 할 텐데 큰일입니다.(웃음)”
―선생님은 어디에 기대며 사시나요?
“저는 제 불안에 기댑니다.”
―지독한 사람 같아요.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롭게 운동하게 하고, 새롭게 시작하자 결심하게 합니다.”
―그 자양이 불안이군요.
“매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새 마음이 먹어집니다. 물론 이렇게 얘기하는 저도 잘 못해요. 그래도 노력하려고 합니다.”
―저는 감사가 참 힘들던데요.
“감사라는 건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입니다. 자신을 확신하지 못하면 감사할 수 없어요. 요조씨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별로 없다고 여겨지나요?”
―그런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최악의 경우엔 자신을 포기해버리게 돼요. 그건 정말 나쁜 겁니다.”
―그게 왜 나쁜가요. 타인한테 피해가 가는 것도 아닌데요.
“한 세계를 포기하는 거예요.”
―어쨌든 자기 혼자 조용히 포기하는 거잖아요. “어떻게 혼자 있다고 생각하세요. 요조씨가 있기까지는 엄청나게 많은 역사가 있었어요. 그 역사가 사라지는 겁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통로라고 생각해야 해요. 모두가 받은 것을 이어주는 통로이지 자기 자신이 목적이 아니에요. 우리가 부여받은 의무입니다. 우리한테는 우리 자신을 격하시킬 권리가 없어요. 요조씨, 지금 이 얘기 한 걸 나중에 부끄럽게 생각할 겁니다.”
신을 향한 믿음 하나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항복한 채 아무하고도 만나지 않고 깊이 숨어 살면서도, 은수자들은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끝없이 연결되고 이어져 내려온 자신의 역사를 감사로써 매일 체험하고 있기 때문일까. 나를 지긋하고 다정하게 나무라는 승효상 건축가의 얼굴은 어느새 오래전 꿈이었다는 신학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도 반박하지 못하고 순순히 밤길을 걸어 마로니에공원 앞 버스정류장에 앉아 나를 집으로 데려다줄 버스를 기다렸다. 오늘 내 경솔함을 부끄러워할 미래의 어느 날도 같이 기다려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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