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석 입력 2019.05.27. 07:00 수정 2019.05.27. 07:06
"지식재산권 보호 강화는 기업의 합법적 권익을 지키는 것은 물론 국가의 질적 성장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미·중 무역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지난달 26일, 40여 명의 각국 정상을 불러모은 가운데 열린 베이징 일대일로 포럼 연설에서 시진핑 주석이 한 말이다. 시 주석은 '국가 보조금 문제 해결'과 '외국기업 투자 장려', '위안화 환율 안정적 유지', '미·중 합의 관리를 위한 기구 설립'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미국의 핵심 요구사항을 모두 수용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사실상 미국에 대한 '항복 선언'으로 들렸다"는 게 현장에 있던 외신 기자들의 반응이었다. 시 주석은 앞서 지난달 초 "미·중 합의문에 상당한 진전이 일어났다"고 언급했고 이후 줄곧 '무역전쟁이 곧 끝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었다.
그런데 포럼 연설 뒤 불과 일주일 뒤 중국 협상 대표단은 미국 측에 사실상 '재작성된' 합의 초안을 보냈고, 트럼프 대통령은 "합의가 거의 다 됐었는데 중국이 깼다"며 관세 폭탄을 던졌다. 미국의 화웨이 제재 이후 중국은 '대미 항전'을 선언하고 나섰고 서로 으르렁대는 양국이 '관세 전면전'을 치를 거라는 전망까지 퍼지고 있다. 포럼 연설 뒤 일주일 사이 시 주석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핵심 사항 몽땅 없던 일로' ... "중국, 합의 직전 초안 대폭 수정"
일본의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미·중 협상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 정부가 이달 초, 지난 몇 달 동안 다듬어온 150쪽에 달하는 합의문 초안을 일방적으로 105쪽으로 압축해 미국에 보냈고, 수정된 문안에는 중국 지도부 내부에서 '불평등 조약'이라고 판단된 모든 부분이 삭제됐거나 수정돼 있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중국이 수정한 부분은 미국이 가장 중요하게 요구해온 '중국이 합의사항을 실천할 것을 담보할 법제화 조치'였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돌연 중국을 향해 비난 트윗을 날리기 전부터 합의무산은 이미 결정돼 있었다"고 전했다. 애초 합의하기로 했던 핵심 사항을 중국이 없던 일로 하자고 하면서 협상이 결렬됐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시 주석의 막판 전환은 어떻게 무역협상을 뒤집었나'라는 기사를 통해 "중국 내 다른 누구에게도 없을 엄청난 권력을 가진 시 주석이 결정을 내린 것이 분명하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불과 그 일주일 전만 해도 합의 가능성에 들떠 '미·중 관계의 건전하고 안정적인 발전'을 강조하던 시 주석이었다. 중국 정부는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발표한 업무 보고서에서 '기술 굴기'를 상징하는 '중국제조 2025'라는 표현 자체를 없애 버렸다. 리커창 총리가 낭독한 보고서에서 무역 마찰로 중국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고백을 했고 중국 경제 체질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도 인정했다. 미국을 향해 바짝 몸을 낮춘 모습이었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도 '시장 개방'을 외치며 논조의 변화를 보였다.
"중국은 패권을 추구하지 않는다. 여전히 개발도상국이다"라는 말이 시 주석과 리 총리 입에서 연이어 나왔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미국과의 합의가 무르익어 가는 것이 큰 흐름이었다. 그런데 시 주석이 자신의 변심에 의해 독단적으로 입장을 뒤집었다는 분석은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 시진핑 입장 돌변, 왜? ... "'반대세력의 반대' 때문" 관측도
외신들 대부분 합의를 깬 쪽은 시 주석이라고 전하고 있다. 중국 관영 환구시보도 "중국이 미국의 마지막 몇 가지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평등 원칙이라는 신앙 때문이었다"며 입장을 번복한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배경에 대한 분석은 제각각이다. 그중 니혼게이자이 보도가 눈에 띈다. 합의에 대한 기대감이 무르익자 공산당 지도부 내부에서 대미 협상 방침을 바꿔야 한다는 기류가 있었다는 것이다.
타이완 넥스트TV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e3xLh-kTOCE)
신문은 70년 전 신중국 건설 당시, 공산당이 봉건 왕조 시대에 맺은 난징 조약이나 시모노세키 조약 등 불평등 조약을 준엄하게 비판하면서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로 맹세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타이완의 중국 내부 문제 권위자인 명거정 대만대 정치학과 명예교수는 현지 TV에 출연해 "시진핑 주석이 반대 세력 때문에 (미국과의 협상에서) 합의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덩샤오핑 시대 이후 중국의 권력은 상하이방(상하이 출신 당정 권력그룹)과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태자당(당정군 고위층 자제 그룹) 등 3대 세력이 상호 견제하며 떠받쳐왔다. 시진핑 주석은 태자당, 장쩌민 전 주석은 상하이방, 후진타오 전 주석은 공청단 출신이다. 시 주석 집권 이전 권력 핵심부에서는 상하이방과 공청단 간 다툼이 치열했다. 장쩌민 전 주석은 은퇴 이후에도 후진타오 집권 마지막 해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시 주석이 후진타오 전 주석을 이어 총서기 자리에 오른 건 장쩌민계가 후진타오계 견제에 나섰기에 가능했다. 두 세력 간 양보 없는 권력 다툼이 상대적으로 세가 약했던 태자당 출신의 시진핑을 최고 권력자로 만든 것이다.
후진타오 전 주석은 장 전 주석을 견제하기 위해 당·정·군의 모든 직위를 시진핑에게 모두 이양했는데, 시 주석은 총서기직에 오르자마자 감췄던 이빨을 드러냈다. '부패 척결'을 명분으로 내세워 저우융캉 등 장쩌민계와 후진타오의 비서실장이었던 링지화, 자신과 같은 태자당 출신의 보시라이까지 1인 체제 구축을 위해 거침없는 정적 제거에 나섰다.
3대 세력 간 암투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가끔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한다. 지난해 10월 실종됐다가 중국에 구금된 것으로 확인된 멍훙웨이 당시 인터폴 총재는 저우융캉의 측근이다. 탈세 혐의로 한때 종적을 감췄던 톱스타 판빙빙의 경우 시 주석의 측근인 왕치산 부주석이 그녀의 뒷배이며 공청단이 판빙빙 실종사건의 배후라는 설이 파다했다. 판빙빙은 장쩌민 주석의 측근인 쩡칭훙 전 부주석과도 연루설이 제기돼 시 주석과 장 전 주석 간 암투의 결과라는 시각도 있었다. 지난해 돌연 은퇴를 선언한 알리바바 그룹의 창업자 마윈 회장도 장쩌민계로 알려졌다.
■ 끝없는 권력 암투 ... 시진핑, '책임 추궁' 걱정했나?
덩샤오핑의 유훈인 '집단지도체제'를 뒤엎고 '국가주석 3연임 금지' 조항을 폐지한 헌법개정으로 장기집권 발판까지 마련한 시 주석의 권력 강화 행보에도 최근 이상 신호가 터져 나왔다. 2016년부터 중국 증권감독관리위원회 수장을 맡았던 류스위가 지난 1월 부패 혐의로 말단급 한직인 중화전국공급소비합작총사 당 부서기로 밀려난 것이다. 류스위는 시진핑의 사람으로 알려졌다. 명거정 교수는 "시 주석이 자기 사람을 지키지 못한 건 분명 내부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사상 통제 강화 속에 지난해부터 시진핑 우상화 논란이 거세졌고 미국과의 무역전쟁 이후 여론이 악화된 것도 시 주석에게는 부담일 수 있다. 덩샤오핑의 장남인 덩푸팡이 "중국은 냉철한 판단으로 주제를 파악해야 한다"고 비판한 것이 대표적이다. 중국 권력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단에는 시진핑계 인사는 물론 공청단과 상하이방 인사도 여전히 포진돼있다. 현 19대 상무위원 명단에는 시진핑 계열이 강화되고 후진타오 계열의 공청단 출신이 2명으로 늘었지만, 직전 18대까지도 장쩌민계의 상하이방 출신이 시진핑계 태자당 출신과 동수였다.
올해는 6월 4일 톈안먼 사태 30주년과 신장 7·5 사태 10주년 등 민감한 역사기념일도 많아 내부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도부 내부에서 미국과의 잠정 합의안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면 시 주석으로서는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한 정치적 책임 문제로 깊은 고민에 빠졌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아무리 제왕적 권력을 가졌다해도 중국의 경제 체제 변화를 추구하는 미국의 요구를 다 들어줄 경우 그로 인한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는 걱정을 했을 수 있다는 얘기다.
홍콩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SCMP)는 "중국 협상단이 추가 양보안을 내놓자 시 주석이 '모든 결과는 내가 책임질 것'이라고 말하며 거부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으로 합의문 초안을 수정해 보내기 전 당내 의결 기구를 소집한 자리에서 했음 직한 발언이다. 하지만 이런 보도가 '의도적'이라며 부인한 소식통의 말도 전해졌다. SCMP는 2015년 마윈 회장이 인수한 매체다. '합의문 수정'을 시 주석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 차원에서 결정한 것이라면 SCMP 보도와 달리 추후 책임 소재의 범위는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중국이 왜 미국과 합의하지 않고 방향을 틀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미국에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던 시진핑 주석이 불과 며칠 만에 '대미 항전'으로 태도를 바꾼 배경에 대한 궁금증이 '시 주석이 내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들이대면 퍼즐 맞춰지듯 풀리는 건 사실이다. 이번 결정이 공산당 내부의 조율을 거친 것이라면 추후 이를 뒤집기 위해서도 또 조율이 필요할 것이다. 시 주석 혼자 내린 결정이었다고 해도 '인민 전쟁'까지 선포한 마당에 단기간 내 태도를 바꾸긴 어렵다. 미국 측 대표인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도 상당 기간 협상 재개가 어려울 것을 시사했다. 미국 싱크탱크인 R 스트리트 인스티튜트의 클라크 팩커드 고문은 "(미·중 두 나라가) 냉각기를 가진 뒤 다시 협상 테이블로 돌아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시 주석으로서는 당내 기류나 경제 지표 등 내부 상황과 미국의 입장을 살피면서 재협상을 타진해볼 수 있다. 협상의 주도권을 쥔 쪽은 트럼프 대통령이기 때문에 그가 중국이 받기 어려운 요구를 추가해 협상 결렬의 원인을 제공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그런 식으로 중국을 압박하고 여론몰이에 활용한다 해도 내년 11월 대선 전까지는 그도 극적 합의의 타이밍을 잡으려 할 것이다.
송영석 기자 (sy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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