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연 기자 입력 2019.01.21. 18:38 수정 2019.01.21. 21:12
양현혜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연구팀이 3년간 수집한 자료에는 3·1운동에 대한 일본 언론의 왜곡 보도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당시 일본 언론은 자국 정부의 강압적 식민통치 방식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동시에 3·1운동을 ‘일부 세력의 선동’으로 폄훼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였다. 3·1운동으로 한반도 전역에 독립의 열망이 퍼져나가고, 운동의 파급력이 국제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친 점을 염려한 당시 일본사회 지식인층의 혼란상을 보여준다.
연구팀은 21일 “일본 언론의 왜곡 보도와 그 맥락을 총체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역사전쟁에서 사료에 대한 해석을 선점하고자 연구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3·1운동 확산 초기에는 운동의 규모와 영향력을 축소 보도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도쿄아사히신문의 1919년 3월 3일자 기사는 탑골공원 독립선언문 낭독 등 핵심 사건을 모두 누락했다. 대신 경무총감부가 신속히 대응했다고 강조하는 데 지면의 절반 이상을 할애했다. 이 기사는 3·1운동에 대한 일본 언론의 첫 보도로 확인됐다.
‘불온한 격문 배포’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신문은 3·1운동 발발에 대해 “국장을 앞두고 경성은 각지로부터 올라온 자가 많아 매우 들끓었다. 1일 아침 남대문역 앞에서 선인(鮮人·조선인을 업신여기는 표현)이 조선어로 쓴 격문을 붙였다”고 적었다. 또 “이에 경무총감부는 활동을 개시했다”며 “덕수궁 장례식에 참석 중이던 경무총장은 오전 11시30분 갑자기 경무총감부로 돌아갔다. 헌병대 경찰서장을 집합시켜 대활동을 개시했다”고 보도했다.
이후 여러 신문에서 독립운동 세력을 폄하하는 보도가 이어졌다. 주요 신문들은 독립운동가 손병희를 ‘요승’(妖僧·정도를 어지럽히는 요사스러운 승려)으로 묘사하고, 3·1운동에 대해서는 “외국 선교사가 선동했다”고 보도했다. 국민신문은 3월 7일자 ‘악랄한 야심교, 선동자는 미국 선교사’라는 기사를 통해 3·1운동이 자주적인 운동이 아니며 일부 천도교 세력과 미국 선교사가 주도하고 있다고 왜곡했다.
요미우리신문도 3월 12일자 ‘조선 소요의 장본인 요승 손병희의 정체’ 기사에서 손병희를 ‘요승’ ‘교주’로, 3·1운동 세력을 그의 신도로 묘사했다.
양 교수는 “특히 3월 14일쯤 보도 통제가 내려진 뒤로 일본 언론은 조선의 요구사항이나 각지에서 단행된 탄압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며 “오히려 독립 요구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독립선언서를 불온 문서로 표현했으며, 3·1운동을 소란이나 폭동으로 규정했다”고 설명했다. “3·1운동을 종교계 내의 불순분자나 외국인 선교사에 의한 음모라고 선전하는 경향도 늘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3·1운동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며 파급력이 높아지자 일본 언론에서도 축소·왜곡 보도만으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독립운동의 동력과 원인을 탐구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기사들이 등장했다. 연구팀은 일본 언론의 이런 논조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되는 흐름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봤다.
양 교수는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 된 후 자신들의 국제적 위상과 일본에 대한 서양의 평가에 집착하기 시작했다”며 “이 운동이 일본의 이미지에 흠집을 낼 조짐이 보이자 당황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경향은 4월 이후 본격화됐다. 요미우리신문은 4월 6일자 기사를 통해 “(3·1운동의) 근저에는 의외로 깊고 조직적인 사정이 있는 것 같다”며 “러시아 과격파 운동과 그 사상이 바탕이 된 듯하다. 폭도 대다수가 은신처를 블라디보스토크나 하얼빈에 두고 있다”고 보도했다.
식민지 통치 방식의 개선책에 대해서는 매체 성향별로 의견이 엇갈렸다. 4월 초 지식인들 중심으로 문관총독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요미우리신문은 “애매하다는 의견도 있고, 그 반대 의견도 있다”며 “무관총독제의 철폐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문관총독 전환은 요원해 보인다”고 보도했다. 친정부 성향의 국민신문은 조선총독부의 문제점을 우회적으로 언급하면서도 “(무단통치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1919년 8월 무관총독 임용제가 폐지되고 처음으로 해군 출신인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총독으로 임명되자 도쿄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조선총독부 관제 개정에서 헌병 정치가 폐지됐다”면서도 “불충분한 개정”이라고 평가했다.
독립운동가 개개인에 대한 보도도 3·1운동 이후 시작됐다. 손병희와 김마리아 등 주요 운동가들의 신상과 사상적 배경에 대한 취재도 본격화됐다. 요미우리신문은 3월 12일자 기사에서 “손병희는 동학당 잔당으로 조선시대 당시 정부에 감시를 당하여 경성에 있지 못하고, 비밀결사를 만들어 교묘하게 각지에 출몰하곤 했다”고 보도했다. 또 “청일전쟁 당시 본국에서 도망쳐 상해에 은닉했고, 메이지 35년 일본에 망명했다. 가명은 이상헌이고 가와가미 마타지라는 일본명도 갖고 있다”고 썼다.
양 교수는 “3·1운동 이전에는 조선에 대한 일본 기사가 전무하다시피 했지만 이후 일본 언론에서 조선이 차지하는 비중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했다.
양 교수와 김도형·박은영 성균관대 HK연구교수는 공동연구를 통해 국민신문·미야코신문·만조보·도쿄아사히신문·동양경제신보·부녀신문·오사카마이니치신문·요미우리신문 8개 신문과 교육시론·사회및국가·중앙공론·우리들(我等)·헌정 5개 잡지가 1919년 한 해 동안 보도한 기사를 수집했다. 연구팀은 2016년부터 3년에 걸쳐 총 3007개 기사의 원문을 사진자료로 확보한 뒤 수작업을 통해 텍스트로 전환했다.
연구진은 적절한 후원자를 찾으면 3·1운동 100주년에 맞춰 사료집을 색인 가능한 데이터베이스로 전환할 계획이다. 양 교수는 “사료 선점은 결국 외교 문제인데 그간 우리나라가 연구에 소홀해 역사전쟁에서 속수무책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이번 사료집을 국내외 연구자들에게 오픈해 관련 연구가 본격화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재연 기자 jay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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