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란 정태욱의 원고
전북 김제의 지평선 고등학교 선생님들과의 토론을 위해 작성해 본 것입니다. 의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자유민주적 헌정질서 I. 자유민주주의란? - 민주주의의 진화 1. 존재론적 차원 : 완성을 향한 민주주의에서 지속가능성의 민주주의로 과거의 민주주의는 사회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적을 전제하였다. 사회의 지속가능성보다 목적의 구현이 중요하였다. 그런 조건에서 민주주의는 최고 원리가 아니라 다른 상위 가치를 위해 도구적으로 이용되는 하위 원리였다. 최고 통치권자의 권위를 강화시켜주기 위한 민주주의(절대주의 시대 초기 의회의 모습), 민족의 통일성을 구현하기 위한 민주주의(칼 슈미트의 동질성의 민주주의), 부국강병을 위한 국민동원을 위한 민주주의(근대 자본주의 산업발전과 보통선거권의 확대) 등이 그것이다. 이 경우 민주주의라는 원칙이 아니라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결과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 없이 부국강병이 된다면, 민주주의가 최고 통치권의 권위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면, 소수 국민의 배제와 차별이 국가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민주주의는 언제든지 뒷전으로 밀려날 수 있게 된다. 반면에 현대의 자유민주주의는 국가의 목적을 별도로 설정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자체가 헌정질서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현대의 민주적 기본질서는 개개인들의 자유와 존엄, 그러한 삶의 공존을 넘어서는 다른 목적을 두지 않는다. 애국주의적 통일성, 부국강병, 정치적 대표자의 권위는 민주적 기본질서가 잘 작동된 결과일 뿐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자율과 공존의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목적이지 다른 목적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자율과 공존은 우리들 ‘삶의 일용할 양식’이며, ‘공동생활의 근본 양식’이다.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시행에 있어서 조금의 혼란이 있거나 경제적 효율성이 저하되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민주주의의 지속을 위하여 치뤄야 하는 비용으로 인식된다. 그것이 당장은 ‘위험을 야기하고’, ‘손해를 발생시키더라도’ 결국은 장기지속의 관점에서 옹호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는 ‘완성을 위한 기획’이 아니라 ‘지속을 위한 기획’이다. 그런 관점에서 민주주의는 ‘반민주적 방법에 의한 민주주의의 발전’을 믿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위한 반민주적 강제’는 형용모순이다. 민주주의는 오직 민주적 신념과 실행에 의해서만 발전하고 지속될 수 있다. 2. 인식론적 차원 : 획일적 진리의 민주주의에서 시행착오의 민주주의로 과거의 민주주의는 ‘유일 세계관’의 민주주의였다. 과거의 헌정질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여도 하나의 공식적 세계관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삶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정답이 있고, 그 정답을 향해 일제히 진군해 가는 것이 바람직한 민주주의의 모습으로 인식되었다. 그와 같은 질서에서 진리는 결국 국가의 권위에 의하여 독점되고, ‘국가 공인의 진리’이외의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체제의 권위는 무오류의 존재가 되어, 의심은 허용되지 않으며,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가치에 대한 헌신만이 문제될 뿐이다. 특히 유토피아적 이상이 높으면 높을수록, 이상사회 건설의 열정이 강하면 강할수록 유일 세계관에 대한 집착은 심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국가폭력에 대한 방어막의 상실, 인간적 진실의 매몰이다. 칼뱅의 청교도 이상국가나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주의 이상국가에서 우리는 그와 같은 ‘절대 진리’ 민주주의의 비극성을 볼 수 있다. 반면에 현대의 자유민주주의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유일 세계관’을 거부한다. 현대 민주주의는 세계관의 다원성에서 출발한다. 현대 민주주의는 각인이 어떤 절대적 종교, 세계관에 입각하여 개인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국가 공인의 진리, 국가 이데올로기의 절대화를 거부한다. 현대 민주주의는 인간의 ‘오류가능성’을 중시한다. 칼 포퍼가 얘기하였듯이 지식은 오직 가설과 반증의 지속적 과정일 뿐이다. 즉 시행착오를 본질적 과정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현대 자유민주주의가 진리와 진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 민주주의에서 최고의 권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진실과 진리 자체이다. 다만, 인간의 삶에서 진실과 진리는 알기 어려우며, 그에 대한 독점과 봉인(封印)을 향한 권력의 탐욕은 언제나 우리를 위협한다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문제의식이다. 그리하여 자유민주주의의 과제는 오히려 ‘의심의 제도화’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정치의 목적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 독점을 방지하는 데에, 획일적 지배가 아니라 ‘다원적 공존’에 있다. 3. 가치론적 차원 : 특권과 차별의 민주주의에서 공존과 존중의 민주주의로 과거의 민주주의는 특권과 차별의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의 뿌리를 고대 희랍의 민주주의에서 찾지만, 당시 민주주의와 지금의 민주주의는 큰 차이가 있다. 고대의 민주주의는 특권적 자유인과 예속적 비자유인으로 구분된 소위 이중 국가(dual state)였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이라고 하여도 모두가 ‘정상적인 인간’으로 인정되지 못하였고, 희랍 민족이라는 특권적 자유인들만이 국정에 참여하고 권리의 주체가 되고 국가적 종교 의식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근대 계몽의 시대 자유주의 하에서도 민주주의는 오직 재산과 교양에서 우월한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배제하는 민주주의였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때의 자유주의는 ‘민주주의 없는 자유주의’[프랑스 7월 왕정 시기의 수상 기조(Guizot)의 신념]였다. 이처럼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적대시하던 때가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 자유주의가 불신받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이러한 특권과 차별의 민주주의는 19세기의 잔재만이 아니다. 그리고 20세기 헌법 교과서에 많이 나오는 칼 슈미트의 민주주의도 ‘편가르기’ 민주주의,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민주주의였다. 즉 배타적 민족주의, 인종주의에 기초한 포퓰리즘은 모두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특권과 차별의 민주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반면에 현대의 자유민주주의는 ‘공존과 존중의 민주주의’ 즉 ‘모든 이들의 동류(同類)성을 인정하는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이들의 것이다. 이는 인간의 차이란 ‘태양 앞의 촛불-전등’의 차이처럼 아주 사소하고, 우리 모두는 유한하고 취약한 존재로서 서로의 결함을 공감하며, 공동의 삶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인식에 기초한다. 롤즈와 샌델이 공히 얘기하듯이, 각인의 능력과 자산은 그 자신의 자랑만이 아니며, 각인의 가난과 결함은 또 그 자신의 책임만도 아닌 것이다. 물론 지금도 배제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작은 차이를 사회적 신분으로 만들어 기득권을 공고히하고, 소수자를 타자화하고 낙인찍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리하여 현대 민주주의는 과두주의라는 또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야누스’와 같다고(모리스 뒤베르제)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이 그에 미치지 못하면 못할수록 자유민주주의의 과제는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된다. ‘공존과 존중’의 민주주의, ‘배제를 배제하는 환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규범적 요청은 바로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과제인 것이다. II.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에서의 논점들 1. 다수결의 원리 보통 민주주의 기본 원칙으로 얘기되는 '다수결'의 원리를 자유민주주의의 차원에서 옳게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다수결의 원칙은 자칫 다수의 결정이 '올바르고', 소수의 의사는 '그르다'라는 차원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리에 반한다. 자유민주주의의 인식론은 '오류가능성'에서 출발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어떤 단정적이고 배타적인 진리와 거짓의 주장을 경계한다. 자유민주주의에서 다수결의 원리는 그 다수의 의견이 '옳다'라는 차원이 아니라 그 이전의 다른 다수결의 원리가 '틀릴 수도 있다'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다수결은 무엇이 진실인지 확정하는 원리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부정하는 원리에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자유민주주의에서 다수결의 원리란 교정의 과정, 시행착오의 과정이라는 '진리추구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현대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의 원리는 기존의 정책 혹은 세력들에 대한 심판의 과정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 어떤 절대적인 진리의 판정을 위하여 의미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다수결에서 다수의 의미는 그것이 인식론적으로 더욱 진리에 가깝다는 차원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기존의 상태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불만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속적인 교정의 과정, 심판의 과정에 자유민주주의의 특징이 있다. 요컨대 여기서 다수결의 원리란 '다수의 지배'라기보다 '다수의 변경가능성', 즉 '모든 이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의 보장'에 핵심이 있다고 할 것이다. 2.자유 민주주의와 ‘일인일표제’ 지금은 일인일표제가 자명한 것으로 인식되지만, 이 또한 많은 논란이 있던 문제이다. 개인의 자유, 다수 지배의 경계, 사상과 양심의 자유, 자본주의의 사회화 등 리버럴리즘의 거인이라고 할 수 있는 존 스튜어트 밀이 일인일표제가 아니라 '복수 투표제'를 제안, 즉 개인의 지적 역량에 따라 투표의 가치를 달리하고자 하였다는 점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당시로서는 가장 혁신적인 '여성의 참정권'까지 긍정하였던 밀이 어째서 일인일표제에 반대하였까? 그리고 어째서 결국 자유민주주의의 선거권은 일인일표제로 정리 되었을까? 사실 자유민주주의에서 각 개인에게 반드시 똑 같은 한 표를 준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쉽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투표를 정치적 진리추구의 과정이며, 가장 올바른 공적 판단을 위한 과정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보다 뛰어난 이들에게 더 많은 투표권을 주지 말아야 할까? 이런 생각이 제한선거론의 바탕에 깔려 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에서 일인일표제는 각 개인의 지적 역량이 똑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다수결이 다수의 판단이 옳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듯이, 일인일표제는 각인의 판단의 동등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일인일표제의 핵심은 오히려 지적 역량의 우열을 가늠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에서는 그에 대한 판정을 위한 어떤 권위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표자의 선출 혹은 국가정책에 대한 판단은 수학의 문제풀이와 같지 않다. 정치적인 판단 역량은 어떤 필답 시험으로 판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국가와 사회를 위해 필요한 지식이 무엇인지, 무엇이 보다 중요한 문제인지, 또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처리해 나갈지, 과연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자유민주주의는 오히려 각자 자신의 몫의 인생을 책임지며, 또 자신의 인생에 관한 한 그 자신이 제일 잘 판단할 수 있다는 사상, 그리고 단기적으로는 설사 개인이 자신의 일에 대한 최고의 판관이 아니더라도 그에 대한 시행착오도 그 자신의 몫으로 할 때 장기적으로 각 개인에게 가장 소망스러운 결과가 된다는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국가 형성의 투표과정은 곧 우리의 삶에 관한 결정이다. 그러한 결정에서 각자는 자신의 인생을 얘기할 수밖에 없으며, 또 자기 하나의 인생만큼만 얘기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 일인일표제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3.자유 민주주의와 소수자의 보호 자유민주주의가 강조하는 소수의 보호는 소수가 '옳다'는 관점도 아니고, 소수에게 '특권'을 부여하자는 것도 아니다. 소수의 보호는 인식론적 차원과 가치론적 차원에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인식론적 차원에서 소수자의 보호는 다수의 의견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며, 따라서 소수의 의견은 '박멸'될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 검토되어야 하는 무엇이라는 점에 기초하고 있다. 즉 언젠가는 지금의 다수의견이 소수가 되고, 지금의 소수의견이 다수가 될 수 있다는, 인간 인식의 오류가능성 그리고 교정가능성의 차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소수의견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것을 다수의견보다 앞세우라는 뜻이 아니라 소수의견의 유통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취지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소수의견에 대한 존중은 그것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다수의견이 틀릴 수도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하여 언젠가 소수의견이 다수의견이 될 수도 있다는 '교정가능성'을 열어 둔다는 차원에서 필요한 것이다. 두 번 째로 가치론적 차원에서의 소수자의 보호는 소수에게 특권을 부여하자는 취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언젠가 '소수'가 될 수 있다는, 그리하여 모든 이들의 자유와 존엄의 공존을 추구함에 있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원리라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소수자의 보호는 소수자에게만 이로운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기본적인 공존가능성의 틀이라는 점에서 필요한 것이다. 소수자의 보호는 한편으로는 소수의 부당한 특혜의 요구를 배척하는 것이어야 하고, 동시에 소수를 부당하게 수탈하고 억압하는 다수의 특권도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소수의 보호는 소수에게 새로운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처할 수 있는, 또 우리 모두가 빠질 수 있는 다수의 권력남용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취지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4.자유 민주주의와 ‘자기 사랑’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란 탐욕과 지배의 자유가 아니라 해방과 평화로서의 자유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리버럴리즘은 모든 개인들이 국가나 다른 권위에 의한 간섭과 방해 없이 스스로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인생을 계발해 나갈 것을 기본 신조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은 신조를 우리는 '자기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비민주적, 비자유적 체제에서 대개 상층 계급들만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누리고, 다수의 인민들은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취급되는 현실을 거부한다. 즉 다수의 인민들은 지배계급의 인도와 지시에 따라 살아야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권위주의적 신조들에 반대한다. 리버럴리즘은 어떤 개인이든 사람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으며, 비록 재능과 배경이 각각 다를지라도 누구나 자신의 진실에 따라 하나의 가치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음을 긍정한다. 이처럼 '자기사랑'은 인간의 가치는 본질적으로 우열을 가를 수 없다는 사상에 터잡고 있다. 그리하여 사회적으로는 인간의 차이에 기초하여 행해지는 모든 차별과 천대를 거부하게 되며, 개인적으로는 각자 타인에 대한 비교 없이 자신의 진실에 따라 삶을 영위해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자유민주주의의 '자기사랑'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 이기적인 자기과시, 또 타인에 대한 수탈과 억압이라는 지배욕과도 거리가 먼 것이며, '자기사랑'에 기한 모든 개인들의 자유의 공존를 추구한다. 5.자유민주주의와 ‘관용’의 원리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사상과 양심의 자유다. 인류 역사에서 어떤 체제도 자유민주주의만큼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중시하는 체제는 없었다. 자유민주주의는 심지어 그 자신을 반대하고 부정하는 이념 또한 인정한다. 자유민주주의의 인식론적 겸허함은 그와 같은 개방과 관용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에서도 차단하고 부정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폭력과 강제이다. 모든 사상과 이념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그 자유를 권력으로 악용하고 다른 사상과 이념을 폭력으로 부정하는 경우 그에 대하여 자유민주주의는 단호하게 반대를 얘기하고 제재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주의할 것은 그것이 단지 리버럴리즘의 본질에 반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공존의 틀과 평화를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즉 폭력과 압제가 다른 모든 사상과 이념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하는 것이지 자유민주주의만의 방어를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폭력과 강제의 이념을 거부하고 그에 대하여 투쟁한다고 하여 그 이념의 내용 자체를 완전히 근절시키려 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유민주주의가 거부하고 금지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이념이 공존의 틀을 넘어 폭력과 패권성으로 나아가는 그 지점부터이지, 그 이념의 원래의 내용 자체는 하나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도 새롭게 음미되어야 한다. 공산주의가 자유민주주의에서 허용되지 않는 것은 폭력혁명론과 공산당독재를 신봉하여 왔기 때문이며, 또 그 한도에서 금지되는 것이지, 공산주의의 사회경제 이론 혹은 심지어 혁명에 대한 사상의 자유 자체가 부정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자유민주주의에서 허용될 수 없는 사상과 이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그 이념과 사상이 폭력과 강제의 단계에까지 나아간다면, 그 부분에서는 단호하게 차단되어야 한다. 6. 자유민주주의의 정의론 자유민주주의에서 가장 오해가 큰 부분은 바로 정의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를 단순히 시장경제와 동일시하고, 시장에서의 경쟁의 논리를 ‘정의’로 이해한다. 이들의 기본 인식은 소유권절대론 그리고 공적주의이다. 소유권, 즉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 각자가 타고난 것을 절대적으로 그의 것이며, 시장에서 경쟁력이 우위인 사람이 그에 보상을 받는 것이 공정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자유민주주의는 그러한 전제를 수용하지 않는다. 각자의 부가 정말 그 자신의 고유한 도덕적 자격에 의하여 획득된 것인가? 각자의 빈곤이 정말 그 자신의 도덕적 책임에 의하여 초래된 것인가? 또한 어떤 개인적 능력이 과연 그 자신의 성실성만으로 얻어진 것인가? 가정적, 사회경제적 차이에 의하여 능력이 애시당초 차이가 나 있던 것은 아닌가? 자유민주주의는 사람들이 향유하고 주장하는 재산과 능력에 대하여 그것에 들어 있는 운의 요소, 즉 ‘불로소득’의 요소를 제기한다. 소유권 절대와 공적주의는 차별의 세계관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본다. 즉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는 격차가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반면에 자유민주주의는 평등의 세계관에서 출발한다.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크게 층지지 않는다고 본다. 따라서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대동의 원리에 의하여 구성되어야 하고, 차별은 ‘특별한’ 이유가 없이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본다. 사회적이고 생물학적인 우연에 의하여 얻어진 ‘불로소득’과 같은 부분, 혹은 그러한 우연에 의하여 초래된 ‘부당 손해’과 같은 부분은 공동체 전체가 마땅히 대동의 차원에서 향유하고 부담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정의론, 공정사회론은 사회민주주의와 수렴하게 된다. 롤즈는 사회적 불평등은 오직 최소수혜자에게 이롭게 될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고, 드워킨은 자원의 평등을 전제로 모든 이들의 기본복지를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요구하고 있으며, 반 파리스나 애커만은 모든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기초 생활자금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기본소득론’을 주장하며, 자유지상주의(시장주의자)인 밀턴 프리드먼조차 소득이 최저생계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그에 해당하는 보조금을 주어야 한다는 ‘네거티브 소득세’를 제안하기도 하였다(물론 프리드먼은 다른 사회보장제도는 모두 폐지할 것을 요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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