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요수 인자요산 (知者樂水仁者樂山) ★(2014.12.14.일)
by 석천선생 2014. 12. 14. 08:30
지자요수 인자요산 (知者樂水 仁者樂山)
지자요수 인자요산 (知者樂水仁者樂山)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註]<樂>은 음악이라는 명사일 때는 <악>으로 읽고,
즐겁다는 형용사일 때는 <낙>으로 읽고,
좋아한다는 동사일 때는 <요>라고 읽는다.
산이 좋고 물이 좋은데 별도의 이유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孔子께서는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智者樂水)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仁者樂山)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知者動)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仁者靜)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거워(知者樂)하고,
어진 사람은 장수(仁者壽)한다."고 말씀하셨다.
朱子는 이 말을 풀이하여
"지혜로운 사람은 사리에 통달하여 두루 통하고
막힘이 없는 것이 물과 같은 점이 있으므로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의리에 편안하여 중후하여 옮기지 않는 것이
산과 같은 점이 있는 까닭에 산을 좋아한다는 것"
이라고 풀이하였다.
漢나라 때 劉向의 《說苑》에 보면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子貢이 물었다.
"선생님! 군자가 큰 강물을 보면
반드시 바라보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대저 물을 군자
는 德에 비유한다.
두루 베풀어 사사로움이 없으니 德과 같고,
물이 닿으면 살아나니 仁과 같다.
그 낮은 데로 흘러가고 굽이치는 것이
모두 순리에 따르니 義와 같고,
얕은 것은 흘러가고 깊은 것은 헤아릴 수 없으니 智와 같다.
백길이나 되는 계곡에 다 달아도
의심치 아니하니 勇과 같고,
가늘게 흘러 보이지 않게 다다르니 살핌과 같으며,
더러운 것을 받아도 사양치 아니하니 포용함과 같다.
혼탁한 것을 받아들여 깨끗하게 하여 내보내니
사람을 착하게 변화시킴과 같다.
그릇에 부으면 반드시 평평하니 正과 같고,
넘쳐도 깎기를 기다리지 않으니 법도와 같고,
만갈래로 구비쳐도 반드시 동쪽으로 꺾이니 의지와 같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큰 물을 보면 반드시 바라보는 것일 뿐이니라."
원래 《荀子》〈宥坐〉에 실려 있던 것을 부연한 내용인데,
물의 여러 속성을 들어
인간이 지녀야 할 삶의 덕목과 견주었다.
물은 모든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사사로이 경중을 두어 차별하지 않으니
德 있는 군자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물은 만물에 생명을 불어 넣어 주고,
언제나 낮은 곳에 처하며 골짜기를 만나면 거세게 흘러가고
평지를 만나면 천천히 흘러간다.
순리를 지키는 義의 삶이 아닌가.
얕은 것은 흘러가도 깊은 것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니
이는 바로 智慧의 모습이다.
백길 계곡에 다달아도 의심치 않고
폭포가 되어 떨어지니 참 勇氣를 예서 배운다.
가늘게 흘러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침내 강물에 다달으니 목표를 정해 놓고
늘 省察해 마지 않는 군자의 자태가 여기 있다.
아무리 더러운 것도 물은 모두 받아들여 이를 정화시키니,
군자가 소인을 감싸 안는 모습이 아닌가.
일찍이 老子도 《道德經》에서
`上善若水`라 하여 으뜸 가는 善을 물에 견준 일이 있다.
물은 언제나 낮고 더러운 곳에 처하면서 만물을 이롭게 하므로,
노자는 물에서 `柔弱謙下`의 교훈을 읽은 것이다.
또 劉向은 계속해서 智者樂水와 仁者樂山의
이유에 대해 부연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仁者樂山의 변은 다음과 같다.
"대저 어진 자는 어째서 산을 좋아합니까?"
"산은 높으면서도 면면히 이어져 만민이 우러러 보는 바이다.
초목이 그 위에서 생장하고, 온갖 생물이 그 위에 서 있으며,
나는 새가 거기로 모여들고, 들짐승이 그곳에 깃들이며,
온갖 보배로운 것이 그곳에서 자라나고,
기이한 선비가 거기에 산다.
온갖 만물을 기르면서도 싫증내지 아니하고
사방에서 모두 취하여도 한정하지 않는다.
구름과 바람을 내어
천지 사이의 기운을 소통시켜 나라를 이룬다.
이것이 어진 사람이 산을 좋아하는 까닭이다."
우뚝 솟은 산은 만민이 우러러 본다.
온갖 날짐승 들짐승이 그곳에 터전을 잡고,
풀과 나무 꽃들이 거기서 자란다.
만물을 길러내면서도 귀찮아 하는 법이 없고,
모두가 그 혜택을 누려도 마다하지 않는다.
구름과 바람이 그곳에서 일어나
천지의 쌓인 기운에 숨통을 열어준다.
그렇다면 군자의 삶이란
높은 산과 같아야 하지 않을까?
의연히 제 자리에 지켜 서서,
그 표양으로 만인의 우러름이 되고,
그 가르침으로 만인을 감화시키며,
세상의 막힌 기운을 소통시켜 주는
소임을 다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아무리 넉넉한 품일지라도
산은 결코 그의 품 안에 아무나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小窓淸記》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세상 밖의 사귐은 오직 산이 있을 뿐이다.
모름지기 전체를 바라보는 안목과 勝地를 찾아갈 장비와
오래 머물러 맺은 인연이 있어야만
산은 비로소 막역의 사귐을 허락한다.
이른바 大觀의 안목이란 무엇인가?
인간 세상 장단 일에 一喜一悲 하지 않고,
萬古常靑의 불변을 닮아가는 것이다.
勝地를 찾으려면 마음의 준비뿐 아니라
여러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다.
단 한 번 산에 올라 산을 안다 할 수 있는가?
오래 머물러 바라보며 내가 산이 되고,
산이 내가 되는 물아일체의 호흡이 있어야 한다.
그때 산은 비로소 가슴을 열어 나를 전신으로 받아 들인다.
산을 안다는 것,
산과 만나 막역의 사귐을 맺는다는 것이 그리 쉬울까?
북송의 위대한 산수화가 郭熙는
<林泉高致>에서 이렇게 말한다.
산은 가까이서 보면 이렇지만,
몇 리 떨어져서 보면 또 이렇고,
십여 리 떨어져 보면 또 이러하니,
멀어질 때마다 달라진다.
이른바 산의 모습은 걸음마다 바뀐다는 것이다.
산의 정면은 이러하고,
옆면은 또 이러하며,
뒷면은 또 이러하니 볼 때마다 달라진다.
이른바 산의 모습은 면마다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산도
수십백 가지의 형상을 아우르고 있으니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산 하나의 모습이 이렇듯 천변만화일진대,
여산의 진면목을 어찌 안다 하겠는가?
다만 외경과 사랑을 담아 산을 바라고,
산을 그리며, 산과 닮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또 歐陽修는 〈浮사山水記〉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저 천하의 온갖 물건을 다 끌어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는 것은
富貴한 사람의 즐거움이다.
長松 그늘에서 다북한 풀을 깔고 앉아
시내 물이 졸졸 흘러가는 소리를 듣다가
돌샘의 물을 떠 마시는 것은
山林에 사는 사람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산림에 사는 선비는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간혹 마음으로 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힘을 헤아려 얻을 수 없어 그만둔 자는 물러나
이곳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저 부귀한 사람은 능히 온갖 물건을 이르게 할 수 있지만
아우를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오직 山水의 즐거움이 그것이다.
부귀한 사람의 즐거움이 있고,
산에 사는 사람의 즐거움이 있다.
부귀로도 권세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산에 사는 즐거움이 그것이다.
자연은 겸허로 자신을 비우고,
고요로 내면을 가득 채워,
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볼 줄 아는 사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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