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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강제징용 피해배상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해법을 둘러싸고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역사학자를 필두로 사회 곳곳에서 윤석열 정부의 해법 철회를 요구하고 굴욕 외교를 규탄하는 시국선언도 이어진다.
피해자의 목소리와 국민 정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고 일본 전범 기업의 불법행위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을 행정부가 독단적으로 무력화했다는 비판이다.
게다가 미래를 위한 ‘실리 외교’라는 주장의 실효성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대다수 시민들은 상당한 모욕감과 좌절감까지 느끼고 있다.
일본과의 협력적 관계의 필요성은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이뤄내기 위해서 굳이 ‘굴복’하며 ‘손해’를 감수할 필요가 있겠냐는 문제의식이다.
윤석열 정부의 대일 외교를 둘러싼 시민들의 감정은 과거 식민자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 차원과는 구별된다.
국력 상승을 통해 상당 수준의 자존감을 쌓은 한국 사회가 일본에 대한 일정 정도의 열등감을 극복하게 되면서 강제징용 피해배상을 비롯한 식민 역사 청산이 정당한 권리이자 요구라고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식민주의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발심과 적대감이 한국 사회의 대일 감정 구조였다면 현재는 동등한 이웃 국가로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관계 설정을 요구하는 것으로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속된 말로 더 이상 ‘꿀릴 것이 없는’ 한국이 일본에 주눅 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깨끗한 선진국’의 반대편에는…
하지만 한국 사회의 기득권 세력은 이렇듯 변화한 기층의 감정 구조와는 동떨어져 있는 듯하다.
이번 윤석열 정부의 대일 외교는 일본이 한국과 비견되기 어려울 정도의 ‘선진국’이며, 문명과 기술 등 모든 측면에서 한국이 열등하다는 의식이 집권 세력의 지배적 인식임을 확인시켰다.
예컨대 윤 대통령은 <요미우리신문>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 일본을 방문했던 기억을 회고하면서 일본을 ‘선진국’ ‘정직’ ‘깨끗함’ 등으로 정의 내렸는데, 이는 기득권 세력의 무의식에 깊숙이 배어 있는 식민적 사고 체계의 면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온통 긍정적 이미지로 그려지는 식민지 본국 이미지의 반대편에는 ‘후진국’ ‘부패’ ‘더러움’이 가득한 피식민지라는 자의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프란츠 파농은 식민지를 경험한 사회는 식민자에 대한 열등·의존 콤플렉스에 사로잡히게 됨을 역설하면서 식민지의 “검둥이”들의 심리에는 “백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비판하기도 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상황에 대한 파농의 일갈이 전세계에서 식민과 전쟁 이후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모두 이뤄낸 유일한 국가인 한국의 지배층의 의식에도 존재한다고 한다면 과한 비약일까.
혹자는 윤석열 정부의 성급한 대일 외교를 두고 급변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의 핵 능력이 고도화되고 미-중 전략 경쟁이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선택지는 결국 미국과 일본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한국전쟁 전후로 팽창하는 공산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미국이 한-일 관계 개선을 압박했던 것과 비견될 정도로 현재의 상황이 엄중하다는 논리다.
냉전이 맹위를 떨치던 시기에 남한에서의 탈식민의 과정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던 것처럼, ‘신냉전’이 도래한 현재 상황에서 탈식민적 주체성에 대한 논의는 배부른 소리이거나 순진한 민족주의적 발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논리는 분단과 냉전이라는 구조 내에서 한국이 탈식민의 질문을 마주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과 같다.
하긴 분단선 건너 북한의 탈식민의 과정도 왜곡되기는 마찬가지다. 탈식민 국가 건설이라는 북한의 목표는 남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정당성을 선점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국가 건설기만 하더라도 탈식민적 사회 변혁에 상당한 공을 들였던 북한 체제가 김일성 유일지배체제로 이행하게 되면서 반식민주의와 반제국주의를 김일성의 카리스마적 권력을 강화하는 기제로 활용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의 항일운동은 ‘혁명’이자 국가 정체성의 근원으로 역사화되기에 이른다.
즉 일본 식민주의에 저항한 김일성은 ‘민족의 영도자’라는 지위를 얻게 되고, 식민 청산을 이뤄내고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한반도의 유일한 자주적인 국가는 바로 북한이라는 논리가 구축되는 것이다.
이는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과 극복을 목표로 하는 탈식민적 접근이 특정 정치 세력에 의해 어떻게 비틀려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탈식민이라는 외피를 쓴 폭압적인 민족주의가 결코 식민주의의 극복이나 주체적 정체성 구축에 근원적 답이 될 수 없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분단, 탈식민 질문 무력화
전혀 다른 역사적 경로를 걸어온 남북 모두가 여전히 식민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은 결국 한반도의 분단과 냉전의 전환 없이는 탈식민은 불가능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분단은 남북 기득권 세력에 양극단의 방식으로 탈식민적 질문을 무력화하는 알리바이로 작동해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식민주의를 청산한다는 명분으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절대적 권력을 정당화하는 북한 체제나 북한이라는 ‘적’에 대응하기 위해서 식민 역사를 ‘과거’의 것으로 잊어야 한다는 남한 기득권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식민의 영향력을 극복하는 것은 단순히 ‘일본’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닌 냉전의 역사와 국제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중층적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주체’를 강조하는 북한의 선험적 선언이나 미래를 위한 ‘실리’적 접근이라는 남한의 단순한 논리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상황의 복잡성을 이제라도 마주해야만 한다.
안타깝게도 지난 5일 윤석열 대통령은 북한의 핵 위협 대응과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서 한·미·일의 협력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역사문제를 무시하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나선 이유로 북의 핵 위협과 중국과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꼽은 것이다.
다시금 분단과 탈식민이 어떻게 서로 지지하며 재생산되고 있는지 뼈저리게 절감한다. 탈식민은 이토록 어려운 것이다.
탈분단까지 함께 이뤄내야 하는 한반도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만큼 주체적 삶을 지향하는 것은 매순간 극한의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영국 에식스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성공회대, 싱가포르국립대를 거쳐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북한 사회와 탈분단 문화를 연구하며, <갈라진 마음들> 등 다수 학술 논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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