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혁훈 입력 2020.06.28. 17:57
러시아 등 해외 개발면적 10만㏊
서울 1.7배 땅서 연간 78만t 생산
4만t 이상 농작물은 다시 국내로
MB정부 때 도전한 곡물유통 사업
국제카르텔 벽에 대실패 맛봤지만
포스코인터·팬오션 등 최근 '결실'
팜스토리(옛 서울사료)가 지난달 러시아 연해주에서 운영 중인 농장에서 트랙터를 이용해 대두(콩) 씨를 뿌리고 있다. [사진 제공 = 팜스토리]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지금은 살짝 잊힌 경제 현상이 있다. 바로 곡물 파동이다.
2007~2008년 전 세계가 이 곡물 파동에 신음했다. 흉작으로 생산이 줄어든 가운데 수요가 급증하고 재고가 바닥나면서 곡물 가격이 급등했다.
밀, 옥수수, 대두(콩) 등 주요 곡물 가격이 일제히 올랐다. 그중에서도 밀 가격은 1년 새 2배 가까이 오르기도 했다.
그나마 우리나라는 쌀 자급률이 100%를 넘는 덕분에 화(禍)를 면했지만 우리가 그다음으로 많이 먹는 돼지고기, 쇠고기, 닭고기 사료용 곡물이 문제였다.
우리나라는 쌀을 제외한 곡물 중 80%가량을 수입에 의존한다. 사료용 곡물은 수입 의존도가 95%를 넘는다.
글로벌 곡물 파동에서 우리만 예외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코로나19로 식량안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당시 위기의식과 비교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2008년 2월 들어선 이명박(MB)정부가 서둘러 곡물 파동 대비책을 마련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당시 정부는 투트랙 전략으로 대책을 수립했다.
하나는 농수산식품유통공사(aT)를 중심으로 정부 예산에 대기업 자금까지 끌어들여 글로벌 곡물 유통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곡물 엘리베이터(터미널) 사업이다. 곡물 엘리베이터는 곡물을 모아 분류하고 저장하는 시설을 말한다.
카길 등 글로벌 곡물 메이저들은 이런 시설을 장악해 곡물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한국농어촌공사가 지원하는 해외 농지 투자다. 러시아, 동남아시아, 남미 등에서 확보한 농지에서 옥수수, 대두, 과일 등을 직접 재배하는 방식이다.
현대코퍼레이션홀딩스가 캄보디아에서 운영하고 있는 망고농장. 현대는 260㏊ 땅에서 연간 1만t 망고를 생산해 대부분을 수출하고 있다. [사진 제공 = 현대코퍼레이션홀딩스]
결과는 어땠을까. 큰 기대를 걸었던 글로벌 곡물 유통 시장 진출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정부가 최대 3조원 실탄을 준비한 데 이어 삼성물산, 한진, STX 등 대기업까지 끌어들여 aT그레인컴퍼니라는 합작사를 설립했지만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결국 박근혜정부가 들어선 2013년 최종적으로 사업 중단을 선언했다. 의도는 좋았지만 글로벌 곡물 유통 시장에 대한 이해 부족이 빚은 참사였다.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글로벌 곡물 메이저들의 견제가 복병이었다.
자기들 안방 시장에 진입을 선언한 '듣보잡'에 대해 메이저들은 똘똘 뭉쳐 방해 공작을 펼쳤다.
베일에 싸여 있는 '그들만의 리그'에 들어가려면 좀 더 은밀하고 정교한 전략이 필요했지만 그런 노하우가 우리에겐 부족했다.
그나마 다른 트랙인 해외 농업 투자는 주로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꾸준히 이어졌다.
해외농업자원개발협회에 따르면 MB정부 때부터 급증하기 시작한 해외 농업 투자는 지난해까지 187개사, 29개국 진출로 이어졌다.
물론 실패한 사례가 훨씬 더 많다. 187개사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기업은 66개사(19개국)에 그친다. 대략 35% 생존율이다. 10개 기업이 해외 농업 투자에 나섰다가 3~4개 정도만 살아남은 셈이다.
그러면 해외 농업 투자를 실패한 정책으로 봐야 할까. 그렇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 평가다.
MB정부 때부터 뿌린 씨앗이 이제서야 조금씩 온전한 싹을 틔우고 있다는 것이다. 수치상으로도 확인된다.
해외 농업 개발면적이 2010년 2만7000㏊에서 지난해 10만1000㏊(약 3억평)로 9년 새 3.7배 늘었다.
서울시 면적의 1.7배 농지를 확보한 셈이다.
정부에 신고하지 않아 공식적으로는 집계되지 않은 사업까지 포함하면 실제 개발면적은 이보다 크다는 분석이다.
해당 농지에서 생산한 수확물은 같은 기간 10만8000t에서 78만1000t으로 7.2배 증가했다.
수확물 중 국내로 반입한 물량은 같은 기간 420t에서 4만4400t으로 무려 105배 늘었다.
국내 기업들이 그동안 30개국 가까이 진출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정착을 잘한 곳은 단연 러시아 연해주 지역이다.
16개사가 진출해 지금 10개사가 남았으니 생존율이 60%를 넘는다.
남한 면적의 1.6배에 달하는 연해주는 우선 기후 조건이 우수하다.
연중 기온은 우리나라 대관령 지역과 유사해 옥수수, 대두, 밀, 보리, 감자 등을 재배하는 데 최적이다.
특히 여름철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는 우리나라와 달리 강수량이 작물 생육기간 내내 고르게 분포한다. 연해주가 소련 시절부터 집단농장 중심의 곡창지대로 발전한 배경이다.
MB정부 시절부터 농어촌공사에서 해외 농업 투자 업무를 담당하다가 지금은 해외농업자원개발협회에 몸담고 있는 이은수 사무국장은 "연해주 지역은 집단농장 덕분에 경지 정리가 잘돼 있고 도로와 관개시설도 좋아 농사를 짓는 데 추가 투자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게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정부의 해외 투자 유치 의지가 강해 관(官)의 협조도 비교적 잘되는 편이다. 연해주에 대한 농업 개발 투자는 1990년 한·러 수교 직후부터 시작된 북방동포(고려인) 지원 사업이 시초였다.
그러나 초기 진출은 거의 다 실패로 끝났다. 대규모 경작에 대한 경험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은 땅에서 곡물을 재배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현지인들이 짓고 있던 농사였지만, 우리나라 기업이 러시아 집단농장 출신 현지인들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농번기임에도 오후 5시가 되면 농기구를 내던지고 퇴근하는 농민들을 다독여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건 '넘사벽' 같은 일이었다.
더구나 어떤 작물을 어떤 종자로 심어야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를 찾아내는 건 길고 복잡한 과정이었다. 종자를 한 번 테스트하려면 1년이 걸리는 만큼 농장 한편에선 매년 시험재배를 반복해야 했다.
연해주 농업의 대표주자는 롯데상사와 팜스토리(이지바이오 자회사·옛 서울사료)다.
롯데상사는 현대중공업이 하던 연해주 농장을 2018년 인수했다. 여의도 면적의 35배에 달하는 1만㏊(약 3000만평) 땅에서 옥수수와 대두(콩) 등을 재배하고 있다.
연간 생산량은 2만4500t 정도다. 경작면적은 대두가 더 넓지만 단위면적당 생산성이 옥수수가 더 좋아 두 작물 생산량은 비슷하다.
옥수수는 거의 전량을 국내로 들여와 삼양사 등으로 공급한다.
전분이나 당을 생산하는 원료로 사용되는 것이다. 대두는 현지에서 판매하거나 중국으로 수출하고 일부 물량을 된장, 간장 등 장류와 두유를 생산하는 국내 업체에 공급한다.
정기호 롯데상사 대표는 "옥수수를 중심으로 경작면적을 지속적으로 늘릴 계획"이라며 "올해 2000㏊를 추가하는 등 장기적으로 1만㏊를 더 늘려 경작면적을 지금의 2배까지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지 농지 가격은 평당 200원이 채 안 된다. 100만평을 사는 데 2억원이면 충분한 셈이다.
정 대표는 "다만 아무 땅이나 산다고 되는 게 아니라 경지 정리가 잘돼 있는 땅을 사야 하기 때문에 현지 기업이나 지방정부와 잘 협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팜스토리는 5500㏊ 땅에서 대두, 옥수수, 귀리를 재배하고 있다. 전체 생산량은 1만5000t 수준이다.
수확물 공급처는 롯데상사와 유사하다.
진출 초기에 비해 생산성이 높아져 지금은 이익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최근 들어서는 콩의 단백질 함량을 조금 더 높이는 재배기술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그래야 부가가치가 높은 두부용 콩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곡물회사인 카길 한국법인에서 근무하다가 2012년 팜스토리에 합류한 이동고 상무는 "2012년만 해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농장이 있는 곳까지 80여 ㎞를 가는 데 4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은 1시간 남짓 걸릴 정도로 현지 인프라스트럭처가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기업들이 진출한 지 10년이 넘어가면서 현지인 근로자들도 농번기에는 시간 외 근로를 자처할 정도로 한국식 경영이 자리 잡고 있다"고 덧붙였다.
해외로 진출한 187개사 중 절반에 가까운 92개사가 동남아를 선택했다.
캄보디아와 인도네시아, 필리핀, 라오스, 베트남 등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남은 기업은 28개사에 불과하다.
평균 생존율 30%다. 인도네시아는 20개사가 진출했지만 4곳만 살아남았고, 필리핀에 진출한 13개사는 전부 사라졌다.
동남아는 기후 조건이 좋아 이모작, 삼모작이 가능한 장점이 있지만 복병이 만만찮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현지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가공·유통하기 위한 배후 인프라스트럭처가 부족한 것이 가장 문제다.
평야 지대가 우기 때는 강으로 돌변하는 곳도 적지 않다. 우기 때 상습 침수 지역이 아닌지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이유다
. 캄보디아 100㏊ 땅에서 대나무를 경작하는 한 인사는 "작년엔 건기 때 너무 비가 안 내려 물을 대느라 비용이 많이 들었다"며 "심기만 하면 잘 자랄 것으로 봤지만 생각보다 유지관리비가 많이 들어 고민"이라고 토로했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도 투자 결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현대코퍼레이션홀딩스(현대종합상사)가 대표적이다. 현대코퍼레이션은 2014년부터 캄보디아에서 망고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260㏊에서 연간 망고 1만t을 생산해 수출하고 있다.
특히 올해 초부터는 국내로도 망고를 들여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 물량 100t을 들여온 이후 코로나19로 항공편이 끊기면서 수입이 중단될 위기를 맞았다.
현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발 빠르게 망고 장기 보관 운송 기술을 개발해 냈다.
선박을 이용해서도 망고를 국내로 수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지 생산법인인 현대아그로의 이창훈 법인장은 "한국으로의 시험적 선박 운송에 성공해 하반기부터는 대량의 망고를 다시 한국으로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종합상사들은 인도네시아에서 팜 농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 포스코인터내셔널이 2만5500㏊ 규모로 팜나무를 재배하는 것을 비롯해 LG상사는 농장 3곳에서 총 4만5000㏊, 삼성물산은 2만4000㏊ 땅에서 팜을 기르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현지에 팜오일 생산공장도 갖추고 있다.
실패로 끝났던 글로벌 곡물 유통 시장 진출도 새롭게 시도되고 있다.
정부가 나서서 대대적으로 일을 벌이는 게 아니라 기업 단위에서 자발적인 진출이 이뤄지고 있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지난해 우크라이나 물류기업인 오렉심그룹에서 곡물 수출터미널 지분 75%를 인수했다.
우크라이나 남부 흑해 최대 수출항 중 하나인 미콜라이프항에 위치한 곡물수출터미널에 대한 운영권을 갖게 된 것이다.
포스코는 지난해 9월부터 현지 터미널을 통해 연간 250만t의 옥수수, 밀, 대두, 보리 등을 유럽연합(EU)과 MENA(중동·북아프리카), 아시아 등으로 수출하고 있다.
팬오션(하림)은 지난달 미국 법인을 통해 일본 이토추인터내셔널이 보유하고 있는 미국 EGT 지분 36.25%에 대한 인수 계약을 맺었다.
EGT는 미국 워싱턴주 롱뷰항에 연간 800만t 이상 곡물을 처리할 수 있는 최신식 곡물터미널을 보유하고 있다.
EGT의 최대주주는 글로벌 곡물 메이저 중 한 곳인 번기(63.75%)다. 팬오션이 2대주주로 참여하게 되는 셈이다.
이은수 사무국장은 "MB정부의 원대한 계획이 메이저 곡물회사들 때문에 좌초된 것을 감안하면 우리 기업이 번기와 함께 EGT 지분을 갖게 됐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해외 농업 투자의 최대 복병은 위기 때 반복되는 각국의 수출 제한 조치다.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베트남이 쌀 수출을 중단하고 러시아가 대두 수출 금지, 옥수수 수출 제한 조치를 취한 게 대표적이다. 다행히도 각국이 취했던 수출 제한·금지 조치는 대부분 해제됐다.
곡물 수출국들로서도 수출을 막으면 막대한 물량이 내수로 풀리면서 가격이 하락해 농민들 반발이 커지기 때문에 무한정 수출 제한 조치를 취할 수 없는 속사정이 있다.
러시아의 대두 수출 제한 조치도 당초 이달 말까지 지속될 예정이었지만 우리 정부의 외교적 노력 덕분에 이달 초 미리 해제됐다. 옥수수 수출 제한은 쿼터제가 적용되는데, 국내 업체들에는 별 영향이 없다.
다만 위기 시 수출 제한은 언제라도 재연될 수 있는 일이어서 만반의 대비가 필요하다.
주원철 농림축산식품부 국제협력총괄과장은 "평소 외교적인 농업 협력을 중시하는 것과 함께 해외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국내로 꾸준히 들여오는 파이프라인을 잘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혁훈 농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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