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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논쟁과 일본 최후의 내전 서남전쟁(西南戰爭)

참고자료·용어해설

by 석천선생 2019. 7. 10.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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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유신과 정한론(征韓論)의 현장을 가다

 

사쓰마번의 두 사무라이,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가 주도한 막부(幕府)타도, 무사계급 폐지, 부국강병의의 네이션 빌딩 전모.

明治維新의 주체세력을 배출한 가고시마(사쓰마藩)·야마구치(조슈藩)·고치(도사藩)는 해외 선진 문물과의 접촉점인 항구들이었다. 일찍이 개명영주(開明領主)에 의한 교육을 통해 세상물정에 눈을 뜬데다 흑선(黑船) 래도(來到) 이후 국가 존망의 위기를 깨달은 이 사무라이들은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사쓰마-조슈 동맹을 맺고 막부를 타도했다.

「마지막 사무라이」 사이고 다카모리는 명치유신의 성공 후 기득권을 상실하고 퇴장한 불평 사무라이들을 조선침략전으로 돌리려고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으나 내치 우선을 주장한 죽마고우(竹馬故友) 오쿠보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 반란을 일으키는데…

 

 

田原坂(다바루고개) 전투. 다바루 고개는 메이지 신정부에 반대해 사이고 다카모리가 일으킨 세이난(西南) 전쟁의 격전지다. 


왕정복고의(王政復古)의 대호령(大號令)
  
  12월9일, 薩·土·藝·尾·越의 5藩 군대가 돌연 어소(御所)를 봉쇄하고 친막파(親幕派)의 친왕(親王)과 공경(公卿)을 쫓아낸 다음에 이와쿠라가 어린 메이지 천황 앞에서 「왕정복고의 대호령(大號令)」을 대독했다. 즉, 섭정(攝政)·(관백)關白·(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등을 폐지하고 총재(總裁)·의정(議政)·참여(參與)의 3職으로 구성되는 新정부를 발족시킨다는 선언이었다. 이것이 메이지 유신의 출발점이었다.
 
  총재에는 다루히도 親王, 議政에는 公家와 쿠데타에 참가한 5藩의 藩主 또는 前번주, 參與에는 公家와 5藩으로부터 각 3명씩 임명되었다.
 
  이리하여 京都에는 왕정복고정권이 탄생했지만, 막부도 전국 지배의 실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2개의 중앙정부가 병립하는 모습이 되었다.
 
  천황 정부 내부에는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할 것을 주장하는 이와쿠라·사쓰마 등의 왕권복고파, 그리고 도쿠가와 정부와의 평화적 융합을 바라는 도사번·에치젠번·오와리번 등의 공정의정체파(公議政體派)라는 두 조류가 병존했다. 公卿들의 다수는 왕정복고의 명목에 만족하여 그 이상의 변화를 바라지 않아 公議政體派에 동조했다.
 
  왕정복고 쿠데타 당일 밤의 소어소회의(小御所會議)에서는 의정 山內豊信(도사 前 번주)이 이곳에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불러올 것을 주장한 데 대하여 이와쿠라와 오쿠보는 요시노부에게 사관(辭官)·납지(納地)를 명하는 것이 先決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회의의 분위기는 山內 지지 쪽으로 흘렀다.
 
  공의정체파의 大공세에 불안을 느낀 참여 岩下方平은 옥외에서 경비를 지휘하던 사이고에게 달려가 대책을 물었다. 사이고는 『短刀 한 자루만 있으면 결말을 낼 일』이라고 답변했다. 회의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한편 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위해 京都의 니죠성(二條城)에 머물고 있다가 12월13일 트러블을 피해 스스로 오사카城으로 옮겨 갔다. 그가 데리고 온 아이즈 번사 등이 대정봉환 후 잇달아 入京하는 사쓰마·조슈의 번사들과 충돌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大실수였다. 諸藩의 大勢는 도쿠가와 막부와 公議政體派 측으로 기울고 있었다. 왕정복고파는 점차로 고립, 쿠데타는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끝날 것 같았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최후의 다지기에 소홀하여 8, 9부 능선에서 눈앞에 둔 승리를 놓쳤다.
 
  12월25일, 오사카城으로 「사쓰마 번저 소각(燒却) 성공」의 飛報가 날아들었다. 오사카 城內는 그동안의 거듭된 양보로 사기가 죽어 있던 막부군 병사들의 환호성으로 들끓었다. 이번 기회에 京都로 진격하여 사쓰마·조슈 軍과 자웅(雌雄)을 결하자는 강경론이 빗발쳤다. 요시노부도 사이고의 도발에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도쿠가와家, 드디어 朝敵이 되다
  
  戰力은 도쿠가와 막부軍 측이 단연 우세했다. 병력이 3배 내지 5배였고, 천하의 名城인 오사카城을 근거지로 했으며, 에도로부터 프랑스式 신예군대의 증원을 기대할 수 있었는데다 오사카灣에는 東아시아 최강의 도쿠가와 함대가 버티고 있었다. 보통의 싸움이라면 천황 정부 측의 必敗 구도였다.
 
  사이고도 패전을 각오, 그때는 천왕을 주고쿠(中國) 山地로 옮기고 게릴라전으로 저항할 작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將軍 요시노부는 1868년 1월1일, 사쓰마번의 죄상을 열거하면서 奸臣의 인도를 요구, 만약 불응한다면 주륙(誅戮)을 가하겠다는 「토살(討薩)의 表」를 조정에 제출하고, 諸藩에도 出兵을 명했다. 그리고 2일, 막부군 1만5000명을 오사카로부터 진발시켜 요도(淀)에 본영을 설치했다. 이어 아이즈번을 선봉으로 하는 本隊는 후시미(伏見)에 집결시켜 본영을 후시미 奉行所에 두었다. 요시노부는 入京하여 參內의 순서를 밟을 작정이었다.
 
  1월3일, 북상하던 도쿠가와 막부軍은 京都의 교외 도바(鳥羽)·후시미에서 사쓰마번·조슈번의 방어선과 충돌했다. 緖戰은 일단 방어 측이 우세했지만, 곧 승패의 행방은 불분명해졌다.
 
  그런데 1월4일, 천황 정부軍의 前線에 「錦의 御旗」가 펄럭이자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朝敵(조정의 적)이 되었다는 쇼크를 받고 戰意를 잃고 死鬪를 벌이는 부하들을 버려 놓은 채 에도로 도피했다. 將軍이 되기 전 水戶(미도)번에서 성장했던 요시노부는 水戶學의 尊王論에 심취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錦의 御旗」는 실은 이와쿠라와 오쿠보가 밀조(密造)한 가짜였다. 主將이 전선으로부터 이탈했던 만큼 도쿠가와軍은 붕괴했고, 천황 정부 측은 예상치도 못한 승리를 거두었다. 사쓰마번으로서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도바·후시미 싸움은 불과 3일간 전개된 국지전이었지만, 이후 일본의 역사를 결정할 정도로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 천황정부 내에서는 왕정복고파가 주도권을 잡았고, 公議政體派의 영향력은 후퇴했다. 
  
    
 100만 시민의 전화(戰火)를 모면시킨 에도 開成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西일본의 諸藩은 「새 시대의 버스」에 올라타려고 천황 정부에 눈사태처럼 몰려와 줄을 섰다. 이로써 천황 정부의 정치기반은 일거에 확립되었다. 교토와 오사카의 豪商들도 천황 정부 측에 붙었고, 西일본의 幕領도 접수되어 천황 정부의 재정적 기반도 일응 모양은 갖추게 되었다.


 
  1월7일, 천황 정부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대한 征討令을 발했다. 2월9일에는 총재 다루히도 親王을 東征대총독에, 12일에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을 대총독참모(大總督參謀)에 임명했다. 천황 정부軍은 15일 진발했다.
 
  한편 에도성으로 도피해 온 요시노부는 항전할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를 놓고 고뇌했다. 결국, 대세는 갔다고 보고 퇴성근신(退城勤愼)으로 恭順의 자세를 보였다. 도쿠가와 막부 측에서는 가쓰 가이슈가 全權을 갖고 나와 천황 정부가 요시노부의 항복을 받아들여 관대하게 처리해 줄 것을 탄원했다.
 
  하지만 천황 정부는 강경했다. 전승의 세를 탄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여러 세력이 연합한 천황 정부內에서는 異論를 절충하여 講和로 이끌어갈 지도성이 아직 확립되지 않아 무책임한 강경론이 횡행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야마오카 데츠타로(山岡鐵太郞)라는 막부의 직속무사가 가쓰의 뜻을 받들어 결사의 각오로 준푸(駿府)의 대총독부를 방문, 參謀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요시노부의 眞意를 설명하고 항복조건을 협의했다.
 
  드디어 강화교섭이 구체화되었다. 3월15일로 예정된 에도 총공격을 이틀 앞둔 13일, 에도 所在 사쓰마 藩邸에서 개최된 사이고-가쓰 회담에서 에도성의 明渡가 결정됨으로써 에도의 100만 시민들이 戰火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의 깊은 개인적 신뢰관계가 어려운 문제를 풀었던 것이다.
 
  4월11일 에도의 開城, 즉 막부의 항복이었다. 요시노부는 미도(水戶)번으로 은퇴했다. 이로써 도쿠가와 막부는 소멸되고, 천황 정부가 일본 유일의 중앙정부가 되었다. 
  
    
 舊막부군 잔당을 토벌한 戊辰(보신) 전쟁
  
  에도 開城 후에도 關東의 政情은 안정되지 않았다. 舊도쿠가와 막부군의 일부는 關東 각지로 탈출하여 反정부의 깃발을 올렸다. 요시노부의 항복에 불만이었던 분자들은 에도성의 턱 밑인 우에노(上野)山에다 陣을 치고 「창의대(彰義隊)」라고 일컬으며 대결자세를 보여 新정부의 권위는 좀처럼 확립되지 않았다.
 
  정부의 無策에 대한 비판이 높았다. 군무관판사(軍務官判事) 오무라 마쓰지로(大村益次郞: 조슈번 출신)와 대총독부 軍監 에토 신페이(江藤新平: 佐賀藩 출신)가 진압계획을 세워 5월15일 彰義隊士 2000명이 진을 친 우에노山을 공격했다.
 
  사이고가 지휘한 사쓰마 藩軍은 최대의 격전을 치러 정면 黑門口를 탈취했다. 彰義隊도 선전했지만, 사가(佐賀)번의 최신예 암스트롱砲의 맹격을 받아 한나절 만에 궤멸했다.
 
  드디어 에도는 평정되어 7월에는 東京으로 개칭되었다. 10월에는 천황이 入城했다. 한편 石高 600만 석의 도쿠가와家는 시즈오카(靜岡) 70만 석에 封해졌다.
 
  그러나 아직 北일본의 정세는 험악했다. 정부군의 東北 진군에 대해 陸奧·出羽·越後 등 25개 번의 대표는 1868년 5월, 센다이번(仙臺藩)에 모여 아이즈藩 征討의 중지를 新정부에 요청하면서, 수락하지 않으면 列藩동맹을 맺어 사쓰마·조슈 兩藩과 싸우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정부군은 이들 동북제번(東北諸藩)에 일제공격을 가했다. 越後의 長岡城 및 아이즈(會津)의 와카마츠성(若松城)은 격렬한 전투 끝에 함락되었지만, 다른 諸藩은 싸우지도 않고 정부군에 항복했다. 이렇게 東北전쟁은 9월에 종료되었다.
 
  한편 에도 開城 때 막부군함을 이끌고 탈주했던 舊막부의 해군부총재 에노모토 다키아키 등은 하코다테(箱館)의 요새 고료카쿠(五稜郭)를 본영으로 삼아 北海道에 독립정권을 수립하고 있었다. 동북전쟁을 끝낸 新정부는 겨울을 지내고 1869년 4월 北海道에 상륙, 격전 끝에 하코다테와 五稜郭을 함락시켰다.
 
  舊막부 세력을 일소한 전쟁을 통틀어 戊辰전쟁이라고 한다. 그 결과 신정부의 전국지배는 거의 완성되었다. 내란 평정의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되고 있다.
 
  1)신정부군에는 農商 출신의 병사가 많이 참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2)여러 전투에 있어 정부 측의 조기 승리에는 민중의 舊영주에의 반항이 큰 원인이었다.
 
  3)이 승리에 의해 봉건적인 지배체제는 사실상 붕괴했다.
 
  4)內戰의 조기 승리에 의해 英·佛 등에 대해 군사개입의 여유를 주지 않았다. 
  
  
   폐번치현(廢藩置縣)으로 天皇 정부 권위 확립
  
  절묘한 2人3脚으로 사쓰마번을 討幕의 주체세력으로 이끌어 목적을 달성한 사이고와 오쿠보는 신정부의 핵심 조직인 참여(參與)로 취임했다. 그러나 그 후 둘의 활동분야는 달랐다. 사이고는 군사지도자로서 국내 통일전쟁에 대활약했지만, 內戰이 종료되면 世人의 기대와는 달리 고향으로 은퇴해 버렸다. 반면 오쿠보는 이와쿠라 도모미와 협력, 네이션 빌딩에 골몰했다. 그러나 신정부의 앞길은 험란했다.
 
  이런 상황에서 오쿠보(사쓰마번)·기도(조슈번)·이다가키(도사번)·오쿠마 시게노부(肥前藩)가 협의, 제각기의 藩主를 설득하여 토지·인민을 천황에게 반환하도록 했다. 4藩主가 천황에게 판적봉환(版籍奉還)의 建白書를 올리자 다른 번주들도 어쩔 도리가 없어 뒤따라 1869년 6월, 전국적으로 版籍奉還이 이뤄졌다.
 
  이것은 藩主가 版圖(土地) 및 戶籍(人民)을 지배하는 領主權을 천황에게 집중시킨다는 것이다. 舊번주에 대해서는 정부(천황)로부터 새롭게 知藩事로 임명됨과 함께 石高에 대신하는 家祿을 지급하게 되었다.
 
  그러나 版籍奉還 후에도 藩의 호칭이 남았고, 藩의 稅收도 藩廳이 관리했다. 藩은 의연히 군사력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시책은 번번이 藩의 벽에 부딪혀 전국적으로 시행되지 못했다.
 
  1869년 2월 말부터 야마구치(山口: 옛날 조슈번)번에서 병사 2000명의 반란사건이 돌발했다. 藩廳은 정부의 원조로 간신히 진압했지만, 반란분자의 잔당은 구루메(久留米)번에 숨어들어 구마모토(熊本)번의 舊존양파와 연결을 가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정부로선 당연히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무엇보다 경계한 것은 反정부운동이 농민폭동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藩을 그대로 두고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젠 蕃을 폐지해야만 했다.
 
  신정부가 이런 난제를 풀려면 강한 실천력을 지닌 사이고의 出馬를 재촉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1871년 3월12일, 勅使 이와쿠라 도모미가 오쿠보를 대동하고 가고시마에 가서 사이고에게 上京과 협조를 간청했다. 사이고는 쾌락하고, 스스로 야마구치와 고치(高知)에 가서 두 藩에게 협력을 구했다. 또한 그의 제안으로 가고시마·야마구치·고치의 3藩으로부터 8000명의 군대를 제공받아 御親兵으로 삼았다. 御親兵이란 군사력을 배경으로 중앙집권제를 단행하려 했던 것이다.
 
  1871년 6월25일, 천황은 정부의 參議 및 각 省의 卿(장관) 전원을 일단 해임하고 사이고와 기도, 둘만을 參議로 임명하여 권한을 집중, 발본적 개혁을 수행하는 체제를 정비했다. 廢藩의 단행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7월14일, 천황은 在京 知藩事를 소집, 일방적으로 藩을 폐지하고 縣을 설치할 것을 선언함과 아울러 知藩事 전원의 해임과 東京 거주를 명령했다. 이로써 261개 藩 전부가 일거에 소멸, 領主制의 遺制가 일소되고 정부에 의한 전국 직접 통치가 실현되었다.
 
  廢藩 발령의 날, 정부 수뇌가 모인 구수회의에서 諸藩이 반항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갑론을박하고 있었다. 늦게 회의에 출석했던 사이고는 그런 논의들을 듣고 있다가 돌연 큰 소리로 『이 이상 각 藩이 어물거리면 我輩(우리)가 御親兵을 끌고 가서 깨부숴 버리겠다』고 放言했다. 이에 의론이 일순에 정리되었다.
 
  난항이 예상되었던 廢藩置縣의 스무드하게 수행된 것은 사이고가 위엄으로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廢藩置縣의 최대 공로자는 사이고였다. 
  
    
  죽마고우(竹馬故友)를 등지게 한 정한론쟁(征韓論爭)
  
  朝鮮과 日本의 관계는 幕末 이후 중단된 상태에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1868년 對馬島의 宗씨를 통해 조약의 체결을 요구했다. 당시 조선은 高宗의 아버지 興宣大院君이 집권했는데, 洋夷들인 歐美제국과 國交를 맺은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일본은 외무성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 교섭을 하려 했지만, 조선 정부는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 이러한 조선 측의 태도에 대해 일본 정부 내부에서는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교섭에 응하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이런 征韓派의 목소리는 일본 국내에 있어 反정부의 움직임을 한반도로 돌리려는 속셈을 깔고 있었다. 요컨대 征韓論은 불평 사무라이 및 농민 봉기의 빈발에 따른 내란의 위기를 회피하려는 대외 강경책이며, 동시에 韓半島를 집어먹음으로써 일본의 국권을 신장시키겠다는 야심의 정책이었다.
 
  이런 가운데 메이지 정부는 1871년 정부 수뇌부를 歐美에 파견하여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려 했다. 특명전권대사는 外務卿(외무대신)으로부터 右大臣에 오른 이와쿠라 도모미, 副使는 參議 기도 다카요시·大藏卿 오쿠보 도시미치·공부차관(工部大輔) 이토 히로부미 등으로서 사절단원의 인원은 48명에 달했다.
 
  이와쿠라 등의 출국에 의해 일본 정부 내부엔 征韓派에 대한 견제세력이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이다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에토 신페이(江藤新平) 등에 의해 주도된 일본 정부는 朝鮮에 대한 강경방침을 결정했다. 우선, 사이고를 朝鮮에 특명전권대사로서 파견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쿠라 사절단 일행의 귀국 이후 征韓은 시기상조(時機尙早)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이와쿠라 도모미·오쿠보 도시미치·기도 다카요시 등은 朝鮮 출병보다 국내문제의 해결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 內治派는 征韓派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그 결과, 征韓論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일제히 정부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메이지 유신의 주체세력은 완전히 둘로 갈라섰다. 근대화 정책에 반대하는 불평 士族(사무라이)의 요구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사이고·이타가키 중심의 세력과 불평 士族의 반대를 억압해서라도 徵兵令 및 地租 개정과 같은 근대화 정책을 강행해야 한다는 오쿠보·기도 중심의 세력 사이에 벌어진 노선 충돌이었다. 
    
  
 사이고의 私學校 설립
  
  사이고의 참의(參議)·근위도독직(近衛都督職) 사표는 수리되었지만, 육군대장의 사임은 인가되지 않았다. 1873년 10월28일, 그는 육군소장 키리노 토시아키(桐野利秋)와 함께 요코하마를 출발, 11월10일 가고시마로 돌아왔다.
 
  사이고의 사임과 함께 근위국장(近衛局長)인 육군소장 시노하라 쿠니모토(原國幹) 이하 소좌 벳푸 신스케(別府晉介) 등 많은 將士들이 사표를 내고 사이고의 뒤를 따라 歸縣했다. 이 밖에도 관리·警部 등 100여 명이 연명으로 사직했다.
 
  辭職 歸縣했던 추종자들에게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에 사이고는 1874년 6월, 私學校를 설립하여 이들의 조직화를 꾀했다. 우선, 옛 역참 터(현재 縣廳 안)에 舊근위보병을 수용하는 총대(銃隊)학교, 포병 출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포대(砲隊)학교를 만들었다. 銃隊학교는 시노하라, 포대학교는 外遊 후 귀국한 무라타 신하치(村田新八)가 감독을 맡았다. 이런 本校 이외에 시내 여러 곳 및 각 鄕에 分校를 두었다. 생도는 輪番으로 본교에 출석, 군사교육과 漢籍 등의 수업을 받게 했다. 분교의 수는 100개를 넘었는데, 경비는 縣令 오쿠마 츠나요시(大山綱良)의 재량으로 縣廳에서 지급되었다.
 
  이 밖에도 현재의 테루쿠니신사(照國神社) 경내에 士官 양성을 위한 幼年學校, 시역의 변두리에 吉野寺山에 개간사(開墾社)를 만들었다. 유년학교는 漢學 이외에 洋學을 가르쳤는데, 縣 고용의 외국인 교사도 출강했다. 생도들 중에서 우수한 자는 유럽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사이고 등의 賞典祿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賞典학교라고 부르기도 했다. 개간사에서는 舊교도단 생도를 수용, 原野를 개간해서 농작물을 재배하면서 학업을 닦게 했다.
 
  사이고는 私學校의 특별한 직책을 가지지 않았지만, 사실상의 중심인물이었다. 많은 청년들이 그의 '덕망'을 흠모하여 입교했다. 사이고는 스스로 사학교 綱領과 戊辰전쟁 전사자를 위한 祭文을 지어 각 학교에 게시했다. 사쓰마번 고유의 정신을 북돋워, 국가비상時에 몸을 던지는 인재를 양성하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단순한 학교라기보다 군사교육 또는 정신수양의 단체로서의 경향이 강했고, 더욱이 정치적 불만을 가진 歸縣했던 사람 중심으로 설립되었다는 사정 때문에 정치결사적 성격이 농후했다. 
  
    
 불평사족(不平士族)의 반란
  
                                                                                

 

 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정책이 진행됨에 따라 舊무사계급의 특권은 질록처분(秩祿處分: 막부 시대 이래의 家祿과 戊辰전쟁의 功績에 대한 賞典祿을 대폭 삭감)·징병령(徵兵令: 국민개병제 실시)·폐도령(廢刀令: 사무라이에게 칼을 차지 못하게 함) 등으로 잇따라 부정되었다.

 
그 결과, 신정부에서 자리를 얻지 못한 士族의 다수는 생활이 궁핍하게 되었다. 게다가 征韓派의 패배는 그들에게 기대를 걸었던 불평 士族을 점점 정부로부터 이반케 했다. 이들은 전제적인 오쿠보를 중심으로 추진되는 정부의 근대화 정책에 대해 반대운동을 벌였다.
 
  특히 征韓論爭에서 패배하여 參議를 사직하고 고향 사가(佐賀)로 돌아간 에토 신페이(江藤新平)는 정한당(征韓黨)의 수령이 되어 양이론자  시마 요시타케(島義勇) 등 憂國黨의 불평 士族과 함께 1874년 7월 거병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오쿠보가 선두에 서서 이를 철저히 진압하고, 에토는 사형에 처해졌다(佐賀의 亂).
 
  구마모토(熊本)의 반동적인 불평 士族들도 신풍련(神風連)이라는 복고적·양이주의적 조직을 만들어 1876년 폐도령 공포에 격분하여 거병했지만, 구마모토 鎭臺兵에 의해 진압되었다(神風連의 亂). 또한 국권확장을 주장하는 후쿠오카(福岡)현의 舊 秋月藩士도 거병했지만, 이것 역시 실패로 끝났다. 한편 동년인 1876년, 옛 조슈 討幕派의 지도자였던 前 參議 마에바라 잇세이(前原一誠)도 향리 야마구치현에서 불평 士族을 조직해 하기(萩)에서 거병했지만 근대적 장비를 갖춘 정부의 상비군에게 진압되었다. 이런 인근 지역의 반란에 가고시마의 士族도 동요했지만 사이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사쓰마 士族의 다수는 征韓論을 통해 이미 反정부적이었고, 가고시마현은 중앙정부가 추진하는 地租개정 및 징병령에도 응하지 않았다. 조슈派의 參議 기도 다카요시는 가고시마현을 半독립국 같다고 비난했다.
 
  정부는 「가고시마 不穩」의 정보에 大警視(대경시) 川路二良을 비롯한 警部 등 20명을 가고시마에 급파하여 私學校의 동향에 대한 내사를 벌였다. 드디어 1877년 1월 말, 미쓰비시汽船을 파견하여 가고시마에 있는 육·해군의 탄약·병기 등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다. 
    
  
 서남전쟁(西南戰爭)의 폭발
    
 

서남전쟁도. 파란색선이 사쓰마군의 진로, 붉은색이 정부군의 진로다.


  
  이에 흥분한 私學校 생도들이 1월29일부터 2월2일에 걸쳐서 정부의 탄약고를 습격, 탄약 등을 약탈했다. 그때 사이고는 오스기(大隅) 방면에서 수렵 여행 중이었다.
 
  때마침 私學校 측에 억류된 경시청조(警視廳組)의 1인이 가고시마에 파견된 목적을 「사이고 암살」이라고 자백함으로써 私學敎徒들은 격분했다. 이후 私學校 측은 警視廳組 등을 「정부의 스파이」라고 주장, 잇달아 체포했다.
 
  사이고를 정점으로 하는 私學校軍 1만3000명은 보병 5대대, 포병 2대 및 前衛 2대대로 편제, 15일부터 17일에 걸쳐 북상했다.
 
  사이고의 암살을 오쿠보·川路가 명했다는 사학교 측의 주장은 지금도 그 진위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이고 암살 기도」라는 개인적 색채가 강한 문제를 擧兵의 최대 이유로 내걸었다는 점에서 擧兵 목적의 왜소화된 감이 없지 않았다.
 
  한편 정부는 일시 海軍大輔(해군차관) 중장 가와무라 스미요시(川村純義)를 가고시마에 파견하여 사이고와 면담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자 2월19일 征討令을 발했다. 타루히도 親王이 征討總督, 陸軍卿 육군중장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川村純義가 參軍에 임명되었다. 정토 본영은 후쿠오카에 설치되었다.
 
  오쿠보는 처음엔 사이고의 반란 가담을 믿지 않고 사이고와 私學校黨을 구분하면서 私學校黨 박멸의 호기로 보고 있었다.
 
  사쓰마軍의 대거 北上을 맞아 구마모토 鎭臺사령장관 타니 칸조(谷干城) 소장은 징병령에 의해 이제 막 신설된 농민 출신 鎭臺兵으로선 歷戰의 사쓰마 士族軍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 농성을 하면서 원군의 도착을 기다리는 작전을 세웠다.
 
  사쓰마의 全軍은 20일 구마모토에 진입, 그 主力이 구마모토城을 포위, 2주야에 걸쳐 맹공을 가했다. 구마모토城은 4000여 명의 鎭臺兵이 지켰지만, 가토 기요마사가 쌓은 천하의 名城이었던 만큼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앞서 다니 少將은 小倉 제14연대장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소좌에게 來援을 명해 그 부대 일부가 19일 구마모토城에 입성했지만, 노기의 本隊는 입성하지 못했다. 후일 러일전쟁 때 요동반도의 旅順요새를 함락시킨 노기는 이때 패주하면서 軍旗까지 빼앗겨 팽생의 부끄러움이 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최후
  
  
 

 


    구마모토城 공략의 어려움을 감지한 사쓰마軍은 일부 병력으로 성을 포위한 채 主力은 南下하는 정부軍을 영격(迎擊)하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사쓰마軍 주력은 3道로 북진, 2월25일 高瀨 점령을 시도했지만, 병력·군수의 결핍으로 실패했다. 이날 사이고는 官位를 삭탈당했다.
 
  정부軍은 구마모토城 구원이 전국(戰局)의 대세를 결정하는 것으로 보고 田原(다바루)고개 돌파에 전력을 기울였다. 田原은 천연의 요새로서 여기에 용맹한 사쓰마軍이 들어가 있어 공략은 쉽지 않았다. 정부軍은 우선 3월3일과 4일, 田原의 남방 吉次고개에 맹공을 가했지만, 돌파하지 못했다. 정부軍 사상자는 300명이 넘었고, 사쓰마軍에서도 시노하라 쿠니모토가 전사했다.
 
  정부軍은 6일 이후 吉次 방면에선 수비만 하고 田原 공격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후 10일간 처절한 전투가 거듭되었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사쓰마軍에서는 得意의 拔刀隊가 종횡으로 활약, 정부軍의 인명피해는 1000명에 달했다. 그러나 사쓰마軍도 탄약이 부족, 돌을 탄환 대신 사용하는 형편으로 2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정부軍은 3월20일 이른 아침, 큰비가 내리는 가운데 不意의 총공격을 감행, 드디어 田原坂을 함락시켰다. 정부軍의 사상자 3000명, 탄환도 1일 평균 21만 발을 소모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구마모토城과의 연락을 취할 수 없어 초조했던 정부軍은 사쓰마軍의 背面을 찌르는 작전을 수립했다. 3월1일부터 나가사키(長崎)의 부대를 규슈의 중부 해안지역인 日奈口·八代 방면에 상륙시켜 여기서부터 구마모토로 북진시켰다. 參軍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가 이끈 背面軍은 도중 각지에서 사쓰마軍과 전투를 벌이면서 4월14일 구마모토에 도착, 15일 入城했다.
 
  정부 背面軍의 구마모토 입성에 따라 등 뒤에 적을 맞게 된 사쓰마軍은 木山 방면으로 철퇴했다. 그러나 木山도 4월21일 함락되면서 구마모토 남부의 仁吉로 후퇴했다.
 
  한편 사쓰마軍의 병참기지 가고시마의 점령을 노린 정부軍은 4월27일 다무라 參軍의 통솔 아래 海路로 남진, 가고시마에 상륙하여 縣廳 수뇌부를 체포하고 가고시마의 방비를 굳혔다.
 
  가고시마를 점령한 정부軍은 大隅·日向 2州의 사쓰마軍을 서쪽으로부터 압박하는 형세였다. 사쓰마軍은 후퇴를 거듭, 宮崎·延岡 등지를 전전하다가 長井村에 이르렀지만 정부軍에 포위되었다. 사이고는 휘하 諸隊에 대해 향후의 진퇴를 자유에 맡겼다.
 
  사이고는 본대와 함께 長井村 배후의 可愛岳(표고 728m)의 절벽단애를 넘어 三田井 방면으로 탈출했다. 사쓰마軍은 규슈 곳곳을 전전하다가 출전 199일 만인 9월1일, 정부軍에게 점령당한 가고시마로 돌입하여 한때 米倉(現 가고시마 시청)을 제외한 가고시마 시가를 제압했다.
 
  사쓰마軍은, 9월2일부터 3일에 걸쳐 정부軍이 陣을 친 米倉 공방전을 전개했지만, 증강된 정부軍을 밀어내지 못하고 이후 私學敎와 城山을 최후의 보루로 삼았다. 이에 대해 정부軍은 8개 여단을 가고시마에 집결시켜 400여 명의 사쓰마軍이 방어하는 城山을 완전 포위했다.
 
  정부軍은 1877년 9월24일 오전 4시, 총공격을 개시했다. 사이고는 유탄에 맞고 쓰러져 심복 別府晉介의 가이사쿠(介錯: 割腹한 사무라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목을 쳐 줌)로 51세의 생애를 마감했다.
 
  西南전쟁에 동원된 사쓰마軍의 총병력은 출진 당초의 1만3000명에다 그 후의 징모 등에 의해 3만3000명에 달했다. 이에 비해 정부軍은 2배에 가까운 6만 명. 장비에 있어서도 사쓰마軍은 질·양 모두 정부軍에 비해 열등했고, 장비보충도 되지 않았다.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日向에서 西鄕札, 즉 軍票를 발행하기도 했다. 

 

 

정부군과 사쓰마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이진 田原坂(다하라 고개) 전경.

   오쿠보의 피살(被殺)
 
1878년 5월1일 아침, 후쿠시마 현령 야마요시 모리노리(山吉盛典)는 출근 전의 參議 겸 內務卿 오쿠보 도시미치를 방문했다. 縣勢의 보고를 마친 야마요시는 돌아가려고 했는데 오쿠보가 그를 불러세워, 『메이지 유신을 완성시키는 데에는 30년이 걸릴 것이다. 메이지 元年으로부터 10년까지의 제1기는 창업기로서 兵事가 많았다. 20년까지의 제2기는 가장 중요하여 內治를 정비하고 民産을 증식시키는 시기이기 때문에 不肖 토시미치는 전력을 기울일 心算이다. 이후 제3기는 後進 諸君에 맡기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제2기의 출발 초기에 오쿠보는 不意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오쿠보가 마차를 타고 출근하려고 하는 순간 늦둥이 딸인 芳子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그치지 않았다. 이에 오쿠보가 芳子를 마차에 태워 현관 앞을 한 바퀴 돌고서야 芳子는 울음을 그쳤다. 그 직후에 오쿠보는 암살되었다.
 
  오전 8시경, 오쿠보의 마차는 紀尾井 오르막길을 접어들었는데, 길가에 있던 書生風의 남자 둘이 갑자기 달려들어 칼로 말의 앞다리를 베었다. 마차가 급정거하자 숨어 있던 다른 남자 넷이 저마다 손에 단도를 들고 마차로 돌진했다. 마차 안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오쿠보는 급히 좌측 문으로 나오려다 자객과 마주치자 「無禮者」라고 일갈했지만, 미간을 베였다. 자객은 오쿠보를 마차로부터 끌어내려 난자했다.
 
  이렇게 오쿠보는 4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오쿠마 시게노부·이노우에 가오루 등 다른 維新의 원훈들이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던 때에 오쿠보는 여전히 관저에서 생활했다. 그의 死後에는 8000엔이라는 빚만 남아 있었다.
 
  필자는 10년 전인 1983년, 오쿠보의 피살현장 가까이에 위치한 오쿠라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다. 오쿠라 호텔은 도쿄의 최고급 호텔로서 주위에 인적이 드물어 매우 조용한데, 가까이에 일본 총리 공관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의 총리 공관이 오쿠보가 출근하려 했던 당시의 赤坂(아카사카) 假御所였다.
 
  하수인은 이시카와(石川)현 士族 시마타 이치로(島田一良) 등 6명이었다. 그들은 가고시마 私學校派에 공감, 西南전쟁에 호응하여 거병을 기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쿠보 암살로 계획을 바꾸었다.
 
  그들의 참간장(斬奸狀)에는 「공의(公議)를 두절하고, 민권을 억압하고, 이로써 政事를 사사로이 했다」, 「유사전제(有司專制)의 폐해를 고치기 위해 「간괴(奸魁)를 참한다」고 쓰여 있었다. 범행 후 제 발로 자수했던 그들은 동년 7월 모두 참형에 처해졌다.
 
  한편 사이고·오쿠보와 더불어 「維新3傑」의 1인으로 회자되는 조슈번 출신 參議 기도 다카요시는 오쿠보보다 1년 전에 44세를 일기로 病死했다. 기도의 死後, 조슈파의 정치기반은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다 아리토모가 이어받았다. 일찍이 松下村塾에서 同門修學한 두 사람은 메이지 정부 제2기를 주도하게 된다. 
    
  
 사이고와 오쿠보의 차이점
  
  메이지 유신 이후 사쓰마-조슈 人脈 중심의 藩閥정치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번벌정치의 반대 방향을 걸었던 사람이 오쿠보였다. 人材양성을 제일 중시한 그는 행정조직도 그 중심은 人間이라고 보고 번벌 등에 구애됨이 없이 널리 적재적소(適材適所)의 人材를 구했다.
 
  조슈 출신의 이토 히로부미도 『오쿠보는 누구의 계통인가 또는 어느 藩 출신인가를 전혀 문제로 삼지 않고 유능유익(有能有益)한 인물만을 등용했다』고 상찬했다. 이 때문에 의욕적인 인물들이 오쿠보의 밑에 몰려들었다.
 
  일본 사회에서는 「담력의 사이고, 지혜의 오쿠보」라든가 「사이고는 영웅, 오쿠보는 정치가」 등으로 두 사람을 비교한다. 대중적 인기 면에서 오쿠보는 물론 사이고에 미치지 못하지만, 智略 및 人事에 관한 한 오쿠보의 識見은 탁월한 바 있었다. 일본의 여론조사 같은 데서 近代 일본 최고의 인물로 손꼽히는 사이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매우 신랄한 평가도 있다.
 
  『가고시마 있는 것은 알고 일본 제국 있는 것은 몰랐고, 사쓰마 武士 있는 것은 알고 海陸의 官軍 있는 것은 잊었다』
 
  西南전쟁과 관련, 사이고에 대한 비판이다. 擧兵, 그것이 그의 주위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고 어쩔 수 없이 끌려들었다고 할지라도 征韓論 등에서 보인 사이고의 사고방식은 시종(始終) 사쓰마 士族 옹호에 기반하고 있었다. 반면 오쿠보는 그 대극점(對極點)에 서서 국가이익을 먼저 생각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러나 사이고에 대한 메이지 천황의 애정은 변함 없었다. 당시 東京제국대학 교수로서 궁중 사정에 정통했던 그리피스 교수는 『메이지 천황이 사이고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만세 부르는 것까지 금지했기 때문에 (西南전쟁의) 개선군대가 쓸쓸함에 휩싸여 몹시 삼가는 모습으로 東京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개선군대는 古今東西에 유례가 없다』라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해 늦가을 메이지는 황후·女官들과 함께 사이고를 추도하는 가회(歌會)를 열었다. 이때 천황은 『사이고의 罪過는 모르는 체하고 詩作을 하라. 이번 暴擧만을 논하면 維新의 大功을 덮는 것이 되니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왜 메이지 천황은 이미 「조적(朝敵)」으로 규정되어 戰死한 사이고에게 그처럼 연연했던 것일까. 그것은 『메이지 천황이 사이고에 의해 武士化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16세에 즉위했던 무렵만 하더라도 어쭙잖은 일로 졸도하는 등 유약한 모습을 보였던 메이지 천황도 어느덧 강인한 전제군주(專制君主로) 변모했는데, 그것은 「典型的 사무라이」 사이고로부터 영향받은 바가 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死後 12년 만에 사이고는 사면령(赦免令)에 의해 명예를 회복했다. 陸軍大將 사이고 다카모리에게는 正3位의 官位가 추증(追贈)되었다.
 
征韓派와 內治派

征韓논쟁에 패해 정부에서 물러난 征韓派는 西鄕隆盛·板垣退助·後藤象一郞·江藤新平·副島種臣(이상 參議)을 비롯 사이고 直系의 사쓰마 출신 士官(桐野利秋·시노하라 등) 및 板垣 계열의 도사번(지금의 高知) 출신 士官들이 많았다.

이들의 征韓論은 대륙침략의 제1보인 韓半島 정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몰락해 가는 士族을 내란으로 몰지 않고 대외전쟁에 돌림으로써 그들에게 活路를 열어 주려는 것이었다.

征韓派가 군인파였던 데 비해 內治派는 관료파였다. 岩倉具視, 大久保利通, 木戶孝允, 大木喬任, 大常重信(이상 參議) 이외에 伊藤博文·黑田淸隆 등이다. 太政大臣으로서 최고의 지위에 있었던 三條實美는 최후까지 兩論 사이에서 헤매는 모습이었다.

內治派도 물론 征韓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朝鮮 침략을 실행하기 위해서라도 독재적인 중앙집권적 관료정부를 확립, 군대·경찰을 강화하고, 산업을 진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歐美제국을 직접 시찰하면서 받은 강렬한 감명이 征韓派의 사무라이적 사고방식을 배제시킨 것이다.
 
 

『사이고는 舊體制의 파괴자였고, 오쿠보는 新체제의 건설자였다』 
   
 
 明治維新의 진원지, 사쓰마
 
 
 「산케이(産經)신문」 구로다 가쓰히로 (黑田勝弘) 서울지사장은 1982년 일본 「교도(共同)통신」 서울특파원 시절부터 筆者와 안면이 있다. 그는 서울특파원 중 최고참이며 우리말과 우리글 구사에 능숙해 한국어로 한국음식 관련 著書까지 내놓은 인물이다.
 
필자가 그를 인터뷰한 것은 그의 고향이 明治維新의 진원지인 가고시마縣(舊사쓰마藩)이며, 그의 言行에서 가끔은 사쓰마 사무라이 같은 느낌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가고시마縣이라면 한국의 道에 해당되는데, 어디가 고향입니까.
 
  『미야자키縣과의 경계지대에 「韓國岳」, 일본말로 「가라쿠니다케」라고 부르는 큰
山이 있죠. 그 韓國岳 바로 아랫마을이 저의 고향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아버지의 직장이 있었던 오사카예요. 태평양 전쟁 말기에 우리 집 식구들이 고향으로 되돌아왔는데, 그 후 저는 고향에서 4, 5년 쯤 살면서 소학교 2학년까지 다녔습니다』
 
  ―고향을 떠난 지가 꽤 오래 되었군요.
 
  『학창 시절에 방학을 맞으면 한 달 정도씩 가고시마에 내려가 지냈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아련한 추억거리가 많습니다. 서울에 사는 가고시마 출신자가 10여 명 되어 가끔 모이는데, 제가 그 모임의 회장입니다』
 
  ―가고시마에 가서 「고구마 燒酒(소주)」를 한번 마셔 보았는데, 술맛이 安東소주처럼 짜릿하더군요.
 
  『고구마를 일본말로 「사쓰마 이모」라고 합니다. 日本에서 고구마 主産地가 사쓰마인데, 그런 사쓰마 고구마를 증류해서 소주를 만들어 왔던 겁니다. 「在서울 사쓰마 향우회」 모임이 있으면 회원들은 으레 사쓰마 고구마 소주를 준비해 와 마십니다』
 
  고구마가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시기는 조선 英祖 40년(1764)이었다. 그때 朝鮮通信使로 일본에 갔던 趙日嚴(조엄)이 고구마 종자를 구해 그 재배법까지 익히고 귀국해 東萊와 제주도에 재배케 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로 고구마 재배에 성공하게 되었다. 
  
  ―사쓰마 고구마 소주 중에는 알코올 도수 40도짜리도 있다더군요.
 
  『우리 사쓰마 향우회원들은 25도짜리 고구마 소주 1홉에 더운 물 2홉의 비율로 섞어서 마십니다』 
  
    密貿易으로 실력 키운 사쓰마藩
  
  ―사쓰마藩은 일본의 중앙에서 보면 가장 멀리 떨어진 변방인데, 어떻게 明治維新의 주체세력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고시마는 活火山 지대여서 지금도 쌀 농사가 잘 되는 지역은 아니지요. 그래서 사쓰마藩은 淸國과의 貿易, 所領이었던 오키나와에서 黑사탕 재배로 돈을 벌어 藩의 재정이 비교적 튼튼했기 때문에 새 시대를 준비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갖추고 있었던 겁니다. 또한, 도쿠가와 막부의 강력한 쇄국정책下에서도 사쓰마藩은 가고시마港을 통해 先進 서양문물과 비교적 빨리 접촉할 수 있었거든요』
 
  壬辰倭亂 때 일본군이 사용하여 조선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준 鐵砲(鳥銃)가 1543년 포르투갈 선원들에 의해 일본에 처음 전래된 곳도 가고시마 앞바다에 떠 있는 種子島(종자도: 다네가시마)였다. 기독교 修道士인 프란시스코 사비에르(1506∼1610)는 일본에 이른바 「南蠻文化」, 즉 서양문물을 전했는데, 그의 첫 日本 상륙지도 가고시마였다.
 
  ―히젠(肥前)藩의 나가사키는 幕府가 유일하게 공인했던 대외무역의 창구였던 반면에 가고시마는 幕府 몰래 密무역을 했습니다. 강력한 幕府體制하에 密貿易이 어떻게 가능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쓰마藩은 원래 사무라이를 수만 명이나 양성하여 군사력이 강했던데다가 幕府가 강력히 통제하기에는 지리적으로 좀 멀었던 거예요. 1587년 규슈를 제압함으로써 日本 전국의 통일을 완성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에도幕府를 창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 둘 모두 사쓰마의 시마즈家의 武力과 세력범위를 인정해 마구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구로다 선생은 임진왜란 때 침략한 일본군 제3軍(1만2000명)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후쿠오카 領主), 1876년 조선정부에 강화도조약을 강요한 일본 측 全權大使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 사쓰마 출신)와 姓氏가 같습니다. 그들과 어떤 관계입니까.
 
  『구로다라는 姓氏의 사람들이 규슈, 그 중에서도 가고시마에 많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나가마사·기요다카 같은 역사인물과 우리 집안 사이에 혈연이 닿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明治維新의 主役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두 사람의 역할은 달랐죠. 메이지 유신 前後 군사적 지도력이 필요했던 시기엔 사이고의 역할이 두드러졌고, 維新정부 출범 이후 근대화 과정에선 오쿠보의 비전과 識見이 리더십을 발휘했지요. 日本史에서는 사이고는 혁명가, 오쿠보는 정치가로 자리매김되어 있습니다』
 
  ―가고시마에 가서 보니 사이고의 인기가 대단하더군요.
 
  『일본 사람들은 역사의 승리자보다 悲運의 패배자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이고는 征韓論爭에 패배한 끝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전하고 자결한 비극적인 인물 아니겠습니까. 반면 오쿠보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10년간 그가 어느 자리에 있든 실질적으로 요즘의 首相 역할을 했습니다.
 
  결국 사이고는 竹馬故友 오쿠보의 손에 의해 거세되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했으니까 가고시마 사람들이 사이고를 존숭하는 나머지 오랫동안 오쿠보를 평가하지 않았어요. 가고시마 시내에 오쿠보 동상이 세워진 것도 불과 2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오쿠보는 나라 만들기에 분투한 絶對主義 관료
  
  ―사이고 다카모리는 어떤 캐릭터의 인물이었습니까.
 
  『사이고는 말의 인간이 아니라 행동의 인간이었습니다. 그와 접촉한 많은 同時代의 사람들이 그에게 빠져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이고는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음식 먹고, 문명의 利器를 누리며 世人의 갈채를 받아야만 바람직한 삶이냐」하며 회의했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사무라이의 소박한 생활방식을 생애의 끝까지 지켰습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대조적이었죠.
 
  『오쿠보는 국민들을 교육하고, 일자리를 늘리고, 밤에는 전깃불을 훤하게 밝히는 근대국가 만들기에 분투한 절대주의 관료였습니다. 자유민권운동에 대해서도 그는 아직은 이르다며 强權으로 눌러 버린 「有司獨裁」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 반대하던 사람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거나 추방당했어요』
 
  ―그런데 삶에 대한 소박한 사상을 지닌 사이고가 왜 征韓論을 들고 나왔을까요.
 
  『사이고가 征韓論者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연구자들도 많습니다. 사이고는 자기가 특명全權대사로 조선에 가기만 하면 조선정부를 설득하여 두 나라 간의 우호관계를 이룰 수 있다고 했던 것이지, 조선을 정복·지배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견해입니다』
 
  사이고에 대해 이다가키 다이스케(坂垣退助)는 「조그마한 자기의 私情을 억제하지 못해 사람을 살상시키고 재물을 낭비했으며 逆賊의 더러운 이름을 후세에 남겼다」고 지적한 바 있다. 征韓論爭에 패배한 사이고가 귀향한 뒤 西南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비판이었다. 이다가키 다이스케도 征韓論에 패해 사이고처럼 下野했지만, 愛國公黨을 설립하여 자유민권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조선왕조의 집권자였던 興宣大院君은 사이고가 특명전권대사로 왔다고 해서 호락호락하게 日本의 修交 요구를 들어줄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러면 양국 간의 전쟁은 불가피해지는 것 아닙니까.
 
  『사이고의 對조선 담판이 결렬되었다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사이고는 협상론자였어요. 만약 사이고의 조선行이 실현되어 협상에 성공했더라면 그 후 양국의 관계사는 크게 달라졌을지 모르죠』 
  
    亂世의 영웅과 治世의 能臣
  
  ―사이고는 武士계급의 폐지로 인해 失職한 사무라이들에게 일거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조선行을 자원했던 것입니다. 사무라이의 일거리가 바로 전쟁 아닙니까. 征韓論爭에서 나타난 사이고와 오쿠보의 路線 중 어느 쪽이 당시 日本의 국가이익에 부합되는 것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이고의 征韓論보다 오쿠보의 內治 優先論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사이고가 오늘의 일본인에게 과대평가된 것 아닐까요.
 
  『어떤 의미에서 사이고는 反근대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고의 사무라이적 품성은 결코 평가절하될 수 없습니다. 자기희생 정신, 검소한 생활태도,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고귀한 정신은 일본인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는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부조리와 비리, 浮薄한 세태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비판의식만으론 새 시대를 열어 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이고는 역사의 非主流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이고는 亂世의 영웅이었지만, 治世의 能臣은 아니었군요.
 
  『사이고는 앙시앵레짐(舊制度)의 파괴자였고, 오쿠보는 근대일본의 건설자였습니다. 明治維新은 두 사람의 역할분담으로 성공했던 것입니다』
 
  ―사쓰마藩과 함께 明治維新을 주도한 조슈藩의 역할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위기의 순간순간에 판단력이 뛰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세력이 큰 사쓰마藩이 조슈藩의 기민한 움직임에 영향을 받은 면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슈藩에는 뒷수습도 못 하면서 일단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운동권적 志士들이 많지 않았습니까. 예컨대 1864년 조슈의 시모노세키港 포대에서 외국선박에 포격을 가했다가 英國 등 4개국 연합함대의 보복공격을 받고 포대가 박살나 굴복했고, 전쟁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上京하여 幕府軍과 전투를 벌이다 패퇴하는 바람에 조슈藩에 대한 幕府의 제2차 征討戰을 불러들이지 않았습니까. 이때 만약 사쓰마藩이 막부군 정토군에서 이탈하여 돕지 않았다면 조슈藩은 패망했을 겁니다.
 
  『조슈藩은 理想的이었고, 사쓰마藩은 現實的이었죠. 두 藩의 기막힌 同盟으로 아직도 强勢였던 幕府를 武力으로 타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쓰마, 지금의 가고시마 사람들의 기질은 어떻습니까.
 
  『가고시마에는 「오토코(男)와 키(議)오 수루나」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걸 한국말로 옮기면 「남자는 변명을 하지 마라」 또는 「남자는 불만을 말로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주라는 의미입니다. 목소리만 높은 論이 아니라 實踐을 중시한 것이죠』
 
  ―明治維新의 주체들은 幕府에 복무했던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新정부의 해군장관으로 발탁했고, 北海道의 하코다테에 웅거하여 독립을 선포하고 明治정부와 전쟁을 벌였던 에노모토 다케아키까지 포용하여 英國대사 등의 요직을 주어 활용했습니다. 人材를 중시했던 明治정부의 人事정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근대화를 강력하게 밀고 나가려면 엘리트 집단이 두텁게 형성되어야하지 않았겠습니까. 당시 일본은 그럴 만큼 人材가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19세기 東아시아의 한국·중국·일본이 모두 민족적 위기상황을 만났는데도 일본만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明治維新은 世界史的 견지에서 매혹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明治維新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明治維新 초기에 정부 주도의 근대화 정책 및 서구화 정책을 지향하는 바람에 옛 전통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농민들이 강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런 농민들까지, 신분이 낮은 사람도 능력에 따라 출세가 가능함을 알고 결국 維新에 적극 참여했던 것입니다.
 
  西南전쟁에서 사이고가 이끈 歷戰의 사무라이軍이 政府軍에게 패배한 것도 新정부에 대한 농민들의 지지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政府軍은 徵兵令에 의해 소집된 농민의 자제들이었습니다. 明治維新이 비록 「위로부터의 혁명」이라 해도 농민들의 이해와 동참이 없었다면 초기에 주저앉고 말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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