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입력 2019.02.25. 14:00
“미국과의 관계정상화 없이는 살아갈 수 있어도 핵 억제력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조선의 현실이다. 관계정상화와 핵문제는 철두철미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가 갈망하는 것이 있다면 조미관계 정상화가 아니라 민족의 안전을 더욱 믿음직하게 지키기 위한 핵억제력을 백방으로 강화하는 것이다.”
북한은 2009년 1월 17일 외무성 대변인 기자문답을 통해 북미관계의 개선보다 핵억제력의 강화를 우선시 하겠다고 처음으로 발표했습니다. 1993년 1차 핵위기 발발 이후 국제사회의 문제로 등장한 자신들의 핵·미사일 개발이 미국과의 대화와 관계개선을 위한 것이라는 ‘대화용’ 가설을 스스로 기각하고 핵보유국으로서 안보를 추구하기위한 것이라는 ‘보유용’ 가설을 확인한 것입니다. 꼭 1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실제로 북한은 이후 미국과의 관계개선 보다는 핵 보유를 위해 두 눈을 꼭 감고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2017년 11월 29일 미국 수도 워싱턴과 경제중심 뉴욕을 핵탄두로 공격할 수 있는 사거리 1만3000km급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 시험발사에 성공한 뒤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습니다
. 그리고 2018년 1월 1일 김정은의 신년사 이후 2차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현재까지 핵을 가진 채로 제재를 벗어나기 위해 국제사회를 상대로 전방위 매력공세(charming offensive)를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그 시원이 된 10년 전, 2009년의 북한 핵정책 변화는 왜 일어났으며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이종주 박사는 지난해 1월 북한대학원대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 ‘북한 핵정책의 변동성 연구 1991~2017’에서 “‘북미관계 정상화를 통한 체제 안전보장’이라는 기존 생존전략의 한계를 인정하고,
더 이상 핵억제력 등 다른 핵심이익을 양보하면서까지 북미관계 개선에 매달리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해석했습니다. 논문을 통해 1991년부터 2008년까지 북한의 핵정책과 2009년 이후의 그것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국제정치학적 용어로 말하면 2009년을 기점으로 북한의 대미 핵정책이 ‘제한적 편승’에서 ‘전면적 내부균형’으로 전환했다는 것입니다.
다소 어려운 국제정치학 용어를 설명하기 전에 2008년과 2009년 당시 한반도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볼까요? 2008년 2월 한국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해 10년 만에 진보에서 보수로 정권이 교체되었습니다.
그해 11월 미국 대선에선 사상 처음으로 흑인인 버락 오마바 민주당 상원의원이 당선되어 2009년 1월 취임했습니다. 역시 8년 만에 공화당에서 민주당의로의 정권교체였습니다. 북한에서는 2008년 8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뇌혈관계 질환으로 쓰러졌다 일어난 뒤 그해 말 3남인 김정은(당시 이름은 김정운)을 3세 세습 지도자로 책봉했습니다
.
그래서 당시 전문가들은 2009년 오바마 정부의 취임을 앞두고 나온 북한 외무성의 강경발언 배경을 △오바마 행정부와의 핵 담판 대결을 앞둔 실력행사 △이명박 정부의 보수적인 대북정책에 대한 경고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의 세습독재자 교체에 따른 내부동요 무마를 위한 대외적 긴장 조성 등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 박사는 앞에 거론되지 않은 다른 흐름에서 답을 찾습니다. 바로 미국 단극체제에서 미중 양극체제로의 변화, 즉 국제체제의 가장 높은 층위인 강대국간의 힘의 비율 변화에서 답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1990년대 초반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체제전환 이후 세상은 미국이라는 유일 초강대국이 이끌어 왔습니다. 그러나 2008년 미국이 세계 경제의 중심인 월가에서 비롯된 경제위기에 빠지고 베이징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중국의 위상이 주요 2개국(G2)으로 높아지면서 미국 단극체제가 미중 양극체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차 핵위기 이후 미국과의 제네바 합의(1994년 10월 21일), 2003년 10월 시작된 2차 핵위기 이후 미국 중국 러시아 한국 일본 등 5개국과의 9·19공동성명(2005년 9월 19일)등에 응하며 미국 단극체제 하에서 핵을 내세우면서도 북미관계 개선을 추구했던 북한이 2009년 이후 북미, 북중관계 악화를 감수하는 핵보유국 지위 추구라는 초강수를 던지고 매진했다고 보는 것이 논문의 주장입니다.
특히 오바마 행정부가 중국의 후진타오 및 시진핑 정부와 경쟁과 협력관계를 형성하는 와중에 ‘북핵공동관리체제’를 굳혀가려 하자 북미중 3각관계 속에서 전략적 중요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핵보유라는 목표를 정하고 밀어 붙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미중 양극체제의 형성은 북한에게는 ‘기회의 얼굴을 한 위협’이었다. 북한에게 불리한 생존조건을 부여한 미국의 단극체제가 약화되고 동맹국인 중국이 부상하는 우호적인 세력균형의 변화이면서, 미중관계의 변동에 따라 북한문제가 좌우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위험한 변화이기도 했다.
북한의 미·중 사이에 전략적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기회와 미·중 모두에게 방기될 수 있는 위협에 동시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국제체제의 변동에 대응하여 북한은 미국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핵정책에서 벗어나 중국의 부상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한편, 북핵 문제에 대한 미·중의 공동관리체제가 고착되는 것을 저지하는 핵정책을 추구해야 했다.
북한은 중국의 부상이 G-2로 인식되기 시작한 2009년을 기점으로 유효성이 낮아진 미국에 대한 ‘제한적 편승’을 중단하고, 핵억제력 강화에 총력을 기울이는 ‘전면적 내부균형’을 선택하였다. 핵억제력을 추구는 국제비확산체제 유지라는 미국의 핵심이익과 한반도 안정이라는 중국의 핵심이익을 동시에 침해함으로써 미·중간 우선순위의 충돌을 일으켜 북핵문제에 대한 미·중 공동 관리체제의 균열을 가져오고, 북한의 대미, 대중 레버리지를 강화한다.”
여기서 편승(bandwagoning)과 균형(balancing)은 국제정치학에서의 신현실주의 주장자인 케네스 월츠 등이 제기한 강대국 국제정치의 양태입니다. 편승은 쉽게 말해 한 국가가 더 강한 국가에 순응함으로써 제기되는 위협을 피하는 것을 말하고 균형은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맞서서 위협에 대응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국내정치에서는 강한 후보자에게 다른 후보들이 모여들어 자리를 얻는 편승이 일반적이지만 세계정부가 부재한 국제정치에서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강대국들이 상대국에 대해 균형을 취하려 노력하는 것이 일반적인 행동양태가 됩니다.
논문에서는 전면적/제한적, 내부/외부 등의 구분에 따라 아래와 같이 여섯 가지 형태가 소개됩니다.
①전면적 편승-위협국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위협국에 동조·순응하는 전략
②제한적 편승-위협국의 요구를 일부만 수용하고 위협국과의 관계에서 의도적으로 갈등을 야기함으로써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편승하고자 하는 전략
③전면적 내부균형-위협국에 대항하여 힘의 균형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군비를 증강하는 전략
④제한적 내부균형-위협국에 대항하여 군비를 증강하되, 힘의 균형이 아니라 위협국과의 협상 등 제한적 목적을 추구하는 전략
⑤전면적 외부균형-위협국에 대항하여 다른 국가와 동맹/협력관계를 구축하고, 냉전기의 미·소 진영 외교와 같이 동맹에 국가의 생존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전략
⑥제한적 외부균형-위협국에 대항하여 다른 국가와 동맹/협력관계를 구축하되, 협력의 범위를 제한하는 전략
북한이 미국 단극체제 하인 1991년부터 2008년까지는 미국에 대해 ‘②제한적 편승’ 전략을 썼지만 미중 양극체제가 출발한 2009년부터 2017년까지는 ‘③전면적 내부균형’ 전략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북한이 2018년부터 전면적 관여(대화) 전략으로 선회한 것은 미중관계의 불확실성이 계속 높아지는 상황에서 비핵화가 핵보유보다 더나은 생존전략이 될 수 있는지 모색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입니다. 북한이 핵을 가진 평화(nuclear peace)를 추구하고 있다는 시각보다는 현 상황을 다소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중요한 것은, 강대국인 미국에 대해 강대국이나 추구할 수 있는 균형 전략, 그것도 전면적 내부 균형 전략을 약소국인 북한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논문은 그래서 북한을 ‘강대국 정체성을 추구하는 약소국가’ ‘정상국가 인정을 위해 투쟁하는 불량국가’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과연 북한의 전략이 성공했는지 아닌지는 이번 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는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우선해 태평양 건너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제거와 기타 핵·미사일 전력의 동결 수준에서 대북 제재를 해제하는 이른바 ‘나쁜 거래(Bad Deal)’를 할 경우 세계사는 그것을 북한의 승리로 기록할 것이요,
미국의 북한 핵개발 저지 외교의 치욕적인 실패로 기록할 것입니다. 미국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라는 목표를 잃지 않고, 세계 비확산 체제와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의 안보 등을 두루 추구하는 협상에 임하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겠습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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