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민족의 기원은 이미 베트남 국내외 학자에 의해 여러 차례 연구되었으며 상당한 가설이 제기된 바 있다. 가설 중에는 베트남인을 현지 원주민 혹은 중국의 광시성(廣西省), 윈난성(雲南省) 지역에서 이주해온 중국인 후손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티베트 지역 또는 태평양 군도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베트남인과 우리의 몸속에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대다수 베트남인 역시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몽골반점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베트남인의 조상은 중국 양쯔강 이남에서부터 오늘날 베트남의 북중부 지역까지 전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역사학자들은 베트남의 역사가 약 3000년에서 4000년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고 있다.
베트남인의 시조는 중국 신화에 나타나는 신농씨(神農氏)의 3대 후손인 띠밍(帝明)의 아들 ‘락롱꾸언(龍君)’이며, 베트남 최초 국가는 락롱꾸언의 아들 ‘훙 브엉(雄王)’이 세운 ‘반랑(文郞)’이다. 따라서 베트남의 모든 왕조와 정권의 시조는 이(李), 진(陳), 호(胡), 여(黎), 막(莫), 정(鄭), 원(阮) 등 중국 성씨(姓氏)를 갖는다. 베트남의 각 왕조, 정권의 시조는 대부분 중국 본토의 지방관리였던 중국인 또는 중국계 이주민으로 이들은 베트남 토착세력을 규합해 왕조와 정권을 창출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베트남인은 중국에서 유입된 이주한인(移住漢人)과 남방의 미개인이라는 뜻의 만이(蠻夷)라 불린 베트남 토착민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주한인과 생계터전을 지키려는 베트남 토착민의 결합은 잦은 중국의 침입에 대항하며 시너지효과를 발휘하여 더욱 굳건해졌고 저항성, 독립성, 반골기질, 자존심이 강한 특유의 민족성을 낳았다.
베트남의 각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한(漢) 무제, 진(晋) 시황제, 오(吳) 손권 등을 거쳐 청(淸)대에 이르기까지 속국으로서 중국에 조공을 바치며 중국의 눈치를 봐야 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베트남을 남국(南國), 중국을 북국(北國)으로 칭하고, 베트남의 군주를 남제(南帝), 즉 남국의 황제라 칭하며 중국의 북제(北帝)와 대비시켜 중국과 대등한 독립왕조임을 주장하였다. 베트남 왕조의 이러한 강한 자존심은 중국에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길들이기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중국의 끊임없는 베트남 자존심 죽이기 전쟁은 오히려 베트남의 민족적 단합과 단결을 강화시키고 민족적 자존심을 고양시키는 작용을 했다. 이는 근세 베트남이 프랑스,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있게 한 밑거름이 됐다.
오늘날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호찌민은 베트남 인민의 힘의 원동력이 민족적 자존심임을 간파하고 이를 프랑스와 벌인 독립전쟁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이용했다. 호찌민은 프랑스와 전쟁, 미국과 전쟁 모두의 명분으로 ‘민족해방’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호찌민은 프랑스 식민시대에는 ‘청년’ ‘월맹(越盟)’, 그리고 미국과 전쟁 당시에는 ‘민족해방전선’이라는 공산주의 단체를 조직, 운영하였지만 민족주의자와 반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을 포섭하고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 자신들을 민족주의 단체로 위장, 공산주의 색채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전쟁의 성격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 이념분쟁이 아닌 민족주의 간 대립으로 몰고 가는 전략을 취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 호찌민이 민족주의자인가 아니면 공산주의자인가 하는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도 바로 사회주의 도입을 위해 베트남인의 민족주의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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