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ㆍ18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를 연출한 장훈 감독은 지난 2015년 독일 언론인 고 위르겐 힌츠페터(Jurgen Hinzpeter, 1937~2016)를 만나 ‘왜 광주에 갔냐’고 물었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힌츠페터 기자의 답은 명확했다. “당연히 가야죠. 그게 기자가 하는 일이니까.”
당시 수많은 한국기자들은 이 당연한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신군부가 그들의 입에 재갈을 물렸기 때문이다. 당시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에 간 힌츠페터와 외신 기자들만이 기록자였다. 광주 시민들의 회고를 담은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이들 ‘푸른 눈의 목격자’가 없었다면 “광주 시민의 억울한 희생과 투쟁은 ‘존재하지조차 않은 사건’이었을지 모른다”고 썼다.
광주에 가장 오래 있었던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군용 트럭과 지프 사이에 고립된 채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부르는 청년들의 모습에서 슬픈 희망이 느껴졌다.”
서독 제1공영방송인 ARD의 동아시아 특파원이었던 힌츠페터는 1980년 5월 20일 광주에 도착했다. ‘광주에 봉기가 났다’는 짧은 뉴스만 듣고 찾아온 현장은 참혹했다. 도시 전체에 계엄군과 ‘괴물 같은’ 탱크가 있었다. 머리에 띠를 두른 채 이들에게 맞서던 시민들의 손엔 막대기나 작은 도끼 따위가 들려있었다. 그들이 힌츠페터에게 처음 건넨 말은 “간밤에 친구들이 총을 맞아 죽었다”는 것이었다.
시민군들은 그를 병원 뒤뜰로 데려갔다. 그들은 친척과 친구들의 관을 열어 보여줬다. 어린 학생의 시신엔 둔기로 머리를 맞은 흔적이 뚜렷했다. 힌츠페터는 눈물을 참으며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당시 현장이 “베트남전을 취재할 때보다 참혹했다”고 회고했다. 힌츠페터는 이틀간 계엄군의 폭력과 시민군의 피해를 취재한 뒤 광주를 빠져나와 필름을 독일 방송국으로 전송한다. 뉴스는 22일 저녁 서독 전역에 방영됐다.
힌츠페터는 23일 다시 광주로 잠입해 5ㆍ18의 참상을 끝까지 기록한다. 이 영상은 ‘기로에 선 한국’ 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방영됐다. 광주항쟁이 끝난 이후에도 다른 지역의 시민들은 한동안 그 처참한 진실을 몰랐다. 그러나 힌츠페터의 다큐멘터리가 대학가에 ‘독일 비디오’라는 이름으로 은밀히 상영되면서 진실의 기록은 이어졌다.
그는 1989년까지 동아시아 특파원으로 남아 지속해서 한국을 취재했다. 1986년 11월에는 광화문에서 시위를 취재하다 사복경찰에 구타를 당해 목과 척추에 중상을 입었다. 당시 부상의 후유증과 심장병으로 은퇴 후 오랫동안 고생하던 힌츠페터는 지난해 1월 세상을 떠났다. 생전 유지대로 그의 모발과 손톱ㆍ유품 일부가 광주 망월동 구묘역(5ㆍ18 묘지)에 묻혔다. 지난 2005년 5월 광주를 방문한 그는 “한국민들은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를 위해 숨진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한국의 천안문사태 같았다” 노먼 소프
월스트리트저널 아시아지부의 기자로 근무하던 미국 기자 노먼 소프 역시 1980년 5월 19일 광주에서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인턴기자인 존 마콤을 먼저 광주로 보냈다. 수도에서 더 큰 일이 터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단은 서울에 머물기로 한 것이다.
20일 광주에 도착한 마콤은 “도시 전체가 무장군인으로 둘러싸여있고 거리에 탱크와 트럭이 가득 찼다”고 전했다. 믿기 어려운 상황에 당황한 소프에게 한 한국 기자가 보도되지 않은 광주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학생들이 손발이 묶인 채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사진이었다. 그는 곧바로 출발해 21일 광주에 도착했다.
소프는 광주기독병원에서 총을 맞은 사상자들과 시신들을 보았다. 광주 시민들은 그를 붙잡고 서툰 영어로 “사람들이 죽어간다”고 외쳤다. 그가 참상을 기록하는 와중에도 병원에는 계속 시신이 도착했다. 소프는 “길에서는 끊임없이 총성이 들려와 짧고 빠른 스타카토 연주를 듣는 것처럼 어지러웠다”고 회고한다.
현장은 총알 외에도 위험 요소가 많았다. 소프는 취재수첩에 취재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 군인들에게 수첩을 빼앗기면 그들이 위험해질 것을 우려해서다. 그는 밤이 되면 계엄군의 저지선을 넘어 인근 도시로 나가 전화로 취재내용을 전달했다. 신군부가 광주를 고립시키려 전 지역의 전화선을 끊었기 때문이다. 밖으로 가는 와중에도 그는 수첩을 뺏기는 것이 두려워 군인들의 눈을 피해 논길 수 십킬로를 걸었다고 한다.
힌츠페터 기자를 추모하기 위해 지난해 5월 광주를 방문했던 소프는 “시민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취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젊은 세대가 민주주의를 꽃피우려던 앞 세대의 희생을 기억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브래들리 마틴
광주사태가 발발한 지 나흘이 지난 21일 이후부터 외신기자들은 하나둘 광주로 모였다, 미국 일간지 ‘볼티모어선’의 기자 브래들리 마틴도 그중 하나였다.
사태가 막바지로 치닫던 26일 광주 시민군들은 전남도청에 외신 기자들을 초대해 기자회견을 연다. 마틴은 여기서 이후 ‘임을 위한 행진곡’의 모티브가 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을 만난다. 마틴은 그에게 “군사 정권은 압도적인 힘을 갖고 있는데 어떻게 대응할 거냐”라고 물었다. 대답은 “끝까지 싸울 것이다”였다. 마틴은 당시 윤상원이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담담했다”고 회고했다. 마틴은 다음날 그의 사망을 보도하는 사진을 찍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다른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마틴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광주 시민들과 소통했다. 시민군들은 그에게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 메시지를 전달해 달라고 했다. 신군부의 무력 진압을 막고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협상을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마틴은 이를 전달했으나 글라이스틴의 대응은 없었다. 그 역시 지난해 5월 힌츠페터의 추모를 위해 광주를 방문해 “당시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용기 있는 시민들이 살았다는 점을 자랑스러워 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위르겐 힌츠페터, 노먼 소프, 브래들리 마틴을 비롯 약 10여명의 기자들이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다. ‘푸른 눈의 목격자’들이 그날의 진실을 기록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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