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신문을 보다가 “와아” 하더니 “울릉도 갑시다” 라고 불쑥 말했다. 갑자기 웬 말이냐 싶어 읽어보니 여행사의 특별 이벤트 상품으로 노동절을 끼고 2박3일의 상품이 나온 것이다. 오래 전부터 울릉도는 가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천리만리(千里萬里)처럼 멀고먼 느낌 때문에 일종의 환상(幻想?)의 섬으로 남아있었는 데에다 미안하게도 신혼여행 이후 둘만의 오붓한 여행은 처음이라 마음 속에서는 설레임의 파랑(波浪)이 점점 거세졌다.
대략적인 여정(旅情)을 간단히 정리해 본다.
4월 29일
4월 30일 아침이다. 비가 조금 내리다 그쳤다.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높아 독도 관광은 어렵다고 한다. 원래의 스케줄대로라면 독도관광커녕 해상관광조차도 할 수 없었을 것인데 어제 미리 하였으니 다행이라고 할까?
울릉도에서 제일 큰 폭포인 봉래폭포(蓬萊瀑布)를 오전에 구경하고 오후에는 육로관광에 나섰다. 25인승 버스로 저동에서 출발하여 서측 해안을 따라 북쪽 천부 항을 거쳐 나리분지까지 일주도로(一周道路)를 달리는 왕복 4시간이 걸리는 코스다.
소식에 의하면 오늘 파도가 높아 포항에서 오던 여객선은 도로 회항하고 묵호 쪽에서는 아예 출항조차 못했다고 한다. 예정에도 없이 발이 묶이는 게 아닌가 싶어 은근히 걱정스럽다.
5월 1일은 자유시간이다. 다행히 어제 출항 못한 여행객들이 아침에 떠났다고 한다. 파도가 잦아들어 우리가 타게 될 여객선은 예정대로
어제 날씨가 나빠 독도관광은 힘들 것이라는 안내를 듣고 미리 독도관광 계획은 접고 성인봉(聖人峯) 등산을 하기로 마음먹었었기에 아쉬움은 잠시 접어두고 울릉도 최고봉인 성인봉을 향해 바쁘게 움직였다. 처음부터 등산계획은 없었기에 등산화 준비가 되지 않아 걱정했으나 두어 곳에서 꽤 경사가 급한 곳이 있었을 뿐으로 생각보다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도 3시간이 좀 못되어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기이하게도 등반 길의 골짜기 곳곳에 아직도 녹지 않은 눈이 많이 있다. 눈을 뭉쳐 손에 쥐고 산에 오르니 손이 시리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여 손바닥에 얼음주머니를 놓고 다니는 것 같다.
정상은 너무 좁아서 그저 증명사진 찍기에 급급한데다 출항 시간에 맞추기 위해 서두르다 보니 찬찬히 사방을 관찰할 여유가 없이 바삐 하산해야 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게다가 성인봉(984M) 주변에는 비슷한 높이의 연봉(967, 900M등)이 여럿 있고 흐릿한 날씨까지 겹쳐 전망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장하다! 무려 100만 평방Km의 광대한 동해(東海)의 중심에서도 최정상(最頂上)에 선 것이 아닌가?
등산을 마치고 이미 첵크아웃했던 여관에 부탁하여 샤워를 하고 나니 배와 차와 발로 하는 세가지 관광을 다 해보았다는 흐뭇함과 함께 기분 좋은 피로감이 느껴진다. 출항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어제의 걱정은 뒤로하고
2. 울릉도의 자연
울릉도는 우리나라에서 7번째로 큰 섬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두 번째로 큰 섬이 된 셈이다. 왜냐하면 제주도 외에는 모두 연륙(連陸)되어 온전한 섬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울릉도가 자랑하는 특색은 뱀이 없고, 공해가 없고, 도둑이 없다는 3무(無)와 바람, 물, 돌, 향나무, 미인이 많다는 5다(多)를 꼽는데 그 중에서 미인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 과연 그러할지는 모르겠으되 피부미인을 들어 말한다면 누구라도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그렇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물이 좋아서 그렇다고 한다. 섬치고 물이 풍족한 섬은 울릉도를 첫손에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화산암 속에서 용출되는 봉래폭포의 물을 그대로 정수해서 상수원으로 사용하는데 천연암반수가 따로 없다. 여자들은 물이 좋다고 목욕을 몇 번씩이나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화산폭발로 생성된 섬이기 때문에 지형(地形)에 급경사가 많고 암산(岩山)이 많아 토지이용률이 대단히 낮다. 대체적으로 농경지와 대지가 20%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산지, 임야로서 농업에 불리하다. 주거용 대지는 산지와 산지 사이의 좁은 공간에 집중됨으로써 인구는 적지만 인구밀도(密度)는 높을 수 밖에 없다.
마을과 마을 사이의 도로도 직선도로가 거의 없이 가까운 곳도 소라처럼 빙글빙글 곡예 하듯 돌아가야 하므로 큰 도로를 내는 것 자체가 대단한 역사(役事)다. 바로 해안을 따라 도로를 닦은 곳이 많아 연방 버스차창으로 파도가 때려 낸 물거품이 쳐올라 튀기는가 하면 암산을 돌고 돌며 걸걸거리며 올라가다 내려다보면 어느 사이엔가 올라온 길이 까마득한 저 아래에서 대룡(大龍)이 용트림하며 치받아 올라오는 듯하다.
농업은 거의 나물과 약초에 의존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채취에 의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체계적인 영농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원 고갈(枯渴)이 빨리 올 수도 있을 것 같다.
동해의 어업전진기지라고 하나 부두에 나가보니 어물(魚物)이 그다지 풍족하게 보이지 않는다. 오징어, 꽁치, 명태가 많다고 들었지만 해삼, 멍게 등 외에는 다른 어물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근해에서의 어족자원이 감소했는지 제 철이 아니어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동해 바다 가운데에서 조금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식사 때도 나물이 주종이었다.
재정자립도가 18%에 불과하다고 하니 울릉도의 산업 자체가 취약한 것이다. 관광산업도 일주도로가 완공되고 나서 비로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니 관광자원을 어떻게 개발하느냐에 따라서 점차 나아질 듯한데 문제는 접근성(接近性)이다. 약간의 파도에도 출항이 걱정되어서야 안정적인 관광산업이 이루어 질 리가 만무하다.
다른 중요한 사업이 많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일차적(一次的)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어지간한 날씨에도 정기적인 운항이 담보(擔保)될 수 있는 방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반드시 그래야만 관광산업이 크게 활성화될 것이고 장기적이고 다양한 관광전략을 계획할 수 있을 것 같다.
울릉도에서 감탄한 것은 첫째로 일주도로와 항만공사 등의 기반시설공사가 상당히 진척되었다는 것이다. 동해 먼 바다 위에서 험악한 산지를 뚫는 건설공사는 참으로 대단한 역사다. 공사자재와 기계장비를 내륙에서 운반해 오는 것조차도 당시의 우리의 건설능력으로는 큰일이었다고 한다.
저동항 같은 경우는 계획부터 완공까지 15년이 걸렸다고 한다. 1962년에 당시
둘째로 섬인데도 불구하고 물이 풍부할뿐더러 자연수 그대로 식수로 삼아도 될 정도로 깨끗하다는 것이다. 봉래폭포에서 흘러 내리는 물을 수원으로 삼아 그대로 침전시켜 정수하여 상수원(上水源)으로서 공급하고 있는데 수량도 풍부할뿐더러 수질이 천연생수 같다.
셋째로는 작은 섬에서는 보기 드물게 삼림이 형성된 산지가 많다. 이만한 섬에서 이렇게 목재로 쓸 수 있을 만한 삼림이 있는 곳은 거의 없을 것 같다. 혹시 간과(看過)한 다른 문제점이 있을 지는 모르겠으나 수종(樹種)을 잘 선택하면 풍부한 삼림자원을 형성하여 목재산업에 기여할 수 있을 것 같다.
주마간산(走馬看山)이지만 해양자원, 관광자원, 삼림자원을 잘 계획하여 발전시키면 울릉도의 발전은 보다 비약적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3. 울릉도 연대기
그런데 울릉도에 오니 자연히 독도에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은 했어도 막상 독도에 관해서 안다는 것이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가사 정도에서 거기서 거기뿐이라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이왕에 두 밤을 동해 바다 한 가운데에서 보낸 만큼 이 기회에 대충이라도 좋으니 한번 독도에 관해서 성찰(省察)해 보기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독도만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는 없다. 울릉도와 독도는 바늘과 실처럼 연관된 것으로서 독도만을 따로 생각할 수도 없고 또 울릉도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보나마나 노른자위 없는 계란 꼴이 되므로 자연히 울릉도의 역사는 바로 독도사(獨島史)가 되는 것이다.
지석묘, 무문토기 등의 유물에 의하면 울릉도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000년 이후라고 한다.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의 246년(고구려 동천왕 20년)의 기사에서 동해안의 섬이 언급되는데 아마도 울릉도를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가장 확실하게 문헌에 나타나는 것은 512년(신라 지증왕 13년)에 신라 하슬라주(何瑟羅州;현재의 강릉지역)를 통치하던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하였다는 기사로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는 이사부가 사자 형상의 모형으로 섬의 주민을 위협하여 항복을 받았다고 한다. 사자 형상의 모형이란 것은 아마 섬사람이 보지 못했던 큰 전선(戰船)의 선두(船頭)에 장식한 장식물을 얘기하는 것이었을까?
1157년 고려 의종과 1243년 고려 고종 때 섬으로 주민을 이주시키려 하였으나 거주가 어렵고 도해(渡海) 중에 익사자가 많아 중단한다.
1273년(원종 14년)에 원나라가 대목(大木)을 요구하여 울릉도에서 벌목을 하려고 하였으나 곧 중지하였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울릉도에 큰 삼림(森林)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1417년(조선 태종 17년)에
1432년(세종 14년)에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를 편찬하였는데 여기에 독도로 추측되는 기사가 나온다. [우산, 무릉 두 섬이 정동쪽 바다에 있는데 두 섬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볼 수 있다]
1438년(세종 20년)에 주민 66명을 육지로 데려 옴으로써 공도(空島)정책을 완료하였으나 이는 실로 잘못된 정책으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451년(문종 1년)의 고려사지리지(高麗史地理志), 1481년(성종 12년)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도 신찬팔도지리지의 기사와 유사한 내용으로 독도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다.
한편 울릉도를 침입한 외적(外敵)에 대한 기록으로서는 1018년(고려 현종 9년)의 여진족의 침입, 1379년(고려 우왕 5년)과 1417년(태종 17년)에 왜구의 약탈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은 왜구의 약탈을 통해서 울릉도의 존재를 알고 조선과의 교류 문호(門戶)인 대마도 번주(藩主)를 통하여 1407년(태종 7년), 1614년(광해 6년)에 울릉도 거주를 요청하였으나 조선은 불가하다고 거부한다.
울릉도와 독도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영토 귀속문제가 벌어진 것은 어부
1693년(숙종 19년) 동래와 울산의 어부 40여명이 울릉도에서 일본 어부들과 충돌하였는데 이때
그러나 대마 번주는
1696년(숙종 22년) 에도막부가 일본인의 울릉도 도항금지를 결정하였으나 일본어부가 계속 들어와 어로(漁撈)를 하자
다음해 1697년에는 대마도 번주가 에도막부의 명으로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것을 인정하고 일본인의 출입을 금하였음을 알리는 사신을 보낸다.
한편 조선 조정에서는
1775년(영조 51년) 나카쿠보세키스이(長久保赤水)의 일본여지노정전도(日本與地路程全圖)와 1785년(정조 9년)의 일본의 하야시시헤이(林子平)의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地圖), 1869년 일본외무성의 사다하쿠보우(佐田白芽)의 [죽도와 송도가 조선에 속한 경위 보고서], 1875년, 1876년의 두 해에 발행한 일본 육군과 해군의 [조선전도]와 [조선동해안도]와 같은 자료를 보면 독도가 조선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로도 일본 내부적으로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1883년(고종20년)에 와서야 1438년(세종20년)부터 시행해왔던 공도정책을 폐지하였고 이 해에 울릉도로 첫 이주민 16호 54명이 들어오게 된다.
1900년(대한제국 광무 4년)에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하고 울도군수의 관할구역을 울릉도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로 하였다.
1904년 일본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러시아함대를 감시하기 위해 울릉도에 망루(望樓)를 설치하고 독도에도 망루 설치가 가능한지를 조사한다. 아마도 이때부터 일본은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려는 속셈을 가지게 되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같은 해 1904년 일본 어민이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하고 자신에게 할양해달라는 청원을 한 것을 기화로 1905년에 열린 일본 각의에서 [독도는 무주지(無主地)로서 다케시마(竹島)로 칭하고 시마네현 오키섬(島根縣隱岐島)의 관할 아래에 둔다]고 일방적으로 결정하였다. 이 해 일본은 독도에 망루를 준공했다.
1946년 연합군사령부 지령(SCAPIN) 677호의 [주변지역을 정치 행정 상 일본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에 관한 각서]와 SCAPIN 1033호의 [일본의 어업, 포경업의 허가구역에 관한 각서(=맥아더라인)]에서 독도를 일본의 영토에서 제외하였다.
그러나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된 [대일본강화조약]에서 [일본이 포기하는 조선에 대한 권리]에서 독도를 명시하지 않아 분쟁의 여지가 생긴다.
한국전쟁의 혼란기에 일본 어선들이 맥아더라인을 무단 침범하는 것이 급증하여 한국 어민들과 어로분쟁(漁撈紛爭)이 잦아지자 1952년
1953부터 1954년에 걸쳐 독도영유권에 대한 긴장의 파고(波高)가 높아져 왔는데 일본은 일본 관리의 독도 상륙과 게시판 설치, 순시선(巡視船)의 접근, 국제사법재판소 회부 제의 등으로 영토 주장을 하였고 한국은 새로운 표지판 설치, 일본 순시선에 대한 경고포격, 등대 개설, 독도우표 발행 등으로 강경(强硬)하게 대응하였다.
이후 독도에 대한 한국의 기본입장은 언제나 [한국의 독도영유권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일본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가진 것처럼 호도(糊塗)하여 존재하지도 않은 영토분쟁을 일으켜 일시적일지라도 한국과 대등한 입지에 서려는 술책을 쓰고 있을 뿐이다.]라는 것이었고 그 입장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일본 역시 매년 독도의 영유권을 어떠한 형식으로든 공식적으로 주장해왔다.
이러한 양측의 팽팽한 입장은 한일기본협정과 배타적경제수역(EEZ;exclusive economic zone)을 협의, 적용하는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고 그런 가운데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토 주장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노골화(露骨化)되고 있는 것이다.
4. 독도는 조선의 국토다
영토란 한 국가의 통치력이 절대적이고 배타적으로 미치는 범위를 말한다.
소유권의 대상으로 보아 국가가 사고 팔 수도 있다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배타적인 권리 만을 행사하는 권한을 가질 뿐이다 라는 설도 있으나 두 가지가 다 포함되는 것 같다.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첫째, 그 땅의 최초 발견자와 그에 따른 거주자가 존재해야 하고 둘째, 거주자가 권리를 주장할 근거 자료가 있어야 하며 셋째, 그 땅을 지배하는 통치체제가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소위 실효적(實效的) 지배를 계속하여야 한다.
간단한 예로 주택을 짓거나 사는 행위가 있고 그 주택에 대한 소유권을 증명할 등기서류와 같은 것이 갖추어져야 할 것이고 실제로 살고 있거나 혹은 빌려주더라도 지속적으로 관리권을 행사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방치(放置)하여 장기간 평온하고 공연한 점유가 지속되면 소유권을 잃을 위험이 생길 수 있다.
물론 침략으로 인한 영토확장은 이와 다른 비상(非常)한 문제로서 접근방법이 다르다.
독도에 관해서는 세 번째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고 첫째와 두 번째가 과제로 된다.
사실 울릉도의 역사를 볼 때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가 과연 무엇인지 어리둥절해진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저들의 주장이 명백한 억지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이 한국에 속한다는 주장을 증거하는 자료는 많기 때문에 여기서는 일본이 주장하는 자료에 대해서 따져보기로 한다.
대체로 일본의 주장은 첫째, 기록에서 볼 때 한국은 독도의 존재를 몰랐거나 알고 있었다 하여도 영토 인식이 없었지만 일본은 일본인이 먼저 독도를 발견하고 지배했다는 자료와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조선과 울릉도 및 독도의 영토귀속문제가 벌어졌을 때 울릉도의 영유권은 인정했으나 독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 따라서 시마네현의 독도 편입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고 또 한국측의 항의도 없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이다. 넷째 연합군사령부의 일본영토조항과 맥아더라인은 영토의 경계를 확정 지은 것이 아니고 단순한 행정적인 조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자료로서 들고 있는 것은 몇 가지에 불과할뿐더러 그조차도 대체로 자의적(恣意的) 해석에서 비롯된다.
(1)독도에 대한 근거를 찾을 때 각종 사료(史料)와 고지도(古地圖)가 동원된다. 당연히 한국에서 제시하는 사료는 많다. 일본이 주장할 때 동원되는 자료는 대부분 같은 자료를 가지고 한국과 해석을 달리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사료상으로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울릉도와 독도의 명칭이다.
당연하겠지만 우산국(于山國)은 울릉도와 부속도서(附屬島嶼) 전체를 포함해서 일컫는다고 보아야 하지만 우산국이 정벌된 이후 울릉도를 지칭하는 말은 우릉도(芋陵島), 무릉도(武陵島, 茂陵島), 울릉도(鬱陵島)로 바뀌어 왔다. 때로 죽도(竹島)라고도 하였으나 이는 주로 일본측에서 불렀던 명칭이다.
독도를 지칭하는 이름은 a. 1417년(태종 17년), 1432년(세종 14년), 1451년(문종 1년) 등의 기사에 우산 무릉(于山武陵 또는 牛山 武陵)으로 병기(倂記)되어 두 개의 섬을 함께 지칭하는 기사가 나온다. 여기에서 유추(類推)하면 우산이 독도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b. 1696년(숙종 22년)에
그런데 1436년(세종 18년)의 기사에는 강원도 감사가 무릉도우산(武陵島牛山)에 마을을 만들자는 건의를 하고 있는데 이 경우의 우산은 울릉도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하니 헷갈린다.
이렇게 독도를 지칭하는 이름은 분명하지 않은 것은 혹 무인도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를 기화로 일본이 견강부회(牽强附會)하고 있는 것이다.
팔도총도
일본에서 문제삼는 것은 1530년에 제작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팔도총도(八道總圖) 이다. 이 지도에서 우산도의 오른쪽에 면적이 비슷한 울릉도가 그려져 있어 이를 두고 어째서 독도가 울릉도 서쪽에 있느냐, 두 섬의 크기가 어째서 같게 그려져 있느냐 라는 의문을 제시하고 이 지도로 미루어 보아 당시 조선은 독도의 존재를 몰랐을 것이다 라고 일본은 주장한다.
그러나 실측(實測)이 병행되지 않은 고지도(古地圖)에서 단순히 그려진 크기 만으로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다만 우산도가 서쪽에 그려진 것은 기이(奇異)한 것이다. 그렇지만 울릉도는 처음부터 우산국으로 불려진 것에 주목(注目)해야 한다.
생각컨대 우산국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울릉도 제도(諸島)를 통칭(通稱)하는 명칭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울릉도 주변의 섬들 즉 현재의 관음도, 죽도와 함께 독도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 우산국이고 그에 따라 울릉도를 지칭할 때 크기에 관계없이 개념적, 관습적으로[우산]을 앞세웠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결과 우산도와 울릉도를 병기하여 기술할 때 우산의 명칭이 앞세워진 것이 아닐까 한다. 사실 우산도 만으로 울릉도를 지칭하는 것은 1417년(태종 17년)의 기사에서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지도를 그릴 때 [우산]을 대표성으로 생각했던 관습적인 착오로 명칭을 명기할 때 순서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착오(?)를 들어 일본은 독도가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삼지만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가 정상적인 크기와 위치로 그려진 다른 모든 지도에 대해서는 독도가 아닌 현재의 죽도를 표시한 것이라고 하거나 착오나 혼동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독도가 그려지지 않은 지도에 대해서는 한국이 독도의 존재를 몰라서 표시하지 않았다고 억지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하고 있다.
고지도에서 독도가 명시되지 않았다고 한국이 영토권을 포기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도에 나타나지 않은 모든 지역이 다 그러한가? 만약 한 지역의 정밀도에서 빠졌다면 그런 주장도 일고의 가치는 있겠지만 일반적인 지리지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궤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명칭과 크기에 관계없이 [두 개의 섬이 확실하고 명백하게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2)1432년의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 1451년의 고려사지리지, 1481년의 동국여지승람과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우산 무릉 두 섬이 정동쪽 바다에 있는데 두 섬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于山武陵二島在縣正東海中二道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은 이 두 섬이 울릉도와 죽도(현재 바로 울릉도 곁에 있는 섬)를 가리킨다고 하며 그 예증(例證)으로 오키나와의 최남단에 있는 요나쿠니(与那國)섬과 대만의 거리가 111키로 떨어져 있어 일년에 3-4회 밖에 육안으로 볼 수 없을 뿐인데 대만보다 월등히 작으면서도 87키로나 떨어져 있는 독도를 어떻게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날씨가 좋은 날 울릉도 도동항의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에 오르면 독도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더욱이 4-5백 년 전의 시야거리(視野距離)가 현재보다 더 낫다고 생각함이 상식적이 아닐까? 며칠 전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2007년 겨울에 전문 사진가에 의뢰하여 울릉도에서 독도를 찍은 사진을 공개하였는데 독도를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유람선으로 울릉도를 돌면서 죽도를 보니 이 섬은 울릉도와 너무 가까워 밤에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죽도와 울릉도를 가지고 두 섬이 날이 맑으면 보인다는 등의 기록을 했다면 이것은 조선의 관리들이 희극 대본을 쓴 것이란 말인가?
(3)일본이 독도를 일본의 영역으로 인식했다는 증거로 자랑스럽게 내놓는 자료 중의 하나가 1667년 송강(松江;시마네 반도의 입구)의 번사(藩士;번주[藩主]에게 봉사하는 사무라이)인 사이토오(齊藤豊仙)가 번주의 명을 받아 오키섬(隱岐島)의 실태를 조사 보고한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다.
[은주는 북해의 가운데 있고 오키시마(隱岐島)라고 부른다. 이로부터 남으로는 운주 미호칸까지 35리, 남동으로 박주 적기포까지 40리, 남서로는 석주의 온센진까지 58리다. 북동으로는 갈 수 있는 땅이 없다. 북서쪽으로 이틀 한밤을 가면 송도(=독도를 말한다)가 있다. 다시 하루를 가면 죽도(=울릉도를 말한다)에 이른다. 흔히 기죽도라 말하고 대나무, 생선, 강치가 많다. 이 두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여기서)고려를 보는 것은 운주(미호칸-사이토오가 있는 송강 근처)에서 은주(오키 섬)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일본의 북서 땅은 이 땅으로서 한계로 삼는다.]
[隱州在北海中故云隱岐島從是 南至雲州美穗關三十五里 辰巳至泊州赤碕浦四十里 未申至石州溫泉津五十八里 自子至卯無可往地 戌亥間行二日一夜有松島又一日程有竹島俗言磯竹島多竹魚海鹿 此二島無人之地 見高麗如自雲州望隱州 然則日本之乾地 以此州爲限矣]
오키 섬 주변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오키 섬을 기준으로 남으로는 미호칸(美保關;시마네[島根]반도 끝) 항구, 남동으로는 돗토리(鳥取)의 아카자키(赤碕;요나고[米子]와 구리요시[倉吉]의 중간쯤), 남서로는 사마네현의 온센진(溫泉津;고스[江津]과 이즈모[出雲]의 중간쯤)에서부터 오키 섬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말하고 오키 섬의 북으로는 바다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바다 멀리 섬이 있는데 그 섬에서 조선 땅을 보는 것은 미호칸에서 오키 섬을 보는 것과 같으니 [이 땅=오키 섬]이 일본 북서쪽 땅의 끝이 된다는 것이다.
일본은 억지 해석하기를 오키 섬을 기준점으로 하여 사방으로 일본 땅의 영역을 표시한 것이라고 한다. 즉 북쪽으로는 죽도를 포함하여 일본 땅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그럴싸하지만 이것은 오직 오키 섬의 위치를 분명히 한 것에 불과하다. 남쪽의 육지까지 어느 정도의 거리에 있는지를 말하고 북쪽으로는 바다뿐이고 그 바다 너머에는 송도와 죽도가 있다 라는 것을 말한 것뿐이다.
결국 마지막 구절의 이 땅(此州)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를 가지고 논란을 벌이자는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사이토오가 울릉도와 독도까지 일본 땅으로 인식하였다고 한다면 이섬(此島)라고 하였을 것이다. 사이토오는 오키 섬의 북단에 서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일본 땅의 북쪽 한계는 오키 섬이구나 라고 생각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이땅(此州)을 오키섬(=隱州)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섬(=울릉도)에서 고려를 보는 것과 오키 섬에서 육지를 보는 것이 같다는 설명을 부연(敷衍)한 것은 오키 섬의 위치관계를 분명하게 보여 주려는 참조적(參照的) 설명인 것이다.
따라서 이 문서는 오히려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에 속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주고 있다.
(4)일본이 최초로 독도를 실효 지배하였다고 주장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는 사건이 17세기 초에 발생한다!!
17세기 초에 호오키코쿠(伯耆國=돗토리[鳥取])의 요나코(米子)의 어부인 오오타니(大谷甚吉)가 어느 날 폭풍우로 인해 울릉도에 표류한다. 그는 조선의 공도정책(空島政策)으로 비어있는 울릉도를 보고는 새로운 섬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귀항(歸港)한 후에 동료인 무라가와(村川市兵衛)와 함께 에도막부에 죽도(=울릉도)도항허가(竹島渡航許可)를 청원하여 1616년에 허가를 받게 된다. 이들 두 집안은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서 강치잡이, 전복채취와 벌목 등으로 울릉도를 독점 경영하기를 78년간 계속했다. 이때 이들은 독도를 중간 중계지(中繼地)로 활용하였다. 에도막부는 1656년 이들에게 별도로 송도(=독도)도항허가를 내주었다.
독도의 영유권 문제에 있어서 사실 역사적으로 이때가 가장 위험했던 시기로서 만약 이들이 어업만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으면 어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오싹하는 느낌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을 지경이다.
아마도 지금쯤에는 완전히 일본 땅이 되었거나 팔레스타인처럼 얼키설키 풀기 어려운 분쟁지가 되어 언제 터질지 모를 화약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과거 제국주의(帝國主義)가 난무하던 때의 일본제국이라면 울릉도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고 일본인을 대량 이주시켜 자신들의 땅으로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일본은 왜 울릉도로 이주(移住)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당시의 일본정부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에 속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일본이 독도를 처음 발견한 것은 일본인이라는 듯이 강변(强辯)하지만 조선이든 일본이든 동해 상의 두 섬에 대해서는 훨씬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바로서 왜구들이 울릉도에 약탈을 하러 드나들었다는 것은 기록에 있다.
울릉도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해서 조선 땅이 아니라고 일본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 증거로 대마도번주(對馬島藩主)가 1417년(태종 17년)과 1614년(광해 6년)에 울릉도에 거주하기를 청하였으나 조선에서 거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조선이 비록 공도정책은 실시하였으나 정기적으로 관리(官吏)를 보내어 울릉도의 현황을 살피고 관리해왔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이 을릉도 근해에 침입하여 조업은 하였을망정 울릉도에의 무단이주는 꿈도 꾸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과장되게 해석하자면 조선의 해역(海域)으로 불법어로(不法漁撈)를 하러 간다는 의식이 저변(底邊)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정부는 일본어부들이 마음대로 울릉도 근해에서 조업을 하지 못하게 하고 다만 허가를 청원한 어민 두 사람에게만 독점적인 어업권을 주고 조업하게 한 것이다 라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 된다.
(5)조선이 공도정책을 실행하고 있는 동안 일본 어민은 울릉도 근해에서 제멋대로 조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의 어민
1693년 3월 동래와 울산어부 40여명이 울릉도에서 일본어부와 충돌하게 되었다. 총으로 무장한 일본어부의 위협으로 조선어부들은 섬으로 달아났으나
이로 미루어 보건대
1696년(숙종 22년 1월)에 에도막부는 일본인의 울릉도도항금지를 결정한다. 그런데 여름에
1697년 1월에 대마도 번주를 통해 에도막부는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재차 확인하고 일본인의 출입을 금하였다고 조선 조정에 보고함으로써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싼 영토귀속문제는 매듭이 지어졌다.
(6)그런데 일본에서는 오오타니의 울릉도경영과
그러나 조선은 울릉도를 칭할 때는 그 부속도서를 함께 지칭하는 것으로 표현해왔다. 울릉도, 무릉도, 우릉도는 모두 울릉도와 부속도서를 포함한다. 독도를 따로 떼어서 표현할 때는 주로 우산도를 표기한다. 병칭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우산울릉, 우산무릉으로 표현하였다. 그것은 일본도 마찬가지로서 조선의 그런 표현을 양해(諒解)하고 있었다. 조선과 일본은 묵시적으로 울릉도는 그 부속도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이 독도를 따로 떼어서 표현한 것은 송도도항허가를 내어줄 때뿐이었고 그것도 죽도도항허가를 내어주고 나서 40년이나 지난 때이다. 아마 이 때쯤에 와서야 독도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는지도 모르나 그조차도
주지(周知)해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7)일본이 자기 스스로 독도가 조선에 속한다고 인정한 것은 1875년에 일본육군이 작성한 조선전도, 1876년 일본해군이 작성한 조선동해안도, 일본정부에서 독도가 조선에 속한다고 판정한 지령문 등 허다(許多)하지만 그 중에서도 일본이 가장 뼈 아프게 느끼는 것이 1869년에 일본 외무성 관리 사다하쿠보(佐田白芽) 등 수 명을 조선에 밀파하여 1870년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로 되어 있는 사유]를 조사한 내용을 실어 복명(復命)한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이다.
여기에서 독도가 조선영토임을 명백히 하였기 때문에 골치가 아파진 일본은 자가당착적(自家撞着的)인 모순(矛盾)을 해명하기 위해 서양지도가 울릉도를 중복 표시한 것을 인용하게 되어 발생한 오류라는 등 상식적으로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여튼 정치적, 군사적 목적을 위해서 일본이 멋대로 조사하여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힘든 몇 가지 지도나 문서를 제외하고는 일본인이 만든 자료로서 독도는 일본령이다 라고 명기한 자료는 1905년 이전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8)1904년 일본이 러시아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나서 일본은 러시아함대의 동향을 감시하기 위하여 울릉도에 망루(望樓)를 설치하면서 독도에도 망루를 설치할 수 있는지 조사하게 된다. 아마도 이때부터 군사적 목적으로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할 근거를 찾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일본은 역사적 자료를 검토하던 중 지금까지 조선과 일본간에 주고 받았던 울릉도 귀속문제에 관한 각종 자료에서 독도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명시된 바가 없다는 것에 주목을 하게 되고 이 틈새를 이용하기로 하였을 것이다. 비록 울릉도는 울릉도+부속도서를 의미하고 있음을 알지만 외면적으로는 울릉도만 명시되어있다는 것에 주목하였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점유하기는 곤란하였을 것이다. 울릉도라 하면 독도는 당연히 부속도서로서 따라오게 된다. 해저지형(海底地形)으로 보아도 그러하다. 울릉분지(=쓰시마분지)의 연봉(連峰)에 해당하는 것이 울릉도와 독도이다. 예컨데 백두산이 해저에 잠긴 것을 가정할 때 병사봉, 향도봉, 백운봉 등 주변 연봉이 물위에 솟아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오키 섬은 거리도 멀뿐더러 지형적으로 전혀 다른 위치에 있으니 걸고 넘어 갈 것이 없다.
때마침(?) 일본 어민이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하여 자신에게 어업권을 달라”는 청원을 하자 이를 기화로 1905년 일본 각의에서 “독도는 무주지(無主地)로서 다케시마로 칭하며 시마네현의 관할로 한다”고 결의하고 시마네현 고시 40호로 무주지 선점(先占)이라는 요건을 충족시켰다고 하면서 독도를 무단 편입시켰다. 그런데 그 고시는 고시되었는지도 불분명할뿐더러 회람용(回覽用)에 불과한 문서였다.
또한 어째서 예전부터 자기네들이 독도를 지칭하여 부르던 마쯔시마(松島)는 팽개쳐 버리고 다케시마(竹島)를 썼을까? 아마 마츠시마라고 불러 오다가 무주지(無主地)라고 하면서 슬쩍 하려니 낯 간지러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케시마라고 부르게 되었는가?
일본은 시마네현 고시에 관련하여 조선은 독도를 전혀 실효 지배한 적이 없다거나 독도의 일본편입에 대하여 항의하지도 않았다고 변명하지만 조선이 실효 지배한 일이 없다는 주장은 얘기 거리도 되지않고 역사적으로도 일본측의 이의(異議)도 없었다.
다만 대한제국이 독도의 편입에 대하여 항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독도의 일본편입은 몰래 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모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905년 2월에 시마네현고시40호를 고시했다고 하지만 이는 그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이해 8월에는 독도에 망루가 준공되고 11월에는 제2차 한일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완전히 박탈당하였고 이어 1906년 2월에는 일본통감부(統監府)가 대한제국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는 등 대한제국의 생명이 끊어져 가는 와중(渦中)인 1906년 3월말 경에 시마네현과 오키섬의 관리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군수 심흥택에게 독도가 일본영토로 편입되었으므로 현지 시찰(視察)차 왔다고 하니 심흥택이 기절할 듯 놀라 “본군소속 독도(本郡所屬獨島)가---“로 시작하는 긴급보고를 올렸다.
이 보고를 접한 참정대신 박제순은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니 독도의 형편과 일본인의 동향을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명령한다. 이후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울릉군을 이관시키는 등 국권을 잃은 상태에서도 여전히 독도의 관리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일본이 시마네현 고시를 빌미로 일본의 실효적 지배권을 운운한다는 것은 소매치기 꾼이 법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9)1946년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한 후 연합국최고사령부지령(SCAPIN)677호는 정치, 행정상 일본에서 분리시켜야 할 영토로 한국의 독도를 명시했다. 또 통칭 맥아더라인이라고 부르는 일본의 어업과 포경업(捕鯨業)의 허가구역을 제한하는 구역을 설정하였는데 여기에 독도가 허가구역에서 빠짐으로써 일본의 영역이 아님을 명백히 하였다.
그런데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된 대일본강화조약에서는 ‘일본이 포기하는 영토’ 규정에 한국과 그 부속도서(附屬島嶼)로서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는 명기하였으나 독도가 빠짐으로서 분쟁의 소지를 만들게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미국측이 강화조약 6차 초안(草案)에서부터 독도에 관하여 애매하게 규정을 하였던 결과였다.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규정이 빠지게 된 것은 맥아더사령부의 정치고문 시볼드(Sebald)와 워싱턴의 일본담당 버터워스(Butterworth) 국무차관보의 애매한 농간때문으로 추측되는 것으로 이들이 독도의 영유권은 일본에 있다는 것으로 간주(看做)하려고 하였음을 두 사람 사이에서 오고 간 문서에 보이고 있다.
확실치는 않으나 혹시 전후(戰後) 일본의 장래를 위한 일본의 외교적 노력과 아시아로 향하는 미국의 진출기지로서의 일본의 향후 역할을 기대한 지일파(知日派)의 입김이 서로 섞여 입맞춤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결과적으로 독도의 영토귀속에 관하여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게 됨으로써 독도를 일본 영토화하려고 그 동안 진행하여 왔던 일본의 노력이 패전으로 수포화(水泡化)할 위기를 벗어나 여전히 현재진행형(現在進行形)을 유지하게끔 하는 성과를 보게 된 셈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연합군 지령과 맥아더라인에 대해서는 단순히 군사적 임시 조치일 뿐이므로 이것으로는 영토귀속을 확정한 것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대일강화조약에 대해서는 연합국이 독도가 일본의 영토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라고 하며 증거로 내세운다. 이것은 일관성 없는 태도로서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을 취하려는 여우 짓에 다름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독도에 대하여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던 연합국은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실제 나타난 결과는 독도를 애매한 위치에 놓이게 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결국 정치외교적 역학(力學)의 결과인 것 같다. 즉 한국은 승전국도 패전국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연합국의 대일본 강화협상에 따라 영향을 받는 수동적 위치에 서있게 된 것이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5. 독도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일본이 독도에 관해서 억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영유권을 계속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독도 자체로서는 언뜻 보기에는 어업자원 외에는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그다지 쓸모 없는 돌섬에 불과하다는 단견(短見)으로 이렇게 온 국민이 핏대 세울 바에 차라리 폭파해 버리자는 멍청이도 있는데 과연 그럴까?
일본이 근대에 들어와서 적극적으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 연유(緣由)한다. 즉 군사적 목적과 경제적 목적과 해저자원확보를 위한 영토 확보에 있는데 그들의 목적은 곧 우리가 독도를 지켜야 하는 목적이 된다.
일본은 군사적으로는 과거 러시아함대를 감시하려 했던 것과 같이 관측소를 운영하여 동해상의 모든 움직임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보다도 훨씬 더 고도화된 전자장비는 더욱 효율적이다. 더욱이 영해를 넓힘으로써 본토에 대한 공격을 사전에 탐지하고 차단할 수 있는 안전거리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당장 동해상에 면한 일본의 수산업이 독점적 위치를 점하여 안정된 조업을 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미래를 바라보며 해양자원, 특히 해저자원의 탐사와 개발을 기대하는 것이다.
유엔해양법협약이 그런 노력을 뒷받침한다. 유엔해양법협약의 주요내용은 1) 12해리 영해를 인정하고 그 12해리 영해 안에서의 무해통항(無害通航;innocent passage)을 인정하여 모든 국가가 평화적인 자유통항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여기에는 잠수함도 부상(浮上)한 상태에서 자유 통항할 수 있다. 2)좁은 해협에서의 통과통항(通過通航;transit passage)은 해협의 평화적 이용을 위하여 항공기와 잠수함도 포함하여 무제한 허용한다. 3)군도수역(群島水域)에서 가장 외측(外側)의 돌출된 섬을 직선기선(直線基線)으로 연결하여 영해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4)영해기준선을 기점으로 200해리의 EEZ(exclusive economic area;배타적경제수역)을 인정한다. 5)대륙붕의 범위를 확장한다. 6)심해저(深海底;deep sea bed)는 일반적으로 공해(公海)지역이 되는데 관련국의 해양자원개발의 협력이 이루어 지도록 권유한다.
여기에서 “군도수역에서 최외곽(最外郭)의 섬을 직선으로 연결하여 영해기준선을 삼을 수 있다”는 것이 영해 확장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항이 된다.
일본의 해양 영토 확장의 꿈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그 대표적인 것이 오키노도리시마(沖/鳥島)이다. 만화 같은 일이 벌어진 것으로 토오쿄오(東京)에서 남쪽으로 1,740Km 떨어진 태평양의 공해상에 있는 커다란 탁자 크기에 불과한 산호초들로 이루어진 바위덩어리에 방파제와 콘크리트 장벽으로 인공 섬을 만들어 일본령으로 편입시키고 상상을 초월하는 면적의 EEZ을 확장하였다.
그렇게 일본이 사방으로 꿈꾸고 있는 영해 확장은 남서쪽으로 조어도(釣魚島)가 있는 센카쿠(尖閣) 열도의 점유(중국, 대만과 분쟁 중이다), 북동쪽으로 러시아가 점유한 남 쿠릴열도에 있는 북방 4 개 섬의 반환운동(이미 일본인의 어업활동은 보장되었고 현재 반분[半分]하자는 러시아의 제의가 있었으나 일본은 완전반환을 목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남쪽 태평양상의 오키노도리시마(沖/鳥島)와 같은 인공 섬(1993년에 이미 완료하였다), 그리고 북서쪽의 동해상에 있는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현재로서는 분쟁지역화 하는 것이 목표)을 하고 있다. 이 4극(極)을 연결하면 일본 본토보다 훨씬 큰 영해가 생기는 것이다.
이들 영해의 밑에 있는 해저자원이 언제 어떻게 개발될 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영토를 보존하고 넓히려는 것은 제국주의시대에 벌어진 식민지 확보 경쟁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국토를 넓혀서 국가의 자원을 보다 풍부하게 하려는 욕심은 여전한 것이고 여기에는 어떤 국가이든 예외가 없다. 단순히 인공 섬만 확보해도 영해가 늘어나는데 욕심이 안 생길 수 없다. “해양자원이 그리 쉽게 개발되겠는가, 쓸데없는 시간낭비가 아니냐” 하며 등한시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재정이 궁핍하였던 러시아 황제가 쓸모없는 땅이라고 720만 달러라는 헐값으로 미국에 팔아 넘긴 앨라스카(Alaska)나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Louisiana; 당시는 현재의 미국 중부지방 전체에 해당하는 지역인 80만 평방 마일의 넓이를 가지는 광대한 지역이었다)를 지키기 힘들다고 판단하고는 영국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전비(戰費)나 마련하자고 하여 신생 독립한 미국에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인 1.500만 달러를 주고 팔아 넘긴 역사를 생각하면 간단히 답이 나온다. 그 땅들이 현재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지킬 수 만 있다면 국토는 아무리 넓혀도 부족함이 없다. 지금은 활용가치가 어떠할지 알 수 없다고 하여도 미래에 그 영토나 영해가 어떻게 개발될 지는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독도의 가치는 일본이 얻고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그것은 독도의 바로 옆에 울릉도가 있기 때문이다. 독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일본의 억지에 대하여 감정을 앞세우기 보다 장기적으로 우리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는 방안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독도에 대응하는 일시적 감정으로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고 외치는데 현재로서는 넌센스라고 볼 수 있다.
이미 대마도에는 우리가 영유권을 주장할 근거가 아무 것도 없다. 조선 전기(前期)까지 대마도는 박쥐와 같은 삶을 살았다. 일본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조선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간지대에서 회색인(灰色人)처럼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우리가 영토확장의 욕구가 있었다면 단순히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대마도를 정벌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머물러 식민통치(植民統治)하는 것도 가능하였을 것이고 대마도인은 일본계 조선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칭 소중화(小中華) 조선은 일본을 야만인이라고 보고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하였고 대마도 정벌은 단지 왜구를 토멸(討滅)하는 것에만 국한하였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대한해협은 우리의 내해(內海)가 되어 우리 영해가 크게 확장되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대마도는 한국땅 운운하는 것은 이미 흘러간 얘기일 뿐이고 격한 감정의 발로(發露)에 불과하다. 하지만 먼 훗날을 위해서 과거의 자료를 모아 학문적 연구와 병행하며 연례행사(年例行事)로 한번씩 일본식망언(日本式妄言)으로 찔러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실은 그것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간도반환운동이다. 간도는 우리가 개척하였고 현재도 조선족이 살고 있으며 조선과 청(淸)은 간도에 대한 국경을 획정(劃定)하고 경계비(境界碑)를 설치함으로써 간도가 조선에 속한 땅이라는 것을 합의한 것이므로 한국의 간도 영유권 주장은 당연한 권리다.
다만 경계비 확정을 완전하고 명백하게 하지 못한 것이 문제로 남지만 기록으로 판단해 보면 토문강(土門江)으로 경계를 삼고 그에 따라 간도가 조선에 속한다는 것은 당시의 청도 인정하면서도 공식적으로 확정 짓는 것은 시간을 끌며 회피한 것이다. 게다가 일본이 만주를 지배하기 위해 간도를 포기한 것은 한국의 입장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요즈음의 국내학자들의 견해로는 국제법상 무효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간도문제는 토문강의 위치만 확실하게 비정(批正)이 되면 간도의 영유권 주장은 의심할 바 없는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이다.
결국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 실효적 지배가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간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일본이 독도에 대해 주장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도 줄기차게,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해서 이런 훗날을 대비하기 위한 치밀한 준비에 들어가고 있다. 간도에 대한 영유권주장은 중국과의 교린(交隣)을 증대하는 것과는 또 다른 별개(別個)의 정치적 행위로서 근거자료의 수집, 분석을 병행하며 지속적으로 이루어 져야 할 중대사(重大事)다.
6. 독도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독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단순히 목청만 높인다고 될 일이 아니다. 독도를 지켜야 한다는 목표는 단순하지만 그에 이르는 수단과 방법은 간단하지 않다. 분쟁이 예상되는 독도는 군사적인 방어전략만으로는 부족하다.
독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울릉도를 함께 묶어서 생각하여야 하고 당연히 울릉도를 지키고 개발하는 일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독도는 지켜지는 것이다.
(1)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이 점점 노골화하고 있는데 여기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일본의 기본전략은 “때려줘, 때려줘”하며 한국을 쫓아다니며 시비 거는 것과 같다.
일본은 독도에 대해 먼저 무력을 행사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그들이 무력에 의존하면 대내외적으로 수많은 돈을 들이며 선전해온 반전(反戰)과 반핵(反核)을 주창하는 평화국 일본의 이미지가 깨어질 것이니 그들의 입지(立地)가 좋아질 리가 없기 때문이고 중진국이나 후진국에게 돈을 뿌리면서 원조하여 얻은 지지가 도리어 두려움과 경계심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가 대단히 박약하기 때문에 국제적인 홍보에 비상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새롭고 획기적인 전기(轉機)를 맞기 전에는 적극적인 선공(先攻)으로 나서기가 어렵다.
그런데 한국이 그들을 때려주면 자연적으로 운신의 폭이 넓어지고 한국과 동등한 입장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게 된다. 일본이 국제사법재판소 회부를 주장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그렇기 때문에 1954년에 일본이 독도에 대해 대단히 강력하게 도발을 하였을 때 한국정부는 국제사법재판소 회부제의를 거부하는 이유로 [한국이 독도영유권을 갖고 있음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일본은 마치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가진 것처럼 전제하면서 영유권이 존재하지 않은 독도에 영토분쟁을 만들어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한국과 대등한 입지에 서려고 하는 것이다]라는 입장을 공표하였고 독도에 대한 한국의 이러한 기조(基調)는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것이다.
감정적으로는 대단히 불쾌하지만 우리가 먼저 주먹을 내밀 수는 없다. 국가 간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모든 교류(交流)에 악감정(惡感情)을 가지고 대응하는 것은 국제외교에 있어서 낙제점이다.
반드시 유념(留念)해야 될 일은 우리 자신은 ‘독도가 우리 영토이다’라고 당연하게 믿지만 외국인에게는 한국과 일본의 친소(親疏)관계에 따라 조금씩 독도에 대한 인식이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학문적으로 검증한 자료를 가지고 우리의 입장을 외국의 정치, 언론, 학계에 우리의 영토권을 인식시켜야 하는데 그 부분에서 우리는 소극적이었을 뿐 아니라 등한시(等閑視)해왔다.
‘아니 우리 것이 당연한데 뭔 소리냐’라고 하는 것은 우리끼리나 통하는 소리일 뿐이고 밖에서는 통하지 않는 또 다른 억지로 보일 수 있으므로 꾸준히 국제적으로 지지기반(支持基盤)을 넓혀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자꾸만 일본이 도발하고 그 정도가 심해지는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제시할 수 있는 방안으로 (1)분리대응(分離對應)과 장기전(長期戰)이 있다. 다시 말해서 영유권문제, 경제수역의 경계선획정문제, 어업협력문제, 학술토론 등으로 세밀하게 세분화하여 각 분야에 대하여 협의하고 회담하는 것이다. 따로따로 분리하여 회담하면서 양측이 100% 만족하는 온전한 합의 단계에 이를 때까지 지속적으로 시간에 구애 받지 않으면서 진행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만만디(慢慢地) 전술이다.
왜? 우리는 이미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으니 시간은 우리 편이다. 우리가 조급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들이 자꾸 때려달라고 쫓아다니면 도리어 우리가 턱을 내밀고 ‘당신들이 우리를 때려다오’하고 거꾸로 그들의 야만성(野蠻性)을 보이게 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2)원교근공(遠交近攻)의 전략을 세밀하게 운용하여야 한다. 원교근공은 말 그대로 멀리 있는 자를 친구로 삼고 가까이 있는 적을 친다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 바꾸면 원교근제(遠交近制)가 된다. 멀리 있는 자와 친구가 되어 가까이 있는 자를 제어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이든 일본이든 우리에게는 잠재적적국(潛在的敵國)으로 가정할 수 있다. 이들을 제어하여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견제할 다른 세력이 있어야 한다. 현재의 한반도의 주변정세 속에서 견제세력이 될 수 있는 것은 미국 밖에 없다.
반미운동가에게는 또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미국으로 하여금 우리 주변세력들을 견제하게 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효율적이고 확실하다. 보수적인 견해로는 한미동맹관계에 많은 균열(龜裂)이 생겼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긴밀한 동맹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본다.
조금만 자세를 낮추어 강자(强者)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에 대하여 민족의 자존심까지 운운하는 것은 대국(大局)을 보지 않는 단견(短見)에 불과하다. 적어도 나에게 주변세력들을 통제할 힘이 없으면 그 대안으로 다른 힘을 빌려서라도 통제가 가능하도록 하여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주변세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국가전략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어떻게 했을까? 사대교린(事大交隣)이 기본전략이라고 배워 왔다. 나쁘게 표현하자면 중국에 빌붙어서 안전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과 여진 등은 야만(野蠻)이라고 하며 교린(交隣)보다는 무시(無視)에 가까운 취급을 하였고 회유(懷柔)와 정벌(征伐)을 병행하는 양면책(兩面策)으로 무마(撫摩)하는데 급급했다.
만약 여진이나 일본과 가깝게 하려는 국가전략을 가졌다면 이 지역의 주도권을 쥐고 대항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중국이 조선의 의도(意圖)를 의심하게 되었을 것이므로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나 어쨌든 지나치게 중국 일변도의 외교였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는 한다. 바로 옆에 강대한 제국이 콧김을 불고 킁킁대고 있는데 어깃장을 놓고 튈 생각을 할 수 있었으랴? 사대(事大)하는 것도 그리 쉬웠겠는가? 하청업(下請業)을 해본 사람들은 그 일도 이만저만 고역(苦役)이 아니었을 것임을 느낄 수 있으리라. 그런데 지금은 사방 주변에 모두 강자들뿐으로 중국 하나에 의존하던 때보다 훨씬 운신하기가 어려워졌다. 유전(油田)도 가스전(田)도 없는 나라로서 콧대 세울 것이 무엇이 있는가?
지금 바다너머 미국에 사대(事大)하자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힘을 빌려 주변의 강대한 세력들을 견제하자는데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냉전으로 첨예한 대립을 하던 과거보다는 지정학적인 유리함이 많이 줄어든 지금은 과거보다 더욱 냉철하고 치밀한 외교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은 군사력보다도 외교력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할 지도 모른다.
(3)울릉도를 관광도시화해야 한다. 정기적이고 안정적인 관광객의 운송이 가능해져야 한다. 지금처럼 조금만 파도가 출렁여도 출항여부가 걱정될 정도로는 관광의 기초 자체가 불안하다. 출입이 불안정해서야 신비의 섬 운운 하는 것은 맹물로 배 채우는 것에 불과하다.
기초가 다져진 후에 천혜(天惠)의 관광자원을 가다듬어 국제관광도시로 발전시키고 더 나아가 독도와의 관광까지 연계시켜 독도에도 관광객이 상존(常存)하게 한다. 이것은 한국이 독도를 실효지배하고 있음을 국제적으로 인식시키는 홍보효과에다 관광수입을 얹고 덤으로 일본의 무모한 접근과 도발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물론 당연하게도 현재와 같은 관광자원과 프로그램으로서는 가능하지 않으므로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4)울릉도를 해양과학도시화(海洋科學都市化)한다. 해양탐사는 현재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앞으로 얼마나 커다란 유용한 이익을 주게 될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로 발전하고 있다. 해양생물을 연구하는 것은 신물질개발을 통해 생명공학에 기여하게 될 것이고 해양자원탐사는 해저지각연구를 통해 해저지하자원을 탐사하고 개발하게 될 것인데 과거에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한 분야까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일례로 2007년 6월 울릉분지 심해저(深海底)에서 가스하이드레이트(gas hydrate)의 존재를 발견하였는데 불타는 얼음이라고 불리는 가스하이드레이트는 천연가스가 물과 결합하여 압축된 고체에너지원으로 우리의 부족한 석유자원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때 울릉도가 동해해양연구의 주도권을 쥐고 동해 해양연구의 메카가 되게 하는 것이다. 특히 울릉도와 독도는 동해의 심해 해저 연구에 절대적 가치를 지닐 수 있으므로 해양과학자와 연관 학술단체와 관련업계가 몰려들어 동해 해양연구의 기지(基地)가 되면 예를 들어 일본해가 동해로 바뀌는 정도의 일은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 영향은 독도까지 미칠 것이므로 전문가들에 의한 학술적인 뒷받침도 되어 독도의 영유는 더욱 공고화(鞏固化)할 것이다.
꿈 같은 얘기가 아니다. 해양연구 특히 해저탐사에는 심해잠수정의 개발이 필수적인데 심해용 잠수정의 개발은 현존기술의 총합과 다름없는 초기술(超技術)의 영역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2006년 5월초에 6천톤급의 심해무인잠수정(深海無人潛水艇) ‘해미래’호가 진수되었다. 미국, 일본, 프랑스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개발되었다고 하니 해양대국이 꿈만 아니라는 것 알아 두시라!
(5)울릉도를 군사도시화하여야 한다. 한국은 반도국이므로 해양세력(sea power)이 될 수도 있고 대륙세력(land power)도 될 수 있다. 어디에 주력하느냐는 것은 주변 세력에 따라 달라진다. 과거 프랑스나 독일은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였으면서도 대륙세력이 되기를 택했다.
그러나 우리는 유럽과 지정학적(地政學的)인 위치가 다르다. 우리는 어느 하나에 주력을 둘 수 없는 처지다. 과거에서 현재에 걸쳐 우리에게는 중국과 일본 모두 잠재적적(潛在的敵)이었고 현존(現存)하는 위협으로 볼 때 같은 민족이라 할 지라도 개념상 주적(主敵)은 북한이다. 같은 민족끼리 전쟁이 일어나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또 평화를 바라면서 갖가지 통일운동을 벌이지만 50년 전의 한국전쟁은 다른 민족끼리 전쟁한 것이 아니다.
전쟁은 이념, 인종, 종교에 의해서도 일어나고 대세력(大勢力) 사이의 마찰(摩擦)이나 권력자의 호전성(好戰性), 오판(誤判)으로도 전쟁은 일어난다. 전쟁은 준비하여 벌이는 계획전쟁도 있으나 역사적으로는 우발적으로 발발(勃發)하는 전쟁이 허다하다. 절대로 전쟁은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은 유아(幼兒)의 소원이고 이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통일운동과 국방전략을 설계하는 것은 전혀 정반대인 별개의 수단과 행위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방편으로는 같은 것이다.
전쟁을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승부를 상정(想定)할 때 북한이나 중국에 대하여는 강력한 육군을 주(主)로 하고 해공군력은 종(從)이 될 것이다. 일본과의 전쟁? 현재의 국제관계로 볼 때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보지만 이것 역시 역사적으로는 100% 가능성 무(無)라고 어느 누가 단정지을 수 있을까? 일본과의 전쟁을 가상(假想)한다면 일본은 반드시 항공기와 함정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일본에 대해서는 해공군력이 주가 되고 육군이 종이 된다. 반드시 바다에서 끝장을 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 명치유신 이후 일본은 해양세력으로 등장하였으나 병력운송을 제1의(義)로 하였기 때문에 서양과는 해군의 존재가 조금 다르다. 통상적으로 해군의 작전은 봉쇄작전, 연안방어와 통상파괴(通商破壞)로 볼 수 있다. 항만봉쇄는 가장 적극적인 작전이다. 봉쇄를 하거나 봉쇄를 뚫기 위해서는 양측이 정면으로 돌파하고 격파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봉쇄가 성공하면 그 자체로 제해권을 쥐게 된다. 통상파괴는 적은 비용으로 효과를 높이는 수단이지만 가장 소극적인 전략이다. 통상파괴와 같은 소극적 전략으로는 제해권은 물론이고 전쟁의 승리도 가져오지 못한 것이 역사적 결과이다.
과거에는 제해권을 쥐기 위해서 전함(戰艦)을 건조하는 데 힘을 쏟았다. 공격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포수(砲數)를 늘리고 장갑(裝甲)의 두께를 늘리는 등 대형화 경쟁이 벌어졌었으나 항공기의 발달로 방어에 제약을 받게 되자 항공모함을 발전시켜 전함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해양세력이 되기 위해서 항공모함의 존재는 필수의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자장비를 갖춘 함정이 등장하면서 보다 효율적으로 연안방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항공기의 발달로 공군력(air power)의 존재가 전쟁의 승부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가 되자 연안방어에는 전함의 영향력이 크게 감소했다.
일본의 해군력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전통적으로는 해군은 육군의 보조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대해군을 가진 지금의 일본은 과연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그들이 어떤 전략을 가졌든 우리는 일본의 해군과 공군력을 해상에서 소멸시켜야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임진왜란 때와 그리 달라질 것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를 둘러싼 삼면의 바다는 연안해역의 형세가 다르니 전략이 달라지겠으나 적어도 동해에서는 작은 전력(戰力)으로도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항공기의 발달로 전함의 작전에 제약이 많이 생기자 현대에 와서는 섬을 중간기지로 활용하려고 한다. 울릉도는 천혜의 중간기지다. 동해의 중심이나 다름없는 이 곳에서 동해를 훤하게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울릉도 자체가 불침항모(不沈航母)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호위전단(護衛戰團)도 전혀 필요 없다. 예컨데 울릉도의 나리분지를 항공모함의 갑판으로 생각해 보자. 여기에 정보수집항공기, 조기경보기, 전투기, 폭격기, 전투용 헬기 등이 쉴새 없이 들락거리면서 동해를 지키는 것을 상상해보라.
만약 그렇게 되면 일본은 턱 밑에 칼끝이 들이대어진 것 같이 기분이 나쁠 것이다. 과거 쿠바와 미국의 관계를 돌이켜보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나리분지에 공군기지를 만들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능성이 있다 하여도 시일이 지나 번화한 주거지역으로 바뀌고 나면 실행 불가능한 공상(空想)이 될 것이다.
나리분지
독도는 지키기는 어렵고 파괴하기는 쉬운 곳(守之難 破之易)이다. 독도는 홀로 지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것은 일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독도의 수비는 상징적(象徵的) 요소에 불과하다. 독도에 수직갱(垂直坑)을 뚫고 영화 ‘나바론의 대포’에서 보듯 지하 요새를 건설하지 않는 이상 관측소의 역할만으로 최선일 뿐이다.
우리의 동해 바다를 진정한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연안방어를 벗어나 남지나해까지 진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해군력을 갖춘 대양해군(大洋海軍)이 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아직 당연하게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이 엔터프라이즈급 핵항모(核航母)를 우리에게 공짜로 준다고 해도 우리는 아직 유지할 만한 능력이 없다. 우리 조선기술로 항공모함이나 전투함을 건조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항공모함뿐 아니라 함께 움직이는 호위전단(護衛戰團)의 유지비용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의 기둥뿌리를 뽑을 정도의 천문학적 비용이 들기 때문에 현재의 경제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과거의 대전함(大戰艦)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중형고속전투함(中型高速戰鬪艦)을 운용할 수 있다. 소위 이지스(aegis)함이라고 부르는 하이테크 군함이다. 전자탐지시스템+미사일+다연장고속연사포(多連裝高速連射砲)를 탑재하는 것인데 핵심은 탐지장치(探知裝置)의 발달에 있다. 단 1초라도 빨리 탐지, 확인하여 방어와 공격을 처리하는 시스템이다.
우리는 이미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이지스함(2007년 5월 세종대왕함 진수)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고 오늘날 이러한 이지스함을 건조하는데 있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돈과 시간뿐이다. 핏대 세우기보다는 이지스함 한 척이라도 더 만들어서 ‘어디 한 판 붙어볼래?’라고 할 수 있어야죠.
(6)무릇 전쟁에 대비한다는 것은 단순히 전쟁 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국가의 존립에 대한 확신과 신념을 줌으로써 사회적인 안정을 가져오고 경제적 번영을 추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기댈 언덕 역할에 다름 아니다. 전쟁에 대비한다고 하면 전쟁광(戰爭狂)이나 군비확장만을 생각하고 부정적 인식을 하게 되는데 지금은 ‘조용한 군비확장 시대’이다. 군사과학에 기반한 하이테크 무기를 개발함에 따라 작으면서도 효율성이 커지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역할은 마지막까지도 사라지지 않는다. 흥분과 열광은 사기(士氣)로 표현되는 전쟁의 한 양상이다. 그 반대편에는 냉정함이 있다.
열광은 적의 기세를 누르고 위축되게 하지만 냉정한 지력(知力)은 상대방에게 전율과 두려움을 준다. 때로 열광이 넘쳐 광적(狂的)이 되면 대혁명의 전주곡이 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큰 싸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서로 목을 틀어쥐고 입씨름하는 싸움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유야무야(有耶無耶)되는 경우가 많다.
냉정하게 감정을 죽인 사람은 쉽게 싸우지 않으나 일단 계산 끝에 싸움을 시작하면 외나무 다리에서 벌이는 결전이 된다.
어느 것이 더 낫고 좋으냐의 문제가 아니다. 전쟁에는 이 두 가지 요소가 함께 있어야 마지막 승리를 움켜쥐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양 날개로 하여 끌고 가는 것이 의지력(Will)이다. 아무리 강하게 보여도 의지력이 없으면 만사휴의(萬事休矣)가 된다.
독도문제에 대해서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것처럼 험한 말을 하고 나면 속이야 시원할 지 모르지만 상대방은 잠시 위축이 될 망정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이런 일이 매양 벌어지면 나중에는 들어 엎자는 것인가? 어느 쪽이 그것을 원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저 통치권자(統治權者)가 독도를 방문하여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만이다. 그리고 독도의 수호를 위한 방책을 하나씩 내어놓으면서 쐐기를 박아 나가면 되는 것이다.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할 때마다 담장을 한 층 한 층 높이고 또 독도영유권을 주장할 때마다 담장을 한 겹, 두 겹 쌓아 나가면 우리의 의지력에 그들은 두려워하게 되고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우리의 울릉도 여행 마지막 날 J모(某) 의장이 표심(票心) 찾으러 왔었다. 그의 눈에 표 딱지 몇 천장 말고 동해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모두가 아는 뻔한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읊었는데 세상 일이야 뻔한 것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7. 후기(後記)
원래 이 글을 썼던 2006년 4월 일본 해상보안청에서 수로탐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독도를 포함한 EEZ에 해양탐사선을 보낸다고 하여 한동안 시끌벅적했었다.
원래 EEZ에 해양과학조사를 하려면 해당국가에 미리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일본은 한국에 허가요청을 하지 않고 국제수로기구에 통보하는 것으로 그쳤다. 이것은 독도 근해를 일본의 영해로 간주한다는 것을 과시하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금 잠잠한 듯하다가 올해 다시 학습지도해설서에 독도를 일본령으로 포함시키려는 꼼수를 부리고 있다. 점점 독도에 대한 억지의 돗수(度數)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나 국민들의 대응(對應)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구나.
(陽川書窓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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