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 297 > 애국가의 재발견③
독립운동가를 포함, '애국가'류는 많았다. 그런데 임시정부나 해외독립운동 진영은 왜 현 애국가를 국가로 불렀을까.
3·1운동이라는 민족적 저항은 여러 임시정부 통합체인 상하이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단절 없이 민족 정통성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1919년 9월11일 임시정부 의정원 개원식에서 애국가가 불렸다. 국가로서 기능했다. 애국가의 정통성이 담보된 순간이다. 이런 맥락을 확장하면, 3·1운동 과정에서 모든 민족 구성원의 함성으로 불리면서 애국가는 그 정통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애국가는 금지곡이었다. 일제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서는 '조선독립'을 염원하는 투쟁가였기에 수난은 불가피했다.
애국가를 '역사의 노래'라는 성격으로 규정하는데 문제가 없는 이유다. 일제강점기 36년, 애국가 수난의 값은 대한민국 나랏노래라는 빛나는 위상이다.
◇3·1운동 이념 실천의 무기, 애국가
60일 간 전국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을 가능케 한 것은 '조선의 독립'이라는 이념을 향한 애국가의 외침과 푯대 태극기의 펄럭임이었다.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시위형태인 '만세운동'이었기에 공격용 물리적인 무기가 아니라 관철코자 하는 의지를 전달키 위한 도구였다. 태극기와 애국가 그리고 '조선독립' 구호가 주무기였다. 1919년 서울의 주세력과 긴밀하게 준비했던 평양 기독교계는 고종의 봉도식(奉悼式)으로 위장해 3·1운동을 촉발시켰다. 이날의 독립선언식은 국기 태극기와 국가 애국가의 독립일이기도 했다.
'군중들은 꼭 10년 만에 다시 대하는 국기인지라 한편 놀라고 한편 기뻐 주목할 즈음, 도인권이 단상에 뛰어올라 이제부터 조선독립선포식을 거행하겠다고 그 취지를 설명했다. 이어서 목사 정일선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목사 강규찬이 연설했다. 식은 목사 김선두가 사회하였고, 애국가 봉창은 삽시간에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화하였는데···.'
모페트 선교사 등 평양 기독교계 1000여명이 참석한 평양 첫 시위인 '숭덕학교' 3·1운동 상황 일부다. 태극기와 애국가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이런 정황은 외국인도 포착했다. '정의와 인도주의에 입각해 책을 썼다'고 전제한 켄덜의 'The Truth about Korea'(한국독립운동의 진상)에는 현장 목격담이 있다. '군중은 무장하지 않았으며 행렬은 젊은이와 학생은 물론 노인과 일반인들로 구성돼 있었다. 군중은 '
올드 랭 사인' 곡에 맞춘 한국의 국가(National Anthem)를 부르고 국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면서 거리를 꽉 메웠다.' 비무장인 그들의 무기는 국기와 국가였다. 1910년대 '올드 랭 사인'을 곡조로 한 국가는 당연히 현 애국가다. 윤치호의 '찬미가'가 그 곡조를 밝혔으므로 확인 가능하다.
'군중은 공원 밖으로 행진해 나가기 시작했고 저마다 태극기를 흔들면서 근 10년이나 부르지 못했던 국가를 힘차게 불렀다.'
서재필의 전기 '한수의 여정'(
보진재·1979)은 국가를 'National Anthem'(내셔널 앤섬)으로 표기하고 운동 현장에서 불린 사실을 전한다. 중국 용정촌의 3월13일 독립선언식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회는 먼저 애국가 제창으로 시작되었다. 1만 군중이 설움과 희열에 뒤섞여 목메어 울며 부르는 애국가의 노래 소리는 동남산에 메아리쳐 마치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조선 침략 죄행을 성토하고 그의 말로를 선포하는 듯한 그런 비장한 장면을 방불케 하였다.'
결국, 당시 시위 전개방식은 '주동자 모의→분담업무 실행→시위대 집결→독립선언서 낭독→독립 연설→애국가 봉창→만세 3창→시위행진'이 일반적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3월1일부터 4월29일까지 벌인 만세운동은 대열의 흐트러짐 없는 끈질긴 저항이었다. 1만6000여명이 부상을 입었고, 8500여명이 투옥당하며 거족적 민족염원 '독립'을 담아 애국가를 불렀다. 총독부는 애국가의 힘을 간파했고, 애국가를 부르는 것은 곧 '사건'이었다.
◇애국가, 총독부의 탄압 대상
1924년 5월25일자 동아일보 '애국가 사건' 보도에서 볼 수 있듯 애국가를 부르거나 가사를 소지하면 취조의 대상이 됐다.
▲애국가 사건= '애국가 사건으로 잡힌 로희성(30) 시내 동대문 경찰서에서는 근일에 시내 종로 삼정목 구십삼 번지 사는 로희성을 체포하야 비밀리에 취조 중이라 하며 시내 청진동 청진여관에서도 한 명을 인치하야 취조한다는데 들은 바에 의하면 모다 지난번 애국가 사건에 관련된 것인 듯하다더라.'
기사 제목 자체가 '애국가 사건'인 것을 주목해야한다. 애국가와 관련돼 체포되거나 취조당한 경우를 통틀어 '애국가 사건'이라고 했다. 그런 사건들이 많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범인'의 나이는 30세이므로보통학교나 전문학교 학생은 아니다. 지방이 아닌 서울에서 발생한 사건인만큼 조직적인 항일운동단체에 의해 이뤄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애국가'와 '용진가'를 학생들에게 가르쳐 화를 당한 예도 있다. '검거된 교사 김규생은 경상북도 청송군 서면 수로동 야소교 부속서당에서 40여명의 학생에게 '이상스러운 창가를 가르침으로 당국에서 매우 주목을 당하다가' 1921년 7월17일 학생의 수첩에서 '한국독립' '국권회복' 등의 글자가 있음이 적발되어 교사를 인치하여 취조한 결과 창가 등을 가르칠 때에 애국가와 용진가로 스스로 선동한 사실을 자백'했다는 보도다.
일제가 얼마나 세밀하게 사찰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애국가를 부르는 것은 곧 항일독립운동이며 국권회복운동이라는 사실을 일제는 파악하고 있었다.
▲해주 형무소 애국가 사건= 1923년 임시정부 업무로 국내에 잠입했다 체포, 수감된 요원 20여명이 1923년 4월10일 임시정부 창립일을 기념해 옥중에서 애국가를 불렀다. 해주 형무소 서흥 분서에 수감된 이들이 '기념식을 하는 것이 옳다' 하고 22명이 일제히 '대한애국가'를 높이 불렀다. 그러자 간수들이 이 중 셋을 폭행해 중상을 입혔고 수감자들은 단식 투쟁으로 저항했다. 나흘이 지나 거의 실신에 이르렀고 '감옥 관리가 빌어 단식을 중단'한 사건이다.
1920년대에 애국가를 대한애국가라고도 칭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호가 대한민국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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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안도(所安島) 항일투쟁과 애국가= 1927년 5월과 6월 사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는 완도의 '소안학교 돌연 폐쇄'와 같은 사건이 여러 차례 보도됐다. 1919년 3월15일 촉발된 만세운동에 이어 1927년까지 지속된 운동이 '소안도 사건'이다. 당시 105인 사건으로 유배와 있던
양기탁의 영향을 받은 송내호가 주도했다. 이 항일운동에서는 대중적인 '학도가'류와는 다른 항일투쟁가가 불렸다. 전남대 나승만, 중앙대 노동은 교수가 채록한 증언에 의하면 '쪽지에 가사를 적어 바지가랭이에 숨겨 다니며' 불렀고, 일경에 발각되면 '예외 없이 가택 수색으로 이어져 결국 주재소로 잡혀가게 되었다'고 한다.
'창가하고 애국가를 항시 즐겨 불렀는디 애국가를 또 불렀습니다. 함부로 못 부르죠. 그런 책자 같은 것을 즈그들 못찾을 데다 감춰놓고 이따가는 떠들어보고…. 그런 세상을 우리가 살았습니다.'
여기서 애국가는 항일가 자체를 총칭한 것으로도 이해된다. '당시에는 일본 순사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백지로 두껍게 만들어 바늘로 꿰매 조그마하게 만들고 철필이나 연필로 애국가를 써서 한복 바지가랭이에 넣고 다녔다'는 증언이 근거다. 애국가는 일제에 저항하는 노래를 대표하기도 한 것이다.
▲하동 보통학교 애국가 사건= 1923년 10월2일자 조선일보는 애국가가 적힌 공책을 빌려준 이두석이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이두석이 하동군 량보면 여의리 주재소에 근무하는 황판일이란 주재소원에게 애국가가 적힌 공책을 빌려줬는데, 그것이 다른 주재소원의 눈에 띄어 사건이 된 것이다. 기사 만으로는 이후 어떻게 처리됐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이러한 사건은 지방 곳곳에서 발생했음을 추정케 한다. 학습장조차도 검색대상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소안도 민족운동기에는 투옥자가 많았다. '당시 사립학교 학생 중 소안도 내에서 일경에 피검되어 고문을 당한 사례에서 창가책이 매개가 된 사건이 제일 많았던 점으로 보아 소안학교 학생들이 얼마나 민족운동 노래를 열창했는지를' 알 수 있다.
'…철필이나 연필로 애국가를 써서 한복바지 가랭이에 넣고 다녔다. 그런데 그가 베껴준 창가 책을 학교 옆 주재소 앞을 지나다가 빠뜨렸다. 주재소 순사가 보니까 애국가가 많이 써졌는데, 한쪽에 김만득이라고 쎠져서….' 이들이 특히 많이 부른 노래가 애국가 명칭의 것이었고, 일제는 역시 이를 단속했음이 드러나는 증언이다.
신나라레코드(회장 김기순) 소장 자료에는 1928년 4월27일 평양 숭실전문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애국가를 부른 교사와 학생 대표가 검속당한 기록이 있다. 애국가는 총독부가 쓸 수 없기에, 복자(覆字)로 표기하는 '조선독립'을 의미하기에 검속 대상이었다. '신입생 환영회를 마친 후 다과회를 시작할 때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창가를 일동이 불렀는데 이 창가는 본래 조선 애국가로 조선××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야 그 사회자이든 전기 김형규씨를 구인하고 엄중한 취됴를 하는 중 지난 2일은 동교 학생회의 수명을 증인으로 심문하였다더라.(평양)'라고 돼있다.
당시 일본 경찰은 요시찰 대상 학교의 신입생 환영회까지도 사찰한 것이다. 행사에서 부른 애국가를 '조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 탄압했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것은 애국가를 조선애국가로 명명했고 그 노랫말 첫 마디를 부기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애국가 탄압상은 물론, 이미 애국가가 일반화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애국가 봉창―학교 폐쇄= 애국가를 불렀다는 이유로 학교가 폐쇄되기도 했다. '한국독립운동사' 중 '애국가 봉창―학교 폐쇄'에 의하면, 1925년 경남 합천군 가회면 함방리의 파평윤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귀음의숙(龜陰義塾)에서 갑·을·병 3반 총 150명의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봉창케 했다고 해서 학교를 폐쇄했다. 이 사건의 주동자는 윤재현으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돌아와 독립을 위해서는 신문화를 배워야한다고 역설하며 윤씨 종중 서숙을 10여년 간 개수해 귀음의숙을 개교했다. 윤재현은 이 학교에서 조선어, 영어, 불어, 수학, 수신, 창가 등의 과목을 개설하고 애국가를 가르쳤다.
▲음독자살 사건= 기사 소제목에 '애국가 사건'으로 표현된 1928년의 사건이다. 평양 경창리에 사는 이봉훈(55)은 10월20일, 가족들이 교회에 간 사이 양잿물을 먹고 자살했다. 그의 아들 이××가 교사로 봉직하던 평양 모 전문학교에서 퇴직을 당한 것에 대한 충격 탓이다.
'금년 사월 학생회에서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애국가를 부른 이××가 그 자리에 같이 참석하야 제지 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평남도청에서는 학교에 교섭하야 자격이 없다고 퇴직을 시키게 했다 한다.'
이후 이 교사는 다른 학교로 전근하려 했으나 이 사건을 문제로 삼아 받아주는 곳이 없어 5~6개월을 어렵게 살게 되자 부친이 이를 비관, 음독자살한 것이다.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사를 파면시켰고, 그 때문에 전입을 받아주지도 않았다.
이상, 애국가 사건들에서 특기해야 할 것은 사건의 주인공이 대개 전문학교 학생이거나 교사라는 점이다. 3·1운동기에 이미 항일운동을 체험한 이들이다. 애국가를 그때 알게 된 듯하다.
김연갑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대한민국 국가로서의 애국가는 구한말 위태로운 나라를 사랑해 지키자는 각성에서 그 위상을 굳혔다"면서 "3·1운동 기간 민중의 목청을 통해 민족의 응집력을 발휘, 가장 순수하면서도 비장한 애국심을 발휘했다. 일제의 탄압에 대한 보훈(報勳), 바로 애국가"라고 강조한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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