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경,오찬종 입력 2021. 06. 17. 17:33 수정 2021. 06. 17. 20:15
2012년 세계 최초 기술인증 받고도 수출·건설 실적 없어
'늦은 출발' 美는 12기 건설중..'단순 제조사' 전락할 판
◆ 발목 잡힌 SMR ◆
한미정상회담 이후 당정이 '소형 원전'을 탄소중립과 원전 수출의 새 미래로 연일 띄우고 있지만 정작 9년 전 개발된 한국의 소형 원전은 글로벌 기술경쟁 무대에서 '잠자는 토끼' 신세다. 2012년 소형 모듈형 원자로(SMR)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고도 수출은 고사하고 국내 기술실증 실적조차 '제로(0)'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한참 늦게 출발한 미국은 2030년 완공을 목표로 벌써 SMR 12기에 대한 국내 실증을 추진하고 있다. 정상회담 때 약속한 것처럼 제3국에 미국과 동반 진출하더라도 국내 기업들이 단순 시공사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16일 한국수력원자력·한국원자력연구원 등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한국 미국 러시아 중국 등에서 SMR 노형 총 71기가 개발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탄소중립에 드라이브를 건 상황에서 선진국 사이에 기후변화 대응과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골든 키'로 SMR 기술 확보가 급부상한 것이다.
현재 기술 진척도에서 가장 앞선 곳은 뉴스케일, 엠파워, W-SMR, SMR-160 등 노형 원자로 17기를 개발 중인 미국이다. 미국 에너지부는 지난해 10월 SMR와 차세대 원자로 지원에 7년간 32억달러(약 3조6000억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영국 정부는 항공기 엔진 제작업체인 롤스로이스와 손잡고 2050년까지 약 45조원을 들여 소형 원전 16기를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한국의 현주소는 "미국보다 8년 먼저 개발했다"는 말조차 부끄러운 수준이다.
현재 개발 중인 노형 원자로는 단 2기뿐이다. 2012년 원자력위원회에서 표준설계 인가를 받은 SMART(스마트)로 SMR 기술을 확보했지만 제대로 된 건설 실적 하나 없다. 문재인정부 이전에는 경제적 채산성이 큰 대형 원자로 기술 육성에만 집중했고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에는 탈원전 기조 속에서 투자에 인색했기 때문이다.
한미정상회담 이후 부랴부랴 혁신형 SMR(i-SMR)를 2028년까지 개발하겠다는 목표로 8년간 약 40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지만 수십조 단위 선진국 투자와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이러는 사이 2015년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차원에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며 가시화했던 사우디 소형 원전 수출도 수년째 공전 중이다. 수출을 위해 국내 실증부터 진행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원전업계에서 나왔지만 탈원전 폭풍 속에 그대로 묻혔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원전 수출은 한두 개 기업이 뛰는 게 아니라 국가 대항전이라고 봐야 한다"며 "투자를 아끼다 보니 한때 우위였던 기술력은 사실상 추월당했고 기술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미국과 동반 진출해도 우리가 하도급 제조사 역할에 그치게 된다"고 우려했다.
2018년 사우디아라비아 원전 규제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 15명이 한국으로 입국했다. 한국이 사우디에 수출을 추진하는 한국형 소형 원전 '스마트(SMART)'와 관련된 교육을 받기 위해서였다.
당초 계획은 최신 기술인 스마트에 대해 배워 본국으로 돌아가 현지 인허가를 마치는 데 일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1년 넘는 체류 기간 동안 안전 기초교육만 이수받고 사실상 빈손으로 귀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스마트 원전의 '맞춤형 설계도'에 해당하는 '건설 전 설계(PPE)'에 대해 한국 내 인허가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자력업계 관계자는 "본국으로 가서 관련 자료를 추후 검토한다고 했지만 눈으로 직접 보고 학습하는 것과는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면서 "실망감이 컸을 텐데 결국 향후 사업 수주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세계 각국은 민관이 한 몸처럼 소형모듈원자로(SMR) 개발을 위해 전력 질주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상황은 딴판이다. 정권 차원에서 밀어붙인 '탈원전 정책'과 함께 부처 간 칸막이 문제도 소형 원전 수출의 발목을 잡고 있다.
현재 원자력 기술 진흥 분야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실증·상용화 등 이용 분야는 산업통상자원부가 각각 키를 잡고 있다. 한 부처 안에서 유기적으로 추진해도 모자랄 일을 서로 다른 입장의 부처가 나눠서 맡다 보니 전력이 분산되고, 정작 뛰어야 할 때 스텝이 꼬이는 일이 빈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기에 과기부(옛 과학기술처) 산하였다가 2011년 독립한 국무총리실 산하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전문 규제 기관으로 존재한다. 원자력 운영과 규제 담당 기관을 분리해야 한다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권고에 부합하는 구조지만, '탈원전 정책' 본격화 이후엔 지나친 발목 잡기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10여 년 전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소형 원전 스마트를 사우디에 수출하려던 과정을 살펴보면 이런 현실이 명확히 보인다. 표면적으론 '범부처 협력'을 표방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도 '따로국밥' 식 행태가 드러난다.
스마트 원전은 우리나라가 대형 원전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개발을 시작해 2012년 세계 최초로 표준설계인가(SDA)를 받은 100㎿급 소형 원전이다.
우리나라는 2015년 3월 사우디와 스마트 동반자 협력을 맺고 사우디 정부로부터 투자비 1억달러까지 지원받았다. 사우디는 2017년에도 한국에 스마트 용지 타당성 조사와 인허가 심사 등 적극적인 협력을 요청했다.
하지만 문재인정부 들어 스마트 사업이 지연되기 시작했다. 2017년 사우디가 스마트 인허가를 영어로 하자고 한국에 제안했지만 우리나라 인허가 기관이었던 원자력안전위원회가 한글을 고수하며 1년 넘게 갈등을 빚었다.
원안위는 사우디가 참여한 3자 간 참여 인허가 방식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사우디왕립 원자력신재생에너지원-한국수력원자력-한국원자력연구원 3자 간 컨소시엄 형태로 인허가를 요청했는데 해외기관이 인허가 신청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적격성만 따지다 시간을 보냈다. 사우디 입장에선 먼저 사업을 제안한 나라가 오히려 사업 발목을 잡는 황당한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정부는 지난해 1월 사우디에 원전 건설을 추진하기 위한 현지 합작 법인을 설립하겠다며 다시 운을 뗐다. 하지만 1년이 지난 현재까지 진행은 지지부진하다. 정부는 "코로나19와 사우디 정세 등 외부적 요인으로 합작 사업이 지연됐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실제로 우리나라의 내부적 문제가 더 크다고 지적한다.
원전 수출이나 통상 협력 분야에 강점이 있는 산업부는 스마트 원전 수출 과정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 애당초 스마트 원전 수출의 주무 부처가 옛 미래창조과학부, 지금의 과기부기 때문이다. 산업부는 스마트 원전보다는 이미 우리가 운용하고 있는 3세대 대형 원전 APR1400 수출에 주력했다.
사우디에서도 사업비 200억달러(약 22조원) 규모로 추정되는 대형 원전 수출에 주안점을 뒀다. 사우디는 전체 원전의 15~20%를 소형으로 추진할 계획을 갖고 있는데, 주력에 해당하는 나머지 75~80%가 대형 원전 사업이다.
스마트 원전 수출이 추진되던 당시만 해도 SMR는 대형 원전의 보완재 개념이었고, 경제성이 완전히 증명되지 못했다. 대규모 전력 설비를 SMR로 대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당장 수출 경쟁력이 있는 APR1400에 집중했다는 얘기가 많다.
현재도 이런 구조는 마찬가지다. 산업부 관계자는 "사우디 스마트 원전 수출은 과기부 소관"이라면서 "사업과 관련한 진척 사항은 과기부가 담당하며 우리에게는 공유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처럼 부처 간 칸막이와 컨트롤타워 부재로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세계 최초 소형 원전이라던 한국의 스마트 원전 기술은 더 이상 '최고'가 아니게 됐다.
SMR 개발에 박차를 가한 미국이 사우디 소형 원전 수주에 뛰어들었다. 우리 정부와 협상하던 사우디 스마트 협상 담당자들도 이미 교체됐다. 세계 각국이 신형 SMR와 4세대 원전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나라도 경쟁력 확보에 초점을 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우리나라가 그동안 소형 원전 분야에서 앞섰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미국 등 주요국에 비해 기술력이 떨어진다는 게 중론"이라며 "이제라도 민관이 합심해서 소형 원전 기술을 한층 발전시키고 경쟁력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홍인기 전 카이스트 경영학과 교수는 "최근 들어 보수적이었던 일본마저도 원전 가동 시한을 연장하고 차세대 기술개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가는 흐름"이라면서 "더 이상 실기하지 않기 위해 4세대 원전 같은 미래 기술 개발을 서둘러 마지막 골든타임을 잡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백상경 기자 / 오찬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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