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훈 입력 2020.09.19. 18:57
[임상훈의 글로벌 리포트] 국민은 없는 정치, 그들만의 리그
[임상훈 기자]
스가 요시히데 전 관방장관이 16일 일본의 제99대 총리에 취임했다.
스가 신임 총리의 탄생은 일본 정치를 관통하는 두 가지 구시대적이고 비민주적인 특징을 새삼 주목하게 한다. 하나는 엘리트 가문 중심의 정치문화이고, 나머지 하나는 파벌 중심의 정치문화다.
일본 정치의 이 두 가지 특징은 세계 3위 규모의 경제력과 높은 기술력, 다양한 문화적 자원 등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치를 답보하게 만드는 주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일본의 주요 정치인 가운데 보기 드물게 지방의 비정치 집안 출신이다.
한때 그의 출신을 두고 '흙수저' 논쟁이 있었을 만큼 일본 정치의 중앙무대는 대부분 ▲ 명문대를 나온 ▲ 도쿄와 그 인근 지방의 ▲ 정치인 집안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다.
스가 총리는 부농의 아들로 사실 흙수저와는 거리가 멀다. 고등학교 졸업 후 도쿄로 상경해 골판지 공장에서 어렵게 일을 했다는 경력이나 야간학부를 졸업했다고 알려진 그의 학창 시절도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공장에서 일한 기간은 2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대학도 야간이 아닌 주간 학부를 다녔다는 것.
1948년 혼슈섬 북부 아키타현의 딸기 농가에서 태어난 스가 총리는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로 상경해 호세이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그의 성공신화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비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게 사실이냐는 것. 아니라는 쪽의 말에 따르면 정치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딸기 농가를 물려받기를 원하는 아버지와의 갈등 때문에 학비를 스스로 벌었다고 한다.
구태 정치 바꿀 힘도, 의사도 없는 스가 총리
그가 부농 출신인지 빈농 출신인지, 야간학부를 나왔는지 주간학부를 나왔는지, 학창시절 아르바이트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총리 물망에 오르고서야 출신을 놓고 논쟁이 벌어질 만큼 스가 총리는 취임 직전까지도 이력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일본 정치 중앙무대의 주변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일본의 90대와 96-98대 총리를 역임한 아베 신조 총리는 잘 알려진 대로 외조부가 56-57대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이고 친조부 역시 중의원 의원 출신이다.
92대 총리를 역임하고 아베 2기 내각에서 부총리를 역임한 아소 다로 역시 조부와 장인이 총리 출신이다.
91대 후쿠다 야스오 총리의 부친도 총리 출신이며 87-89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부친과 조부 그리고 차남까지 내각 대신을 역임해 4대째 이어지는 장관 집안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그 전임 모리 요시로 총리도 부친과 조부가 모두 군수 출신이었다.
이렇게 보면 2000년 이후 자민당 출신 총리 가운데 정치인 집안을 배경으로 두지도 않고, 수도권 출신도 아니며, 초일류 대학이 아닌 곳을 졸업한 총리는 99대 스가 총리가 처음인 셈이다.
스가 총리가 가난한 집안 출신도 아니고 명성이 나쁘지 않은 대학을 나왔는데도 흙수저 진위 논쟁까지 나온 것은 그만큼 일본의 중앙정치, 특히 자민당 내부 핵심 세력이 구성하고 있는 '그들만의 리그'가 어느 정도 견고한가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스가 요시히데 총리의 탄생으로 일본 엘리트 정치 문화의 변화를 조금이라도 기대해볼 수 있을까? 불행히도 현재까지는 가능성이 작아 보인다.
지난해 4월 스가 관방장관은 정부 대변인으로서 나루히토 새 일왕 시대에 사용할 연호 '레이와'(令和)를 공식 발표해 '레이와 오지상'(레이와 아저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레이와 아저씨라는 별명처럼 누군가를 대변하는 정치는 총리 취임 후에도 그리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일본의 구태 정치 문화를 바꿀 수 있는 최상의 위치에 올랐지만 그럴 힘도, 그럴 의사도 없어 보인다.
변방의 정치인 스가 요시히데를 총리로 이끌어준 사람은 바로 아베 신조 전 총리다. 고이즈미 총리 시절부터 아베 신조 의원과 인연을 쌓은 스가 총리는 2006년 자민당 총재 선거 당시 아베 총재를 만드는 데 기여해 그의 내각총리 취임 후에는 총무대신으로 첫 입각을 한다.
그리고 2012년 9월 아베 총리가 재집권한 이후에도 자민당 간사장 대행과 관방장관을 이어가며 줄곧 아베 총리의 최측근 자리를 지켰다.
정부 대변인 격인 관방장관 재임 중에도 스가 총리는 아베 당시 총리의 충실한 대외 창구 역할을 했고, 총리 취임 후 기자회견에서도 "아베 정부의 노력을 계승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사명"이라고 말할 정도로 충실한 후계자의 역할을 자임했다.
16일 총리 취임과 동시에 발표한 그의 첫 내각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상 아베 4기 내각을 이은 4.5 내각이라 할 만하다.
총 20명 각료 가운데 절반이 넘는 11명이 아베 내각에서 그대로 넘어온 인물들이며 그중 8명은 자리까지 유임됐다.
아베 전 총리의 동생까지 입각했다. 부총리, 외무상, 경제산업상 등 주요 보직도 달라진 것이 없으며 미일동맹을 기축으로 하는 외교정책과 아베노믹스로 불리는 경제정책도 그대로 유지할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스가 총리가 사실상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정황은 새 내각을 구성하는 파벌의 분포를 봐도 그렇다. 20명의 내각 명단이 7개 자민당 파벌의 세력 규모에 맞춰 정확하게 배분돼 있다.
우선 주요 부서의 대신은 각 파벌이 한 자리씩 차지한다. 나머지는 파벌의 규모에 따라 재배분된다
.
가장 많은 의원을 보유한 호소다파(98명)가 5명, 이번 내각의 부총리인 아소 다로가 이끄는 두번째로 의원을 많이 보유한 아소파(54명)가 3명이고 다케시타파 2명, 니카이파 2명, 기시다파 2명 그리고 가장 소속 인원이 적은 이시바파(19명)가 1명이다. 무파벌(64명) 가운데에서는 3명이 입각했다.
스가 총리는 지난 14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무파벌로 자파의 수장들인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정조회장과 이사바 시게루 전 간사장을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그렇다고 무파벌의 승리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기시다파와 이시바파를 제외한 나머지 계파가 모두 스가 요시히데를 지지하기로 사전에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민당 내 계파의 시작은 1955년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자유당과 하토야마 이치로가 이끄는 일본민주당의 합당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수 대통합을 기치로 두 당이 합쳐지면서 기존의 세력은 당내 계파로 재탄생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본류(주류 자유당 계열)와 방류(비주류 일본민주당 계열)는 자민당 독주체제의 일본 정치무대에서 사실상의 정당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요시다 시게루 이후의 보수 본류는 일제 패망 후 미국의 힘을 인정해 군사력 확장을 포기하고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에서 경제대국 일본을 만들어냈다.
그 사이 한일관계도 무난하게 유지가 되어 왔다
. 일본도 한국을 크게 자극하지 않았고, 한국도 경제성장을 위해 일본이 필요한 시기였다.
이렇게 보수 본류가 이끄는 일본 정치는 고노 담화를 있게 한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와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주인공 오부치 총리까지 이어진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자민당 내부의 힘의 균형은 본류에서 방류로 서서히 옮겨간다.
그들이 말하는 90년대 '잃어버린 10년' 동안 일본 경제는 극심한 침체기를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했고, 소련과 동유럽의 붕괴 후 안보 차원의 미국 우산론도 점차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본류보다 정치적으로 극우에 해당하며 군대를 보유하는 '정상국가'를 주장해온 비주류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자민당 총재와 내각총리가 방류에서 나오기 시작하고 세력 균형은 역전이 됐다. 한국정부 수립 이래 한일관계가 갈수록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중간에 잠시 민주당 정부 시기(2009-2012)를 제외하면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 다시 아베 신조로 이어지는 일본정부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독도 망언, 교과서 왜곡으로 한일관계를 수렁으로 빠뜨린다.
이처럼 일본민주당 후신인 자민당 방계 계열의 파벌들이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현재 당내 최대 파벌인 호소다파(세이와정책연구회)와 니카이파(지사회), 이시하라파(근미래정치연구회)가 방류의 후계 파벌들이다.
이렇게 되자 본류의 후예들도 정치적 극우로 동화되기 시작한다.
온건세력이 대거 탈당해 민주당을 창당하면서 세력이 크게 줄어든 다케시다파(헤세이연구회)를 비롯해, 고노 담화의 주인공 고노 요헤이가 한때 이끌다 지금은 부총리인 아소 다로가 수장을 맡은 시코카이도 새주류(방계) 후신들과 걸음을 같이 하고 있다.
그나마 남은 자민당 본류의 후계 파벌은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정조회장이 이끄는 기시다파(고치카이) 정도다. 기시다파를 제외한 나머지 두 파벌(다케시다파, 아소파)은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스가 요시히데를 지지했다.
전 자민당 간사장 이시바 시게루 의원은 자민당의 본류와 방류에서 유래하지 않은 수요회라는 이름의 새로운 계파를 조직했고, 수요회엔 현재 19명의 구성 의원이 있다.
14일 자민당 총재를 결정하는 투표는 사실상 사전에 이처럼 승부가 이미 결정이 난 싱거운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자민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일본 의회에서 일본 총리 투표 역시 이전에 사실상 승부가 결정날 수밖에 없었다.
스가 요시히데 총리의 탄생은 이처럼 투표를 의미 없게 만드는 일본 특유의 엘리트 가문 정치와 파벌정치의 결과이다.
일본 정치에서 파벌은 정당의 역할도 일부 수행한다. 그럼에도 파벌정치의 결정적 문제점은 권력이 국민들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민에게는 국회의원을 선출할 권리까지만 주어지고, 이후 의원들은 이합집산, 합종연횡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조립하고 분해하고 재창조한다. 여기에 국민의 주권은 들어갈 여지가 없다.
물론 이러한 불합리한 정치의 첫번째 책임은 주권자인 국민의 몫이다. 자민당 창당 후 65년 동안 정권을 넘겨준 시간은 불과 5년 8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일본 국민은 자민당에 안주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파벌정치의 발생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국민들이 묵인해주는 이상 굳이 국민에게 물을 이유가 없다.
그런 정치문화에서는 파벌 수장들의 밀실 담합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심지어 파벌을 넘어 '일본회의'라는 비공식 극우 모임까지 자민당의 옥상옥이 되어가는 것이 지금 벌어지는 일본 정치의 현실이다
과연 일본 국민은 어디까지 일본 정치의 퇴행을 용인할 것인가?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작도, 한일관계를 비롯한 외교관계의 정상화도 이 퇴행을 바로 잡을 때만이 가능해진다.
12일 <마이니치 신문>에 따르면, 일본 국민들 가운데 당 총재는 당원 투표로 결정하되 내각의 수반인 총리는 국민이 직접 선거로 뽑아야 한다는 여론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여론이 정치권 내부에까지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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