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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카제(神風)의 由來와 戰術戰略적 의미 그리고 他國 事例들

日本동향

by 석천선생 2020. 8. 16.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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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카제(神風)의 유래와 전술전략적 의미 그리고 타국 사례들

 

카미카제(神風)의 유래와 전술전략적 의미 그리고 타국 사례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 구사한 전략

 

인명과 장비를 경시하는 군대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영국 크롬웰 프로덕션, <2차대전사> '항공모함전'편.

 


- 히스토리 채널, <컬러로 보는 2차대전사> '항공모함과 카미카제' 편

 

Contents

1 개요 2 유래 3 카미카제의 조악함 4 카미카제의 전술적 의미 5 카미카제의 전략적 의미 6 카미카제의 이야기거리 7 진짜 카미카제? 8 막장 위에는 막장이... 있다 9 타국의 사례 9.1 독일 9.2 러시아 9.3 영국, 이탈리아 9.4 한국 9.5 미국 10 아직 유용 11 각종 매체에서의 카미카제 12 기타항목 12.1 비트매니아 IIDX의 수록곡 12.2 칵테일 12.2.1 재료 12.2.2 만드는 법 12.3 메이드가이 12.4 D'espairsRay의 악곡

 

1 개요

 

 

일본군 사상 최악의 병크.유인유도 공대함 크루즈 미사일 태평양 전쟁 당시 반자이 어택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며, 미군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여 영어권 사전에 등재되는 비범함을 자랑했지만 실체는 그냥 자뻑.
전투기로 충돌테스트도 한다 [1]

 

일본 해군이 미국에게 박살이 나면서 나온 대안 중 하나로, 항공기를 이용해 주로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등의 군함에다가 박아서 항공기 하나와 조종사 하나를 대가로 군함 하나를 날려버린다는 계획이다.

 

사실, 자포자기해서 '될 대로 되라'식 전술을 사용하는 경우에 자살돌격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독일의 경우에는 전투기 조종사를 서약서를 받고 연합군 폭격기를 들이받는 임무에 투입했다.

단, 재주껏 살아돌아오는 게 전제였지
자살을 전제로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는 해도 생각하는 거 자체가 다르다.

그리고 자신이 탑승한 항공기가 치명적인 손상을 입자 '어차피 나도 죽을 거 너도 같이 죽자'는 식으로 궁지에 몰린 비행기 조종사들이 이러한
자살 공격을 하는 사례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으며, 대공포에 맞고 귀환할 수 없게 되자 아예 적 기지나 적함에 달려드는 사례는 일본군만이 아니라 미군한테도 있었다.

심지어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일본군이 오히려 미군 조종사들의 무모함에 가까운 과감함에 놀랐다는 말까지 있다.

 

문제는 앞의 사례가 현장에서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조종사 개인이 선택한 최후의 선택지인데 비해서 이 카미카제는 정식 작전 계획(…)이었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서, 자발적인 희생이 아니라 희생을 강요한 것이란 말이다.

 

원래 일본쪽의 정식 명칭은 신푸(神風)특공대[2]였다. 하지만 어떤 기자가 어설픈 일본어 실력으로 카미카제 특공대라고 읽고 그렇게 써 버려서 저 이름이 더 유명하게 알려졌고, 나중에는 "일본뉴스"의 내레이션에서도 "카미카제"라고 읽게 되어 "kamikaze"로 정착되었다.

대한민국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비꼬는 말로 '신바람 특공대'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 뒤로 kamikaze는 자살공격의 대명사처럼 사용되게 되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행동이 이루어지게 된 이유는 아래와 같다.

  • F6F 헬캣,VT신관을 대표로 하는 연합군(특히, 미군) 방공능력의 비약적인 향상.
  • 미드웨이 패전 이래 조종요원 손실이 계속 늘어난 반면, 조종사 양성능력은 당시 다른 참전국들에 비해 상당히 낮았다.

    애초에 일본군은 단기결전을 염두에 둔 전략 때문에 장기적인 조종사 수급에 대해서는 심도있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양성기관 수도 적었던데다 폐쇄적이었고, 거기에다 조종능력과는 상관없는 사안에도 교육생을 탈락시키는 등의 병크까지 더해졌다.

    비뚤어진 엘리트의식의 전형. 그런데, 이렇게 소수정예로 뽑아놓고서는 정작 일선에서의 발언권은 매우 적었다. 조종사의 손실을 키운 간접적인 원인. 덕분에 숙련된 조종사의 보충이 어려웠다.


  • 항공기 연료의 품질 악화가 발생했다. 이는 제해권 상실과 더불어 미군 잠수함들의 방해 같은 전황의 악화로 인해 동남아에서의 연료수급사정은 점점 악화되었으므로 송진등을 이용한 대체연료를 사용할 실정이므로 정상적인 연료를 쓸 때보다 엔진출력도 약하고 자주 꺼지는 현상까지 발생했다.

    이런 것은 항공기를 만들 재료에도 적용되므로 전쟁 후반기의 일본군 항공기는 세심하게 만들어도 저질 재료로 인해 상당히 위험했다.
  • 설상가상으로 항공기 관련 공업능력이 저하되었다. 여기에는 공장의 숙련공들조차 일선의 총알받이로 보내버린 일본군의 병크도 한몫했다.

    일선 전투원 못지 않게 숙련공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던 미국과는 아주 대조적인 상황이다. 이에 따라 따라 전투기의 설계, 제작이 난항을 거듭하여 원하는 성능을 낼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군이 품고 있는 부조리함의 결정체. 어찌나 말도 안 되는 작전인지 처음 작전 계획을 들은 해군 장관마저도 어이가 없어서 "이딴 걸 작전이라고 내놨냐?"고 따졌으며, 첫 카미카제 출격 때는 호위를 요청받은 부대의 지휘관이 "그딴 미친 짓에 붙일 호위 따윈 없음."이라며 대놓고 씹었고, 기어이 카미카제 전술이 정식 작전으로 채택된 회의에서도 일본군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꽤 많은 지휘관들이 반대했으나 전황이 너무나 막장이었던지라 결국 통과되고 말았다고 한다.

 

미군은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고 부르는, 1944년 6월의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해군의 항공모함기동부대가 괴멸당한 이후 1944년 7월 21일, 일본의 군령부는 '대해지 제431호'에 의거하여 특공작전을 정식으로 채용하였으며, 아예 그냥 일단 닥돌해서 죽어야 하는 가이텐, 신요, MXY-7 오카 같은 "특공병기"까지 등장하면서 상황이 점점 막장으로 치닫게 된다.

 

더 기가 막힌 게, 이딴 '자살행위'는 무사도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것이었다. 할복이나 옥쇄는 어디까지나 "명예를 택했다면 최후의 한 사람까지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어라."였지 "네 목숨은 갖다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체통과 보신주의에 목말랐던 수뇌부는 이걸 무사도로 미화하면서 매우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당연히 이러한 정신나간 공격방법을 모두 찬성한 건 아니라서 일본의
에이스 사카이 사부로 같은 이들은 카미카제에 대해서 이렇게 비난했다.

어떤 이들은 멋지게 미군 대공포화를 피하고 무사히 미 해군 항공모함에 착륙해서 항복했다고 한다.

또한 폭탄이나 어뢰를 싣고 가서 평범하게 뇌격이나 급강하 폭격을 한 뒤에 그냥 돌아온 이들도 있다고 한다.

이에 정신나간 대본영과 일선 지휘관들은
"야 이 미친 놈아. 가서 죽으라고 보냈더니 살아돌아와? 네가 그러고도 황군이냐!" 하면서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

덕분에 광기에서 벗어나서 전쟁에 회의를 느낀 파일럿도 있었을 정도. 물론 일부 지휘관들은 "…그래, 잘했다." 면서 그들을 질책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 수병들도 이러한 비상식적인 전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22세의 나이로 전사한 우메하라 유지라는 카미카제 특공대원은 비아냥 가득한 유서를 남기기도 했다.

 

 

 

사실 일본의 기술이나 자원, 시간, 그 어느 것도 절박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에 신형기 양산도 물건너간 상황이었겠지만, 독일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저런 미친 짓을 할 인력과 자원으로 시덴카이같은 신형기를 양산[3]하고 조종사 육성에 신경을 썼다면 좀 더 나은 결과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히로시마나가사키원자폭탄이 떨어지지는 않았겠지. 그런데 이들은 만들라는 신형기는 만들지 않고 후방에서 신형자폭기나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저 유서를 쓴 대원의 말마따나 언 발에 오줌누기였을 뿐, 절대로 현명한 타개책이 아니었다.

시행 초기에는 일본군이 기대한 대로 큰 성과를 거둘 수는 있었지만 그나마 초기의 전과는 충격 요법과 함께 자살 돌격을 감행한 자들이 베테랑 조종사들이었기에 가능했지, 신참들은 그야말로 불나방 신세. 제로센을 몰면서도 살아 남았던 정예 조종사들을 이따위 자살 공격에 소모시킨 일본 대본영은 뭐하는 놈들일까?

제로센으로 미군의 대공포화와 전투기를 피하면서 전함에 충돌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있는 조종사라면 자살돌격따위가 아닌 정상적인 공격으로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특성상 자살공격이었기에 숙련된 조종사라도 잘 해봐야 1회의 성공적인 공격으로 끝난다.

따라서 숙련된 조종사를 하나 둘 잃고 훈련이 별로 안 된 신참 조종사가 조종하는 상황은 말 그대로
나를 격추시켜 주세요하는 상황이고, 인력과 자원을 낭비하던 일본군 입장에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합군의 방어 태세도 더 강화되어 결국 망했어요. 패전을 막자더니 오히려 더 패전을 앞당기는 짓을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미국에 비해 훨씬 적은 인적, 물적자원 때문에 이런 식으로 병력을 낭비해서는 안되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말도 안되는 짓에 자원을 낭비해버렸다.

반면에 오히려 인적, 물적 자원이 풍부한 미군은 전투 중에 추락한 조종사나 침몰한 배의 장병을 구하기 위해 주변 해역을 샅샅이 뒤져 구조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
[4] 결과적으로 이러한 인명에 대한 인식이 전쟁의 승패로 나타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유능한 인재가 전후까지 살아남았더라면 이후 재건될 때에도 그들의 노하우를 그대로 이어나갈 수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그야말로, 국가를 운용하는 데 있어 필요한 최소한의 인식 조차도 없었다는 것이다.

 

태평양 전선이 아닌 만주 쪽에서도 소련군을 상대로 간간히 실시했다는 말도 있다. 쿠릴 열도에 상륙하는 소련군의 상륙정을 대상으로 자폭한 전투기도 있었다고 한다.

2 유래

神風로 신의 바람이라는 뜻이다. 몽골 나라의 쿠빌라이 칸이 주도한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서 이들이 바다를 건너오던 중 태풍에 싹 쓸려버린 것을 말 그대로 의 가호라고 생각해서 생겨난 말로 두 번에 걸친 원정 모두 이 태풍 때문에 작살났다. 물론 일본 역시 거세게 저항했다만…. 그런데 사실 그냥 우연 + 멍청한 원나라의 병크였다.

 

일본과의 관계가 나빠지길 원하지 않았던 고려의 음모가 숨어있었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굳이 태풍이 있는 늦여름에 원나라를 끌고 갔겠는가? 실제로 일본 정벌을 위한 정동행성 설치와 그에 따른 선박 건조 등 온갖 뒤치닥거리를 담당한 것은 고려였으며, 이에 대한 원한이 꽤나 깊던 상태. 그나마 고려군은 생존률이 높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꽤 훌륭한(?) 음모론이다.

 

또다른 설로는 10만이나 되는 남송의 잔당군을 원정에 보낸 것으로 보건대 귀찮아서 처리하기 곤란한 남송 잔당을 태풍을 빌어 고기밥으로 던져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일본은 이 사건 이후로 오랫동안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라면서 자축하나, 정작 그 시발점인 당시 정권은 침략이 아니라 방어전인 만큼 몽골&고려 연합군과 싸운 무사와 영주들에게 별다른 봉토를 내려줄 수 없어서 무사나 영주들의 불만이 쌓이다 보니 얼마 안 지나서 몰락했다.

 

징기스칸 4에서는 한반도나 중국 대륙에서 일본으로 쳐들어 갈 때 가끔 걸리는 재해로 여기 걸리면 병사는 사실상 모두 전멸하는 끔찍한 재해이다.

일본으로 하면 훌륭한 방어막이나 발동 조건이 우연이라서 일정하지 않고 무엇보다 가끔이라 그렇게 유용하지는 않다. 사실 쳐들어가는 입장에서도 여름만 피해서 일본에 쳐들어가면 되고 여름에 쳐들어가더라도
병사들을 물 위에 띄우지만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낮은 컴퓨터는 계속 맞는다.

3 카미카제의 조악함

카미자제를 하는 조종사는 대다수 긴급양성된 나는 법만 배운 초보 조종사였다. 실제로 가미카제 대원들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수가 훈련 중 착륙 등 비행과정에서 사망했을 정도(…). 기본적인 이착륙도 제대로 안 되는 병아리 조종사들이, 바다에서 방향을 잡고 항로유지하는 고난이도의 교육을 제대로 받았을 리가 만무하다.

 

어차피 가서 죽을 건데 항로유지나 돌아오는 방법은 몰라도 되지 않냐?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목표까지 가는 길을 못 찾으면 당연히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귀환하는 법도 알고 있어야 했다.

이는 목표를 찾지 못 했을 경우로, 실제로 망망대해에서 이런 경우는 매우 흔한 일이다. 그리고 일제 말기에는 카미카제용 양성 조종사도 대단히 귀한 존재였다. 캐노피를 용접했다던가 돌아올수 없게 편도 연료를 넣었다던가 하는 사례는 대부분 허구이다.

 

결국 선도기로 숙련된 조종사의 선도가 미군의 촘촘한 초계망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필수였다.

즉, 카미카제를
시도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칠면조들을 선도해서 적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곳까지 선도해야 했는데... 이게 쉬운 일인지 어려운 일인지는 상상에 맡긴다. 자원 봉사라도 한 번 나갔던 경험이 있다면 알 것이다.

 

말기에는 본토 결전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쓸 수 있는 기체를 온존하기 위하여 남아있는 복엽 연습기(이른바 '빨간 잠자리')를 특공작전에 투입하였으며 석유 부족 상황에서 가솔린이 아닌 알콜 연료로도 가동시킬 수 있다는 점도 이 기체를 쓰기 좋았던 것 같다.

덧붙여서 이
연습기를 이용한 특공으로 구축함 1척을 격침시켰는데, 이러한 구식 복엽기의 경우에는 VT신관이 작동하지 않거나 기관포탄이 명중해도 관통할 뿐이고, 워낙 속도가 느려서 돌입이 용이해 의외로 전과를 올리기 쉬웠지만, 반면 워낙 저속기인데다가 무거운 폭탄을 억지로 탑재했기 때문에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사실 숙련된 조종사도 고속기동하는 군함을 명중시키기 어려운데, 신참 조종사들이 폭격에 성공하는 것은 사실상 기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닥돌하게 만들면 비슷한 수준의 조종사가 폭격하는 것보다는 명중률이 더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명중률이 고작 
 

게다가 쇼미더머니를 치면서 물자를 쏟아내고, 압도적인 인적자원을 가지고 있던 미국과 정상적인 대결을 펼쳐서는 이렇게 해도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냥 미친 짓!

 

실제 카미카제 특공대의 임무는 미 해군항공모함에 자살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함에 자살공격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초음속으로 날아드는 대구경 함포탄에 얻어 맞아도 작전이 가능하게끔 설계된 전함일진대, 카미카제가 탑재하는 탄두와 속력 따위로는 아스팔트 위에 내던져진 달걀 신세(…).

 

문제는 정작 조종사들이 날아가다가 아무 배나 보이면 그냥 헤딩했다는 것.

나는 법만 간신히 배운 신참 조종사들에게 까마득히 멀리 보이는 조그만 점이 어떤 배인지 알아 보는 적 함선 식별 등 고급 행동이 가능했을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 전방에서
레이더 피켓(picket) 임무라고 해서 레이더를 장착한 구축함들이 항모의 외곽을 둘러싸고 대공경계를 맡았는데, [5] 해당 임무를 하던 구축함들이 더 큰 피해를 본 편이다. 심지어 이 함선들은 나 항모 아님이라고 써붙여 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안습.

 

게다가 카미카제 특공대의 성과를 키운 것은 바로 미 해군 항공모함의 비행갑판이 목재였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실제 같은 시기 작전에 참여한
영국 항공모함도 카미카제 공격을 받았지만, 피해는 미 해군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이유는 영국 항공모함은 비행갑판에 장갑판이 깔려 있었고, 그 덕분에 카미카제
전투기가 들이받아도 그냥 납작한 팬케이크가 되고 말았으니...팬케이크된 잔해를 치워버리고 갑판 살짝 보수하고 물청소 한번하면 바로 작전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프라이팬에 뛰어드는 달걀'이라는 비유도 있다.

대신 미군 항모는 현지에서의 응급수리가 가능했지만 영국 항모는 제대로 된 항공폭탄이 명중하는 등 일단 한번 크게 손상되면 귀항해야 수리를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영국 항모들은 그 충격이 용골까지 그대로 전해지던 탓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뼈대가 뒤틀어지기 시작해서 결국 얼마 안가 전부 폐기처분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참고로 카미카제는 80~90도 사이의 고각에서 내려꽂힐 때 가장 높은 효율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사실상 급강하폭격이나 다름없는데 문제는 그정도 각도로 내려꽂게 만들려면
엄청난 숙련도가 필요했다는 것. 실제로 숙련된 조종사는 충돌하기 직전에 폭탄을 분리해서 피해면적을 늘리는(폭탄으로 인한 피해면적 + 항공기로 인한 피해면적) 신묘한 재주를 부리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조금이라도 제정신이 남아있는 군대라면, 이런 짓이 가능한 조종사에게는 당연히
평범하게 공격하고 어떻게든 생환해 올 것을 주문해야 한다(…).

 

그 때문에 차선책으로 45도로 내려꽂는 방법이 있었다. 가미카제 조종사들의 안습한 숙련도를 생각하면 이 정도 각도가 그나마 제일 확률이 높았다. 문제는 그 각도가 대공포에 요격당하기 딱 좋은 각도. 동료들의 희생 속에 간신히 적 전투기의 요격을 뚫고 들어왔지만, 대부분의 병아리 조종사들은 본능적으로 이 각도를 잡고 달려들다가 거의 대부분 대공포의 밥이 되기 일쑤였다.

 

때문에 카미카제는 수면에 최대한 붙어 대공포의 사각으로 들어가, 그 낮은 각도에서 그대로 격돌하는 방식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참조 고난도의 기동은 커녕 이착륙만 간신히 뗀, 기지로 복귀하는 법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햇병아리 조종사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공격방식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이렇게 수면에 붙어 비행한다면 바닷물이 창에 튀기게 되고, 이 때문에 오랜 시간 비행을 하면 바닷물의 염분 때문에 전방 시야가 막혀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4 카미카제의 전술적 의미

카미카제 이야기가 나올 때는 보통 엽기적인 비인간성에 중점을 둔다.

하지만 카미카제도 일본군이 전술로 사용한 만큼 전술로서의 의미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 해군의 공간전사에서도 일단 엄연한
전술로서 인정하고 그 가치를 다짜고짜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참조하자. 물론 그들이 겪은 정신적 충격과 인간적인 경멸을 빼 놓지는 않지만.

 

1942년 과달카날 전투 이전까지의 일본군 조종사의 숙련도는 대단히 높았다. 미해군 함재기들의 공격을 뚫고, 미칠듯이 솟구쳐 올라오는 대공포의 사격과, 미해군 함정들의 현란한 회피기동 속에서도 30~40% 명중률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둔다. 물론 미군 함재기의 조종사들도 만만찮은 솜씨를 보였으니 대등한 전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942~1943년을 거쳐 솔로몬 제도 상공에서의 처절한 소모전과, 1944년 6월의 필리핀 해전을 거치며 숙련된 일본 조종사들은 말 그대로 죽어 나갔다. 반면 미군은 300,000명(…) 정도로 조종사들을 본토에서 양성하고 있었다. 이 숫자는 14,000명 수준의 사단 20개 이상을 구성할 수 있는 수다.

 

더 무서운 건 1944년도부터 신규육성되는 조종사 수는 감소되기시작했는데 이미 보유한 조종사만으로도 몇년간은 문제 없다는 판단으로 비행학교를 줄이고 훈련시간을 늘려서 질적 향상을 도모하고 있었으며, 수십 회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베테랑들은 무조건 일선에서 물러나 후배들에게 자신의 생생한 노하우를 하루 종일 훈련시키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중간탈락율은 비슷했고 따라서 44년부터 신규양성된 조종사들들은 선배들보다 더욱 치열한 경쟁을 뚫고 조종사가 되었으며 기량도 더 훌륭했다. 따라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과 같은 일방적인 학살은 당연한 결과물인 것이다.

 

반면 카미카제의 명중률은 숙련 조종사가 소규모로 동원되었던 1944년 말 필리핀 전역(戰域)에서는 40~50%, 카미카제로 쓸 숙련 조종사마저 고갈되어 꼬꼬마 조종사들을 대규모로 투입했던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14%의 명중률을 기록한다.

350기의 함재기가 출격하여,
220기가 격추되고 명중탄은 단 1발 밖에 기록하지 못한 1944년 6월의 필리핀해 해전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나아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오키나와 전투에서 총 1,900대의 특공기가 돌입해 33척의 적함을 격침시켰다고 한다.

일단 자료에 따라서 차이가 난다. 침몰한 미군함도 21척내지 26척에 불과하다는 자료도 있다.

그 밖에 280척 내지 360척에 피해를 주었다. 다만, 이 피해도 대부분은 작은 상륙정이다. 그러나 이 자료를 순수하게 믿더라도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는 당연하게도 특공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특공기만으로 이루어진 편대를 조직했다면 당연히 돌입하기도 전에 모조리 격추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폭격기를 호위하는 전투기 편대처럼 특공기를 호위하기 위한 편대도 출격했고, 특공이 아닌 폭격만을 위한 항공기도 출격했다.

 

문제는 여기서 1,900대라는 것은 순수한 특공기만을 의미하는 것이고 호위 전투기 편대와 폭격을 하기위해 출격한 항공기는 제외한 수치라는 점이다.

애초에 공습의 성과란 투입한 항공기와 손실된 전체 항공기와 적의 피해를 비교해서 따지는 것이지 순수 특공기만의 손실만 계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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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특공기와 호위기를 합친 전체 일본군의 손실은 얼마일까? 놀랍게도 오키나와에서만 모두 7,830대 이상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약 8,000대의 항공기를 소모품으로 말아먹고, 겨우 33척을 격침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단순비교로도 항공기 280대와 겨우 1척을 맞바꾼 셈이다.

 

더 중요한건 격침시킨 33척 대부분이 군함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상륙정들이고, 나머지는 전략적 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구축함이라는 것. 정말 위협적인 항공모함은 제대로 격침시키지 못했다. 그나마 경항모보다도 못한 호위 항모 2척에 큰손실을 준건 사실이고, 이 2척의 호위 항모는 종전뒤 폐기 처분되긴 했다.

 

이것은 전혀 남는 장사가 아니다. 항공모함만 100척이 넘어가던 당시 미해군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감안하면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자료도 역시 자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

미공군 홈페이지에 의하면 2,800기의 특공기(오키나와 만이 아니라 일본의 모든 특공기 공격을 포함한 수치)의 공격에 의해 34척의 배가 침몰했다고 되어있다.

반면, 일본학 연구자인 Bill Gordon에 의하면 47척이라고 한다. 이런 차이는 수리중 침몰한 군함도 포함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차이가 나긴 한다. 그래봐야 오십보 백보. 일본군이 뻘짓을 했다는 진실을 뒤엎는 정도는 절대로 아니다.

 

오키나와 전투 기간 전사한 미군은 12,281명인데, 이중 4,907명이 카미카제에 의해 전사한 해군 소속의 수병들이다.

이것이 대단한 수치인가?
"금쪽같이 귀중한 자원인 항공기 1기" + "항공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욱 중요한 자원인 조종사 1명"을 고작 "수병 3명"과 맞바꾼 셈이다.

인명의 소중함의 문제 이전에, 전쟁의 냉정한 전략적/경제적 측면에서 이미 이것은
삽질 of 삽질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참고로 나치 독일군 최대의 삽질이라고 평가받는 보덴플라테 작전에서 독일군은 연합군기 340기를 격파하고, 독일군기 304기를 잃었다. 그럼에도 실패라고 평가받는데, 이것과 비교하면 8,000기나 손실했다는 건 무엇을 말하겠는가?[6]

 

시기상 전력적으로 크게 차이가 나므로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과달카날의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일본군은 통상공격만으로 99대의 비행기를 손실하고 정규 항공모함인 호넷을 격침시키고 엔터프라이즈를 중파시켰다. 이것과 비교하면 참으로 안습한 수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밖의 다른 요소는 별로 고려할 필요가 없다. 카미카제를 대비하기 위해 함재기들이 함대방공에 힘써 오키나와의 공중지원이 힘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이건 카미카제가 아니라 통상공격이라도 마찬가지이다. 8,000기가 통상공습을 해왔다고 생각해보자, 카미카제가 아니라도, 지상지원을 할 수 있을까? 이건 카미카제의 전술적 효과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공습의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펄펄 뛰는 커티스 르 메이를 여러 장군들이 간신히 제압(?)하고 B-29를 도시폭격을 잠시 돌려 비행장 폭격으로 돌린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카미카제가 특별히 대단해서가 아니라 공습의 규모 자체가 워낙 커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확실히 해군력 서열 2위인
영국 해군과의 비교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을 지닌 미군이 아니라면 이만한 규모의 공격을 버티지 못했겠지만... 이 또한 통상공격이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전력을 가미카제 요격에 쏟아 붓게 만들었고, 또 당시 일본군의 처한 현실상 통상공격보다는 분명 효과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약간 더 효과적이었다고 해도, 그 성과라는 것이
고작 상륙정 몇 척, 구축함 몇 척에 불과했을 뿐이니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었던 짓인지는 알아서 판단하자. 이런 초라한 결과는 결과론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압도적이기 그지없는 미군의 전력, 비숙련자 집단 & 쓰다 버린 비행기들을 닥닥 긁어 모인 기체의 성능 등 가미카제 자체의 한계를 감안하면 뻔한 결과였다.

 

굳이 더 의미를 찾자면 미 해군 수병들 중 후송되는 전투피로증 환자를 조금 더 늘렸다는 것 정도(…)?[7] 가뜩이나 오랜 전쟁으로 지친 미 해군 수병들이었기에 몇 달 간 지속된 가미카제 공습상황으로 피로증 환자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촘촘하기 그지없는 함재기들의 전투초계비행(CAP)과 스크램블(긴급요격)을 감안하면, 가미카제의 명중률 10여 %는 수병들
눈에 보이는 가미카제 2기 중 1기는 자신의 배로 날아든다는 의미였으니 수병들에게는 확실히 무서운 존재였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전쟁이든 당사자에게 무섭기는 마찬가지고... 당연히 미 해군의 수병 운용에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카미카제가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이딴 전술에 의지함으로서 일본군 스스로 더 효과적인 방법을 망각해 버렸다는 점에 있다.

카미카제를 작전으로서 사용한다는건 조종사의 기량향상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으며, 항공기 발전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다. 애초에 적의 군함에 들이받을 항공기를 뭐하러 발전시킬 필요가 있을까?

 

확실히 처음 베테랑 조종사들에 의한 카미카제 작전은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이는 지속적인 출혈과 같고 일본군은 여차하면 카미카제를 쓰면 되니까...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항공기 발전과 조종사의 기량향상에 힘을 쓰지 않았다.

당장 카미카제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진건 1944년 10월부터지만, 작전상으로서의 검토는 1942년 미드웨이 해전부터였고, 특공병기가 처음 만들어진건 1944년 3월이다.

일본의 함상전투기는 끝까지
제로센뿐이었는데, 이처럼 기술 발전이 뒤처진데는 이런 안일한 생각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카미카제 같은 전술에 의지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항공기 기술을 발달시키고, 조종사 기량을 향상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좀 더 효과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미군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카미카제에 의지함으로서 이런 가능성을 스스로 부정해 버렸다.

5 카미카제의 전략적 의미

더군다나 카미카제의 더 큰 의미를 생각해보면 카미카제의 가치는 대번에 부정될 수밖에 없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런 짓까지 해가며 전쟁을 지속해야 하는가?

 

카미카제 공격으로 미국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나? 아니면 휴전이나 조건부 항복이라도 이끌어낼 수 있었나? 아니다. 대본영을 위시한 군인/관료/재벌들의 기득권을 잠깐이라도 더 유지해 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자살공격이었을 뿐이다. 다른 방송도 아닌 NHK 특집 다큐멘터리에서도 지적한 내용이다.

 

이들은 외교관 등 그나마 제정신 박힌 사람들이 "이제 다 끝났으니 인정하고 항복하자"고 했을 때도 "1억을 다 죽여서라도 항복할 수는 없다"며 뻗대는 시늉만 하다가, 덴노가 GG치자 바로 닥치고 버로우탔던 자들이다.

즉 일본 군부는 국민을 지키기 위한 군대가 아니라 덴노를 명분으로 삼아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국민을 이용했던 집단일 뿐이다.

결국 카미카제란
내 손에 안들어온다면 차라리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테다나 다름없는 유치한 만행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온갖 비장한 똥폼을 잡아대던 전쟁론자들 중
할복 등으로 스스로 책임을 진 자는 극히 드물다. (할복이 제대로 된 책임이라고는 전혀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일본 문화권 안에서는.) 대부분은 종전 후에도 잘만 살아남아 약삭 빠르게 기득권을 유지해 갔으니 그야말로 천하의 개쌍놈이라는 말 밖에는...

 

1945년 일본의 상황은 누가 보아도 닥치고 항복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조국을 재건하기 위한 젊은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하는 것이 위정자들의 의무이다.

더구나 자동차
운전면허 소유자도 그리 많지 않았던 일본에서[8][9] '미숙하나마 비행기 조종이 가능한' 젊은이가 지니는 의미는 상상 외로 큰 것이다.

군사전략 이전에
정치전략적으로, 상식적으로 도저히 선택해서는 안 되었던 선택지가 가미카제였던 것이다. 질좋은 노동력이 넉넉하였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 짓 한 번에 일본이라는 나라의 재기가 영영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백번 양보하여 가미카제가 전술적으로 의미가 있었던 행위였고, 후손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애국적 행위였다고 쳐도 절대로 미화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일본의 극우라는 자들은 이런 진실은 철저히 외면한 채 인간어뢰
가이텐 등 여러 가미카제 병기들을 이곳저곳에 전시하며 미화하고 추억하며 왜곡할 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과거의 이런 미친 짓에 "아예 관심이 없다"는 게 더욱 심각하다.
언제든지 선동당해 이런 미친 짓을 되풀이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6 카미카제의 이야기거리

카미카제 특공대원으로 지명되어서 출격했다고 다 죽은 건 아니라서, 간혹 생환해 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시기를 놓쳤거나 기계 고장, 컨디션 불량, 기후 불량 등으로 출격이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돌입 직전에 격추되어 포로가 되는 등등의 이유로 생환한 사람들도 제법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상관들에게서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심지어는 살아 돌아온 카미카제 특공대원을 다시 출격시켜서 확실하게 자살돌격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에 관련된 전장 도시전설(?)도 있다. 한 카미카제 파일럿은 적을 향해 날아가다가 우연히 계기판안에 자리잡은 벌레를 보았고. 찰나 생명의 귀중함을 깨닫게 되어서 자신과 벌레가 살기 위해서 원래 적기까지 갈 정도로 넣은 얼마 안되는 연료를 적기가 아닌 무인도로 향해 돌려서 무인도에서 살기 시작했다는 카미카제 파일럿의 이야기도 있고...

 

특공대원으로 생환한 이들 중 유명한 사람으로는 니시무라 아키라(탤런트), 내각 관방장관 겸 외무대신과 후생성 장관을 역임한 소노다,

항공자위대 교관 및
전일본공수 기장으로 반전단체 대표인 시다 등이 있으며, 반사회적인 행동을 한 사람 중에는 <천하제일회>의 우치무라 켄이치, 특공대원으로 자신을 포장한 범죄자로는 <3억엔 보험금 살인사건>의 아라키 호미, 츠루타 코지 등이 있다.

 

1944년 10월 12일~15일에 대만 앞바다에 미 제3함대가 나타나자 역시 카미카제 공격을 시행했고, 제26항공전대 사령관 아리바 소장이 직접 카미카제 대원이 되어 전사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런데 이 전투 결과 일본은
카미카제 공격 = 격침으로 여겨버려 '항모 11척 격침, 8척 대파' 라고 선전해 일본 국민들을 잠깐 환호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 소식을 윌리엄 홀시 제독은 코웃음을 치며...

 


라는 유명한 전문을 보내기도 했다. 실제로 미군의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

 

기쿠스이 작전 등 카미카제 공격을 일선에서 총지휘했던 우가키 마토메 제독도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의 소식을 듣자 몇명의 부하를 이끌고 카미카제 공격에 나섰고, 당연히 사망했다.

이 때문에 이 사람에 대해서 가미카제를 입안하고 실행했던 '책임자' 중 '진짜로 최대한 책임을 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 같은데 이건 대착각이다.

그는 이 카미카제에서 부하 조종사에게 그 자살 폭격기를 조종하게 했고(...) 자기는 그 뒷좌석에 타서 편하게 자살 돌격했다.그 때문에 그 부하 조종사는 전쟁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정신나간 상관의 명예로운 자살놀음에 강제 동행당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 부하 조종사의 유가족은 "정말 책임을 지고 싶었다면 혼자서 죽어야 했는데 왜 죄없는 부하를 끌고 갔냐."면서 맹비난했다.

백번 옳은 지적이라 하겠다.결론은 우가키 마토메 이 자도 쓰레기.이 외에도 가미카제를 비롯한 전쟁놀음에 정말로 책임이 있는 자들 대부분은 잘 살아 남았고, 이후로도 잘 먹고 잘 살았다(…).

 

또한 조선인도 카미카제기에 태웠다고 한다.


귀축도, 화사 등, 1940년대 시인 중 한 명인 미당
서정주는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필명으로 '매일신보'에 '오장 마쓰이 송가(松井五長 訟歌)'라는 시를 발표하여 레이테 만 해전 배경의 전시선전 및 카미카제의 우월성을 찬양하는 병크를 터뜨렸다.

서정주는 이 시 외에도 '일장기 앞에서',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 등 친일 작품을 의외로 많이 발표했다. 일빠라고 주장하는 축과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하는 축이 현재까지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10]. 판단은 알아서. 어쨌거나 서정주는 이 시로 2002년 '일제하 친일 반민족행위자 1차 명단(708명)'에 들어갔다.

 

전투비행 시뮬레이션 IL-2 슈투르모빅 1946에도 구현돼 있는데 이쪽은 맞추기가 무진장 어렵다. 사실은 .50을 다운모델해서 그런거다. 20 mm 가 달린 콜세어로 요격나가면 우수수 떨굴 수 있다.

7 진짜 카미카제?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12월 8일, 필리핀 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급유중이던 미 태평양 함대 제3함대가 세력이 비교적 약한 열대성 저기압[11]으로 잘못 예측한 태풍의 직격을 당했다.

 

이로 인해 홀시는 함대의 구축함 3척 침몰, 21척 대파(이 중 9척 수리불가로 폐함 처리), 소속 항공모함들의 함재기 150여 기 손실, 전함, 순양함 등 대형함들도 크고 작은 손상을 입고, 약 800명의 사상자를 낸 후에 예정되었던 필리핀 작전 항공지원 계획을 중단하고 전열에서 이탈해야 했다.

게다가 이건 홀시 제독이 기상예보를 생까고(그러니까 "태풍? 그 정도 태풍에 별 일 나겠어?") 위치를 고수하다가 입은 피해라서
레이테 만 해전때 오자와 제독한테 낚인 것과 더불어 더 까였다.

 

항공기 150기와 구축함 24척의 손실에 대형함들 역시 크고 작은 손상을 입은 이 피해는 웬만해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의 마지막 카미카제라 불러줄 법 하겠으나 상대는 바로 쇼미더머니 미국. 구축함 24척과 함재기 150기는 본국에서 몇주면 찍어내는 물자에 불과했다.

물론 이로 인해 태풍 정보의 수집과 대응이 해군의 중요한 숙제가 되었고, 이것이 현대 태풍예보체계 구축의 중요한 토대 중 일부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1945년 6월 4일에는 볼티모어급 순양함인 피츠버그가 괌 주변 해역에서 폭풍을 만나서 함수가 완전히 잘려나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인명 피해는 없었고, 침몰 위기에서 벗어나서 괌으로 피항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45년,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때와 같은 카미카제가 일어날 뻔 하기도 했다.

종전식이 끝난 10월에 오키나와 동부에 정박한 미해군 선단을 태풍이 덮쳐서 꽤 피해가 났는데, 문제는 이 정박지는 일본본토로의 침공이 시작될 경우
큐슈 침공 부대가 머무를 정박지라는 것이다.

만약 계획대로 상륙이 이루어졌다면 미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큐슈 침공에 대해서는
몰락 작전 항목 참조.

8 막장 위에는 막장이... 있다

위에서 보듯이 카미카제 작전은 기본적으로 작전이라고 이름붙이기 곤란한데다가, 기술 및 장비면에서도 원래 자살공격용이 아닌 병기를 임시로 땜빵질한 것에 불과하여 목적달성을 더 힘들게 한 점이 있었다. 이는 일본군 수뇌부도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막장 일본군답게 이들이 손을 댄 것은 카미카제 전용으로 만들어진 자폭 병기를 개발해서 투입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병기가 MXY-7 오카신요, 가이텐이다.

 

오카의 경우에는 자폭공격에만 중점을 맞추고, 기존의 카미카제가 폭탄적재까지 해서 안그래도 느린 비행기가 더 느려진다는 단점을 개선했다고 만든 유인유도식 미사일이지만, 결론적으로는 조종하기 엿같은데다가 사정거리도 짧아서 이걸 싣고 날아오른 폭격기같은 모기까지 같이 격추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신요는 한마디로 말해서 폭탄을 가득 실은 자살용 모터보트. 덕분에 조종하기가 힘들며, 파도가 조금만 쳐도 운항을 못하고, 무게중심이 너무 앞으로 쏠려서 제멋대로 움직여서 팀킬이나 하는 병기였다.

 

그 외에도 어뢰를 이용한 자폭공격도 심도있게 논의되었는데, 그 결과 개발된 것은 남아도는 어뢰를 약간 개조하여 만든 가이텐. 사실 유인 어뢰 공격은 이탈리아의 마이아레나 영국의 채리엇 등이 이미 있었으나, 이것들은 저속으로 추진되며 운반자가 어뢰위에 올라탄 뒤 거리를 확보후 폭파시키는 성질이라 생존률이라도 어느정도 보장되었지만, 카이텐의 경우는 내부 탑승식이라 외부에서 문을 닫아버리면 탈출이 불가능했으며, 방수가 충분히 되지 않거나, 구조자체가 약하여 우그러든다거나, 혹은 산소부족으로 조종불능상태에 빠진다거나 해서 명중률조차 앞선 둘보다 훨씬 떨어졌다. 그런데 개조에 소모되는 자원은 별 차이도 없었다고 하니 이뭐병.

 

그리고 지상전에서도 카미카제 전법은 계속 사용되었다.

원래부터 일본군의 장비가 빈약해서 전투능력이 떨어지므로
반자이 어택이나 대전차총검술같은 막나가는 작전이 수행되었지만, 전쟁 말기에 이르자, 자돌폭뢰갈고리 폭탄같이 사용하면 바로 터져서 저승가는 티켓을 발급하는 무기가 등장하더니, 드디어 아무 폭탄이나 들고 전차에 돌격해서 자폭하는 대전차 자폭조가 정식으로 등장하게 된다.

당장
8월의 폭풍 작전에서 소련군관동군에게 전차 및 자주포, 돌격포 78대와 야포 및 박격포 232문을 잃었는데, 소련군의 대부분의 대전차 손실은 일본군 대전차 자폭조에 의한 것으로 소련군은 대전차 자폭조를 스메르트니키(smertnik)라고 부르며 치를 떨었다.

소련군은 이 망할 자폭병들을 막기위해 평균수명 2주의 위엄을 자랑하는(...)
탱크 데산트 전술을 다시 꺼내들어야 했다. 이뭐병 병맛전술에는 병맛전술로!

9 타국의 사례

타국에서도 이러한 개념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일본의 카미카제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일본의 것들은 인간은 '유도장치'에 불과하다는 개념이었고, 나머지는 위험한 곳으로 인간을 '수송만' 하는 개념/혹은 진짜 답이 없어서 뭐라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군에게 가혹행위와 더불어 얼마나 인명경시 풍조가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덕분에 기본적으로 동양인에 대한 편견이 심한 편이던 서양인들에게 그걸 더 심어주는 역효과만 낳았다.

9.1 독일

독일도 이와 비슷한 아이디어가 제시됐는데, 다행이도 이쪽은 유인 항공기가 아니라 폭탄을 가득 실은 무인폭격기 위에 전투기를 얹은 디자인으로, 목표 지점까지 다다르면 조종을 하던 전투기가 폭격기와 분리되어 귀환을 하고 폭격기는 목표에 충돌해서 자폭하게끔 하는 방식이었다. 일명 미스텔이라고 불리며, 주로 Bf-109나 Fw-190에 Ju-88 폭격기를 결합하는 것이었지만, Me-262 제트전투기에 Ar-234 제트폭격기를 결합하는 계획도 존재했다. 또한 V-1 로켓을 개조해 유인으로 조종하는 것도 있었다.

 

유인 V-1 로켓을 주장한 사람은 독일의 유명 여성 조종사 하나 라이치(Hanna Reitsch, 1912.3.29 – 1979.8.24)와 오토 스콜체니.

 

하나 라이치는 세계 최초의 여성 테스트 파일럿이자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종을 조종한 여성으로 수륙양용기, 헬리콥터, 제트추진비행기, 로켓추진비행기, 심지어 V-1까지 조종했다. 특히 V-1은 실험 단계에서 자꾸만 발사 직후 추락하는 일이 이어지자 원인 및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탑승했던 것.

그 결과 V-1의 비행 불안정성이 확인되어 대대적인 설계 개수 끝에 실전 투입이 가능해졌다. 여담이지만 이 아줌마는 히틀러를 마지막으로 본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다.

당시 제6항공군 사령관 로베르트 폰 그라임
상급대장과 함께 히틀러를 탈출시킬 작정으로 비행기를 소련군이 바글대는 베를린에 뛰어들어 총통관저 앞 공터에 비행기를 착륙시켰던 것.

 

유인 항공기를 사용하지 못한 것은 아돌프 히틀러가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유인항공기 계획은 '충돌 직전에 조종사가 탈출하는' 개념이었는데도 인명 존중 문제로 반대했다고 한다. "자살 공격은 독일 민족과 맞지 않다." 라면서.

 

그 "닥치고 사수"만 주문하여 수많은 전황을 그르쳤고, 종말에 이르러서는 "게르만의 영광을 위해 죽어라"를 주문했던 희대의 학살자 히틀러조차도 이러한 의견을 낼 지경이었는데, 이딴 것을 밀어붙인 일본군은 대체 뭐하는 종자들이었을까(…).

 

그러나 실험은 해 본다고 V-1 로켓을 개조한 것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1945년 전쟁 종결 직전 연합군이 베를린 가까이 진격하던 시점에 기어이 히틀러를 설득해
[12] 엘베 특별공격대가 조직되어 히틀러가 반대했던 유인 항공기에 의한 "자살공격 비슷한 시도"가 감행되기도 하였다.

다만 일본의 그것처럼 조종사와 함선이 황천길 길동무로 동행한다기보다, 아군기를 적기와 충돌시키면서 조종사는
낙하산으로 탈출한다는 방식이라 그나마 동반자살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물론 작전 개념상 그렇다는 것일뿐 현실은….

 

일단 미스텔의 경우 사실 2차 대전 말기에 나온 아이디어인 만큼 독일측에선 불필요한 존재인 남은 폭격기의 유일한 활용 용도였을테고 또 잘만 맞춘다면 꽤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었겠지만 활약 기록이나 그런건 찾긴 힘들다.

성공사례는 1945년 3월 오데르 강에서 소련군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교량 파괴에 투입된 것들 중 일부밖에 없다.

그 외의 다른 자살특공기는 실질적으로 투입되지 못했거나, 투입되더라도 극소수의 희생과 훨씬 적은 전과만을 거둔 채 흐지부지되었다.

9.2 러시아

소련 공군에서는 여성 조종사로만 이루어진 폭격기 부대인 제588 폭격연대 가 한밤중에 독일 비행장을 습격하던 전술이 있었는데 어떤사람은 이것이 자살폭탄이나 다름없었다고는 주장하나 이것은 생존율은 낮을지 몰라도 생환을 전제로 한 것이기 처음부터 자살공격을 전제로 한 일본군과는 개념이 다르다.

이 공격에 사용된 기체인 폴리카르포프
Po-2는 시속 152km수준의 초저속비행기였지만, 야간인데다가 이렇게 저속, 저고도 비행을 하니, 고속인 독일 전투기들이 제대로 요격을 할 수 없어서[13] 생각보다도 생존율은 높았다.

그래서 유명한
An-2가 이 비행기의 개념을 가지고 만들었다.

독일군은 이들을 밤의 마녀들 (Nachthexen)이라고 말하며 두려워했고, 이 비행대에서 소련영웅이 여러명 나왔다.

여담이지만 한국에서 많이 쓰던 러시아어 강독 교재(русский язык для всех)에도 이들의 활약상이 나온다. 또한
수리부엉이에도 이들의 활약상이 나온다. 나중에 한국전쟁 당시에도 PO-2가 성가시게 하여서 이때의 별칭은 불침번 찰리.

9.3 영국, 이탈리아

영국이탈리아 해군도 가이텐 비스무리한 특수 어뢰정을 만들었다.

이쪽은
조종사는 돌아올 수 있도록 설계했고, 이걸 타고 이탈리아 군항에 잠입했던 영국 해군 승무원들은 자기들이 폭탄을 설치한 군함에 포로로 잡혀서 구조된(...) 경험을 했으며, 티르피츠를 앉은뱅이 오리 꼴로 만드는데도 나름대로 공을 세웠다.

이탈리아 해군 승무원들은 아예 이걸 써서
유보트 축소판을 찍었다. 영국 군함도 가라앉히고 작전에 참가한 사람들도 모두 살아서 돌아왔다.

9.4 한국

한국전쟁 직전 38선 부근에서의 군사충돌때, 국군에서 스스로 폭탄을 안고 자살공격을 하여 북한군의 토치카를 부쉈다는 육탄10용사도 조작 의혹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조작/진실 논란을 떠나서 카미카제에 대한 미화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 외
춘천-홍천 전투에서도 육탄전이 있었지만, 이 쪽은 투입된 인원들이 대부분 그 전투에서 생환했다.

물론 이때 국군이 처한 상황이
37mm포를 탑재한 M8 그레이하운드가 최강의 기갑차량이었다는 건 감안하자. M1 바주카도 T-34/85를 잡기에 부족해서 부랴부랴 M37 슈퍼 바주카를 도입한 뒤에 겨우 상대할 수 있었고, 대전차포도 화력이 부족했고, 장비는 없는데 안막을 수도 없으니 답이 없다. 북한 공군도 전쟁 후반기에 몇몇 조종사들이 인천의 유류저장시설에 자폭공격을 시도한 적이 있다.

9.5 미국

미국의 경우에는 폭약을 가득 채운 폭격기에 일단 승무원이 탄뒤에 이륙, 일정 고도에서 탈출한 뒤 이 무인상태가 된 폭격기를 뒤따르는 항공기가 무선으로 조종하여 목표물에 들이받게 한다는 아프로디테 계획이 연구된 적 있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항목 참조.

 

9.11 테러 당시, 테러범들에게 납치당한 유나이티드 93편을 격추시키기 위해 긴급 출격했던 미 공군의 F-16 전투기도 자폭 공격을 감행하려 했다고 한다. 다만 이 경우에도 당시 출격했던 전투기들은 훈련 비행을 마치고 귀환했다가 바로 출격한 상황이라, 정말 답이 없던 상황이었다.

10 아직 유용

아무튼 이 자폭공격이 테러리스트들이나 반군들에게는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방식은 다르지만 특히
알 카에다탈레반이 몸에 폭발물 두르고 특정장소에 가서 자폭!! 거기다 이들은 10대 어린이에게 자폭은 천국행같은 교육을 시켜 미군과 자폭하고 있다.

덕분에 미국 등의 서방국에게 심각한 인명손실을 안겨줬다. 거기다가 같은 자국의 민간인이 더 큰 피해를 보았고, 미군의 적대감만 더 높여놨다.

물론 그게 도움이 될 리는 1미크론도 없다. 저 항목들을 보면 알겠지만 이놈들도
일본군만큼이나 정상이 아닌 집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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