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카제(神風)의 유래와 전술전략적 의미 그리고 타국 사례들
카미카제(神風)의 유래와 전술전략적 의미 그리고 타국 사례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 구사한 전략
인명과 장비를 경시하는 군대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Contents1 개요 2 유래 3 카미카제의 조악함 4 카미카제의 전술적 의미 5 카미카제의 전략적 의미 6 카미카제의 이야기거리 7 진짜 카미카제? 8 막장 위에는 막장이... 있다 9 타국의 사례 9.1 독일 9.2 러시아 9.3 영국, 이탈리아 9.4 한국 9.5 미국 10 아직 유용 11 각종 매체에서의 카미카제 12 기타항목 12.1 비트매니아 IIDX의 수록곡 12.2 칵테일 12.2.1 재료 12.2.2 만드는 법 12.3 메이드가이 12.4 D'espairsRay의 악곡
1 개요 ¶
일본군 사상 최악의 병크.
일본 해군이 미국에게 박살이 나면서 나온 대안 중 하나로, 항공기를 이용해 주로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등의 군함에다가 박아서 항공기 하나와 조종사 하나를 대가로 군함 하나를 날려버린다는 계획이다.
사실, 자포자기해서 '될 대로 되라'식 전술을 사용하는 경우에 자살돌격을 하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앞의 사례가 현장에서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조종사 개인이 선택한 최후의 선택지인데 비해서 이 카미카제는 정식 작전 계획(…)이었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서, 자발적인 희생이 아니라 희생을 강요한 것이란 말이다.
원래 일본쪽의 정식 명칭은 신푸(神風)특공대[2]였다. 하지만 어떤 기자가 어설픈 일본어 실력으로 카미카제 특공대라고 읽고 그렇게 써 버려서 저 이름이 더 유명하게 알려졌고, 나중에는 "일본뉴스"의 내레이션에서도 "카미카제"라고 읽게 되어 "kamikaze"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행동이 이루어지게 된 이유는 아래와 같다.
결국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군이 품고 있는 부조리함의 결정체. 어찌나 말도 안 되는 작전인지 처음 작전 계획을 들은 해군 장관마저도 어이가 없어서 "이딴 걸 작전이라고 내놨냐?"고 따졌으며, 첫 카미카제 출격 때는 호위를 요청받은 부대의 지휘관이 "그딴 미친 짓에 붙일 호위 따윈 없음."이라며 대놓고 씹었고, 기어이 카미카제 전술이 정식 작전으로 채택된 회의에서도 일본군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꽤 많은 지휘관들이 반대했으나 전황이 너무나 막장이었던지라 결국 통과되고 말았다고 한다.
미군은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고 부르는, 1944년 6월의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해군의 항공모함기동부대가 괴멸당한 이후 1944년 7월 21일, 일본의 군령부는 '대해지 제431호'에 의거하여 특공작전을 정식으로 채용하였으며, 아예 그냥 일단 닥돌해서 죽어야 하는 가이텐, 신요, MXY-7 오카 같은 "특공병기"까지 등장하면서 상황이 점점 막장으로 치닫게 된다.
더 기가 막힌 게, 이딴 '자살행위'는 무사도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것이었다. 할복이나 옥쇄는 어디까지나 "명예를 택했다면 최후의 한 사람까지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어라."였지 "네 목숨은 갖다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멋지게 미군 대공포화를 피하고 무사히 미 해군 항공모함에 착륙해서 항복했다고 한다.
미국 수병들도 이러한 비상식적인 전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실 일본의 기술이나 자원, 시간, 그 어느 것도 절박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에 신형기 양산도 물건너간 상황이었겠지만, 독일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저런 미친 짓을 할 인력과 자원으로 시덴카이같은 신형기를 양산[3]하고 조종사 육성에 신경을 썼다면 좀 더 나은 결과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 유서를 쓴 대원의 말마따나 언 발에 오줌누기였을 뿐, 절대로 현명한 타개책이 아니었다.
게다가 특성상 자살공격이었기에 숙련된 조종사라도 잘 해봐야 1회의 성공적인 공격으로 끝난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미국에 비해 훨씬 적은 인적, 물적자원 때문에 이런 식으로 병력을 낭비해서는 안되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말도 안되는 짓에 자원을 낭비해버렸다.
태평양 전선이 아닌 만주 쪽에서도 소련군을 상대로 간간히 실시했다는 말도 있다. 쿠릴 열도에 상륙하는 소련군의 상륙정을 대상으로 자폭한 전투기도 있었다고 한다. 2 유래 ¶神風로 신의 바람이라는 뜻이다. 몽골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이 주도한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서 이들이 바다를 건너오던 중 태풍에 싹 쓸려버린 것을 말 그대로 신의 가호라고 생각해서 생겨난 말로 두 번에 걸친 원정 모두 이 태풍 때문에 작살났다. 물론 일본 역시 거세게 저항했다만…. 그런데 사실 그냥 우연 + 멍청한 원나라의 병크였다.
일본과의 관계가 나빠지길 원하지 않았던 고려의 음모가 숨어있었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굳이 태풍이 있는 늦여름에 원나라를 끌고 갔겠는가? 실제로 일본 정벌을 위한 정동행성 설치와 그에 따른 선박 건조 등 온갖 뒤치닥거리를 담당한 것은 고려였으며, 이에 대한 원한이 꽤나 깊던 상태. 그나마 고려군은 생존률이 높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꽤 훌륭한(?) 음모론이다.
또다른 설로는 10만이나 되는 남송의 잔당군을 원정에 보낸 것으로 보건대 귀찮아서 처리하기 곤란한 남송 잔당을 태풍을 빌어 고기밥으로 던져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일본은 이 사건 이후로 오랫동안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라면서 자축하나, 정작 그 시발점인 당시 정권은 침략이 아니라 방어전인 만큼 몽골&고려 연합군과 싸운 무사와 영주들에게 별다른 봉토를 내려줄 수 없어서 무사나 영주들의 불만이 쌓이다 보니 얼마 안 지나서 몰락했다.
징기스칸 4에서는 한반도나 중국 대륙에서 일본으로 쳐들어 갈 때 가끔 걸리는 재해로 여기 걸리면 병사는 사실상 모두 전멸하는 끔찍한 재해이다. 3 카미카제의 조악함 ¶카미자제를 하는 조종사는 대다수 긴급양성된 나는 법만 배운 초보 조종사였다. 실제로 가미카제 대원들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수가 훈련 중 착륙 등 비행과정에서 사망했을 정도(…). 기본적인 이착륙도 제대로 안 되는 병아리 조종사들이, 바다에서 방향을 잡고 항로유지하는 고난이도의 교육을 제대로 받았을 리가 만무하다.
어차피 가서 죽을 건데 항로유지나 돌아오는 방법은 몰라도 되지 않냐?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목표까지 가는 길을 못 찾으면 당연히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귀환하는 법도 알고 있어야 했다.
결국 선도기로 숙련된 조종사의 선도가 미군의 촘촘한 초계망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필수였다.
말기에는 본토 결전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쓸 수 있는 기체를 온존하기 위하여 남아있는 복엽 연습기(이른바 '빨간 잠자리')를 특공작전에 투입하였으며 석유 부족 상황에서 가솔린이 아닌 알콜 연료로도 가동시킬 수 있다는 점도 이 기체를 쓰기 좋았던 것 같다.
사실 숙련된 조종사도 고속기동하는 군함을 명중시키기 어려운데, 신참 조종사들이 폭격에 성공하는 것은 사실상 기적에 가까웠다.
실제 카미카제 특공대의 임무는 미 해군의 항공모함에 자살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함에 자살공격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초음속으로 날아드는 대구경 함포탄에 얻어 맞아도 작전이 가능하게끔 설계된 전함일진대, 카미카제가 탑재하는 탄두와 속력 따위로는 아스팔트 위에 내던져진 달걀 신세(…).
문제는 정작 조종사들이 날아가다가 아무 배나 보이면 그냥 헤딩했다는 것.
게다가 카미카제 특공대의 성과를 키운 것은 바로 미 해군 항공모함의 비행갑판이 목재였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참고로 카미카제는 80~90도 사이의 고각에서 내려꽂힐 때 가장 높은 효율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차선책으로 45도로 내려꽂는 방법이 있었다. 가미카제 조종사들의 안습한 숙련도를 생각하면 이 정도 각도가 그나마 제일 확률이 높았다. 문제는 그 각도가 대공포에 요격당하기 딱 좋은 각도. 동료들의 희생 속에 간신히 적 전투기의 요격을 뚫고 들어왔지만, 대부분의 병아리 조종사들은 본능적으로 이 각도를 잡고 달려들다가 거의 대부분 대공포의 밥이 되기 일쑤였다.
때문에 카미카제는 수면에 최대한 붙어 대공포의 사각으로 들어가, 그 낮은 각도에서 그대로 격돌하는 방식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4 카미카제의 전술적 의미 ¶카미카제 이야기가 나올 때는 보통 엽기적인 비인간성에 중점을 둔다.
1942년 과달카날 전투 이전까지의 일본군 조종사의 숙련도는 대단히 높았다. 미해군 함재기들의 공격을 뚫고, 미칠듯이 솟구쳐 올라오는 대공포의 사격과, 미해군 함정들의 현란한 회피기동 속에서도 30~40% 명중률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둔다. 물론 미군 함재기의 조종사들도 만만찮은 솜씨를 보였으니 대등한 전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942~1943년을 거쳐 솔로몬 제도 상공에서의 처절한 소모전과, 1944년 6월의 필리핀 해전을 거치며 숙련된 일본 조종사들은 말 그대로 죽어 나갔다. 반면 미군은 300,000명(…) 정도로 조종사들을 본토에서 양성하고 있었다. 이 숫자는 14,000명 수준의 사단 20개 이상을 구성할 수 있는 수다.
더 무서운 건 1944년도부터 신규육성되는 조종사 수는 감소되기시작했는데 이미 보유한 조종사만으로도 몇년간은 문제 없다는 판단으로 비행학교를 줄이고 훈련시간을 늘려서 질적 향상을 도모하고 있었으며, 수십 회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베테랑들은 무조건 일선에서 물러나 후배들에게 자신의 생생한 노하우를 하루 종일 훈련시키는 상황이었다.
반면 카미카제의 명중률은 숙련 조종사가 소규모로 동원되었던 1944년 말 필리핀 전역(戰域)에서는 40~50%, 카미카제로 쓸 숙련 조종사마저 고갈되어 꼬꼬마 조종사들을 대규모로 투입했던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14%의 명중률을 기록한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총 1,900대의 특공기가 돌입해 33척의 적함을 격침시켰다고 한다.
문제는 여기서 1,900대라는 것은 순수한 특공기만을 의미하는 것이고 호위 전투기 편대와 폭격을 하기위해 출격한 항공기는 제외한 수치라는 점이다.
그럼 특공기와 호위기를 합친 전체 일본군의 손실은 얼마일까? 놀랍게도 오키나와에서만 모두 7,830대 이상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약 8,000대의 항공기를 소모품으로 말아먹고, 겨우 33척을 격침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단순비교로도 항공기 280대와 겨우 1척을 맞바꾼 셈이다.
더 중요한건 격침시킨 33척 대부분이 군함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상륙정들이고, 나머지는 전략적 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구축함이라는 것. 정말 위협적인 항공모함은 제대로 격침시키지 못했다. 그나마 경항모보다도 못한 호위 항모 2척에 큰손실을 준건 사실이고, 이 2척의 호위 항모는 종전뒤 폐기 처분되긴 했다.
이것은 전혀 남는 장사가 아니다. 항공모함만 100척이 넘어가던 당시 미해군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감안하면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자료도 역시 자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
오키나와 전투 기간 전사한 미군은 12,281명인데, 이중 4,907명이 카미카제에 의해 전사한 해군 소속의 수병들이다.
시기상 전력적으로 크게 차이가 나므로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과달카날의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일본군은 통상공격만으로 99대의 비행기를 손실하고 정규 항공모함인 호넷을 격침시키고 엔터프라이즈를 중파시켰다. 이것과 비교하면 참으로 안습한 수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밖의 다른 요소는 별로 고려할 필요가 없다. 카미카제를 대비하기 위해 함재기들이 함대방공에 힘써 오키나와의 공중지원이 힘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이건 카미카제가 아니라 통상공격이라도 마찬가지이다. 8,000기가 통상공습을 해왔다고 생각해보자, 카미카제가 아니라도, 지상지원을 할 수 있을까? 이건 카미카제의 전술적 효과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공습의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펄펄 뛰는 커티스 르 메이를 여러 장군들이 간신히 제압(?)하고 B-29를 도시폭격을 잠시 돌려 비행장 폭격으로 돌린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전력을 가미카제 요격에 쏟아 붓게 만들었고, 또 당시 일본군의 처한 현실상 통상공격보다는 분명 효과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굳이 더 의미를 찾자면 미 해군 수병들 중 후송되는 전투피로증 환자를 조금 더 늘렸다는 것 정도(…)?[7] 가뜩이나 오랜 전쟁으로 지친 미 해군 수병들이었기에 몇 달 간 지속된 가미카제 공습상황으로 피로증 환자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카미카제가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이딴 전술에 의지함으로서 일본군 스스로 더 효과적인 방법을 망각해 버렸다는 점에 있다.
확실히 처음 베테랑 조종사들에 의한 카미카제 작전은 효과적이었다.
애초에 카미카제 같은 전술에 의지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항공기 기술을 발달시키고, 조종사 기량을 향상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좀 더 효과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미군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카미카제에 의지함으로서 이런 가능성을 스스로 부정해 버렸다. 5 카미카제의 전략적 의미 ¶더군다나 카미카제의 더 큰 의미를 생각해보면 카미카제의 가치는 대번에 부정될 수밖에 없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런 짓까지 해가며 전쟁을 지속해야 하는가?
카미카제 공격으로 미국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나? 아니면 휴전이나 조건부 항복이라도 이끌어낼 수 있었나? 아니다. 대본영을 위시한 군인/관료/재벌들의 기득권을 잠깐이라도 더 유지해 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자살공격이었을 뿐이다. 다른 방송도 아닌 NHK 특집 다큐멘터리에서도 지적한 내용이다.
이들은 외교관 등 그나마 제정신 박힌 사람들이 "이제 다 끝났으니 인정하고 항복하자"고 했을 때도 "1억을 다 죽여서라도 항복할 수는 없다"며 뻗대는 시늉만 하다가, 덴노가 GG치자 바로 닥치고 버로우탔던 자들이다.
1945년 일본의 상황은 누가 보아도 닥치고 항복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조국을 재건하기 위한 젊은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하는 것이 위정자들의 의무이다.
백번 양보하여 가미카제가 전술적으로 의미가 있었던 행위였고, 후손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애국적 행위였다고 쳐도 절대로 미화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6 카미카제의 이야기거리 ¶카미카제 특공대원으로 지명되어서 출격했다고 다 죽은 건 아니라서, 간혹 생환해 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시기를 놓쳤거나 기계 고장, 컨디션 불량, 기후 불량 등으로 출격이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돌입 직전에 격추되어 포로가 되는 등등의 이유로 생환한 사람들도 제법 있다.
이에 관련된 전장 도시전설(?)도 있다. 한 카미카제 파일럿은 적을 향해 날아가다가 우연히 계기판안에 자리잡은 벌레를 보았고. 찰나 생명의 귀중함을 깨닫게 되어서 자신과 벌레가 살기 위해서 원래 적기까지 갈 정도로 넣은 얼마 안되는 연료를 적기가 아닌 무인도로 향해 돌려서 무인도에서 살기 시작했다는 카미카제 파일럿의 이야기도 있고...
특공대원으로 생환한 이들 중 유명한 사람으로는 니시무라 아키라(탤런트), 내각 관방장관 겸 외무대신과 후생성 장관을 역임한 소노다,
1944년 10월 12일~15일에 대만 앞바다에 미 제3함대가 나타나자 역시 카미카제 공격을 시행했고, 제26항공전대 사령관 아리바 소장이 직접 카미카제 대원이 되어 전사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기쿠스이 작전 등 카미카제 공격을 일선에서 총지휘했던 우가키 마토메 제독도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의 소식을 듣자 몇명의 부하를 이끌고 카미카제 공격에 나섰고, 당연히 사망했다.
또한 조선인도 카미카제기에 태웠다고 한다.
전투비행 시뮬레이션 IL-2 슈투르모빅 1946에도 구현돼 있는데 이쪽은 맞추기가 무진장 어렵다. 7 진짜 카미카제?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12월 8일, 필리핀 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급유중이던 미 태평양 함대 제3함대가 세력이 비교적 약한 열대성 저기압[11]으로 잘못 예측한 태풍의 직격을 당했다.
이로 인해 홀시는 함대의 구축함 3척 침몰, 21척 대파(이 중 9척 수리불가로 폐함 처리), 소속 항공모함들의 함재기 150여 기 손실, 전함, 순양함 등 대형함들도 크고 작은 손상을 입고, 약 800명의 사상자를 낸 후에 예정되었던 필리핀 작전 항공지원 계획을 중단하고 전열에서 이탈해야 했다.
항공기 150기와 구축함 24척의 손실에 대형함들 역시 크고 작은 손상을 입은 이 피해는 웬만해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의 마지막 카미카제라 불러줄 법 하겠으나 상대는 바로 쇼미더머니 미국. 구축함 24척과 함재기 150기는 본국에서 몇주면 찍어내는 물자에 불과했다.
한편 1945년 6월 4일에는 볼티모어급 순양함인 피츠버그가 괌 주변 해역에서 폭풍을 만나서 함수가 완전히 잘려나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인명 피해는 없었고, 침몰 위기에서 벗어나서 괌으로 피항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45년,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때와 같은 카미카제가 일어날 뻔 하기도 했다. 8 막장 위에는 막장이... 있다 ¶위에서 보듯이 카미카제 작전은 기본적으로 작전이라고 이름붙이기 곤란한데다가, 기술 및 장비면에서도 원래 자살공격용이 아닌 병기를 임시로 땜빵질한 것에 불과하여 목적달성을 더 힘들게 한 점이 있었다. 이는 일본군 수뇌부도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막장 일본군답게 이들이 손을 댄 것은 카미카제 전용으로 만들어진 자폭 병기를 개발해서 투입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병기가 MXY-7 오카와 신요, 가이텐이다.
오카의 경우에는 자폭공격에만 중점을 맞추고, 기존의 카미카제가 폭탄적재까지 해서 안그래도 느린 비행기가 더 느려진다는 단점을 개선했다고 만든 유인유도식 미사일이지만, 결론적으로는 조종하기 엿같은데다가 사정거리도 짧아서 이걸 싣고 날아오른 폭격기같은 모기까지 같이 격추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신요는 한마디로 말해서 폭탄을 가득 실은 자살용 모터보트. 덕분에 조종하기가 힘들며, 파도가 조금만 쳐도 운항을 못하고, 무게중심이 너무 앞으로 쏠려서 제멋대로 움직여서 팀킬이나 하는 병기였다.
그 외에도 어뢰를 이용한 자폭공격도 심도있게 논의되었는데, 그 결과 개발된 것은 남아도는 어뢰를 약간 개조하여 만든 가이텐. 사실 유인 어뢰 공격은 이탈리아의 마이아레나 영국의 채리엇 등이 이미 있었으나, 이것들은 저속으로 추진되며 운반자가 어뢰위에 올라탄 뒤 거리를 확보후 폭파시키는 성질이라 생존률이라도 어느정도 보장되었지만, 카이텐의 경우는 내부 탑승식이라 외부에서 문을 닫아버리면 탈출이 불가능했으며, 방수가 충분히 되지 않거나, 구조자체가 약하여 우그러든다거나, 혹은 산소부족으로 조종불능상태에 빠진다거나 해서 명중률조차 앞선 둘보다 훨씬 떨어졌다. 그런데 개조에 소모되는 자원은 별 차이도 없었다고 하니 이뭐병.
그리고 지상전에서도 카미카제 전법은 계속 사용되었다. 9 타국의 사례 ¶타국에서도 이러한 개념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일본의 카미카제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일본의 것들은 인간은 '유도장치'에 불과하다는 개념이었고, 나머지는 위험한 곳으로 인간을 '수송만' 하는 개념/혹은 진짜 답이 없어서 뭐라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9.1 독일 ¶독일도 이와 비슷한 아이디어가 제시됐는데, 다행이도 이쪽은 유인 항공기가 아니라 폭탄을 가득 실은 무인폭격기 위에 전투기를 얹은 디자인으로, 목표 지점까지 다다르면 조종을 하던 전투기가 폭격기와 분리되어 귀환을 하고 폭격기는 목표에 충돌해서 자폭하게끔 하는 방식이었다. 일명 미스텔이라고 불리며, 주로 Bf-109나 Fw-190에 Ju-88 폭격기를 결합하는 것이었지만, Me-262 제트전투기에 Ar-234 제트폭격기를 결합하는 계획도 존재했다. 또한 V-1 로켓을 개조해 유인으로 조종하는 것도 있었다.
유인 V-1 로켓을 주장한 사람은 독일의 유명 여성 조종사 하나 라이치(Hanna Reitsch, 1912.3.29 – 1979.8.24)와 오토 스콜체니.
하나 라이치는 세계 최초의 여성 테스트 파일럿이자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종을 조종한 여성으로 수륙양용기, 헬리콥터, 제트추진비행기, 로켓추진비행기, 심지어 V-1까지 조종했다. 특히 V-1은 실험 단계에서 자꾸만 발사 직후 추락하는 일이 이어지자 원인 및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탑승했던 것.
유인 항공기를 사용하지 못한 것은 아돌프 히틀러가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유인항공기 계획은 '충돌 직전에 조종사가 탈출하는' 개념이었는데도 인명 존중 문제로 반대했다고 한다. "자살 공격은 독일 민족과 맞지 않다." 라면서.
그 "닥치고 사수"만 주문하여 수많은 전황을 그르쳤고, 종말에 이르러서는 "게르만의 영광을 위해 죽어라"를 주문했던 희대의 학살자 히틀러조차도 이러한 의견을 낼 지경이었는데, 이딴 것을 밀어붙인 일본군은 대체 뭐하는 종자들이었을까(…).
그러나 실험은 해 본다고 V-1 로켓을 개조한 것을 만들기도 했다.
일단 미스텔의 경우 사실 2차 대전 말기에 나온 아이디어인 만큼 독일측에선 불필요한 존재인 남은 폭격기의 유일한 활용 용도였을테고 또 잘만 맞춘다면 꽤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었겠지만 활약 기록이나 그런건 찾긴 힘들다. 9.2 러시아 ¶소련 공군에서는 여성 조종사로만 이루어진 폭격기 부대인 제588 폭격연대 가 한밤중에 독일 비행장을 습격하던 전술이 있었는데 어떤사람은 이것이 자살폭탄이나 다름없었다고는 주장하나 이것은 생존율은 낮을지 몰라도 생환을 전제로 한 것이기 처음부터 자살공격을 전제로 한 일본군과는 개념이 다르다. 9.3 영국, 이탈리아 ¶영국과 이탈리아 해군도 가이텐 비스무리한 특수 어뢰정을 만들었다. 9.4 한국 ¶한국전쟁 직전 38선 부근에서의 군사충돌때, 국군에서 스스로 폭탄을 안고 자살공격을 하여 북한군의 토치카를 부쉈다는 육탄10용사도 조작 의혹이 있다. 9.5 미국 ¶미국의 경우에는 폭약을 가득 채운 폭격기에 일단 승무원이 탄뒤에 이륙, 일정 고도에서 탈출한 뒤 이 무인상태가 된 폭격기를 뒤따르는 항공기가 무선으로 조종하여 목표물에 들이받게 한다는 아프로디테 계획이 연구된 적 있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항목 참조.
9.11 테러 당시, 테러범들에게 납치당한 유나이티드 93편을 격추시키기 위해 긴급 출격했던 미 공군의 F-16 전투기도 자폭 공격을 감행하려 했다고 한다. 다만 이 경우에도 당시 출격했던 전투기들은 훈련 비행을 마치고 귀환했다가 바로 출격한 상황이라, 정말 답이 없던 상황이었다. 10 아직 유용 ¶아무튼 이 자폭공격이 테러리스트들이나 반군들에게는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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