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석 국제경제전문기자 입력 2020.06.23. 03:03
일본 정부와 민간이 관민(官民)일체로 1조엔(약 11조4000억원)을 쏟아부은 여객기 국산화 사업 '스페이스제트'가 좌초 위기에 놓였다.
이 사업을 주도하는 미쓰비시항공기는 지난 15일 개발 인력과 조직을 대폭 축소한다고 발표했다. 전체 직원 2000명의 절반인 1000명을 감원한다.
사장은 지난 2월 사임했는데 지난 5년간 3번째 교체다. 해외 사무소도 대부분 폐쇄키로 했다.
스페이스제트는 2000년대 중반 일본의 산업통상자원부 격인 경제산업성 주도로 시작된 국가 프로젝트였다.
일본의 산업 역량을 결집해 90석 규모의 소형 여객기를 국산화하겠다는 목표로 2008년 공식 출범했다.
원래 개발비는 1500억엔, 납품 예정일은 2013년이었다.
그러나 개발비는 당초의 7배인 1조엔까지 늘었고, 납품일도 6번이나 연기를 반복해 계획보다 9년 늦어진 2022년으로 미뤄졌다.
여기에 코로나 사태까지 터졌다.
적자 누적에 제품을 사줄 시장마저 사라지면서, 사업 자체가 공중분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일본 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일본의 항공기 산업에 대한 꿈은 남달랐다. 2차 대전 초기에 미쓰비시중공업이 만든 제로 전투기가 당시 미국 전투기를 성능으로 압도했을 만큼, 항공기 개발의 역사도 길다.
그러나 패전 후 미 군정이 7년간 항공기 생산·개발을 금지하면서 타격을 입었고 산업 기반도 무너졌다.
2008년 출범한 스페이스제트 사업은 일본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사업이었다. 정부가 개발비의 3분의 1인 500억엔을 대고 미쓰비시중공업이 자회사인 미쓰비시항공기를 설립해 사업을 주도키로 했다.
주요 출자자는 미쓰비시중공업, 도요타자동차, 스미토모상사, 미쓰이물산, 일본정책투자은행 등으로 관민일체의 야심 찬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당초 2013년 납품할 예정이었지만 5차례 연기 끝에 올해로 미뤄졌고, 다시 지난 2월 2022년까지 연기한다는 6번째 발표가 나왔다.
계획이 차질을 빚으면서 적자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미쓰비시항공기의 모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의 올해 실적 보고서에 따르면, 스페이스제트 사업의 적자는 2018년 852억엔에서 작년 2633억엔까지 확대됐다.
올해는 인력·비용을 대폭 줄여 적자 폭을 줄인다는 계획이지만 그래도 1300억엔 적자를 예상하고 있다.
최근 3년간의 적자만 4785억엔(약 5조4000억원)에 달한다. 스페이스제트의 실적 부진 때문에 미쓰비시중공업도 작년에 20년 만에 처음 적자를 기록했다.
사업 채산성에 대한 회의적 시각은 그동안 꽤 있었다.
민항기 시장은 장거리 국제노선을 중심으로 하는 중·대형기(130석 이상)와 상대적으로 짧은 거리를 다니는 소형기(130석 미만)로 나뉘는데, 스페이스제트는 소형기 중에서도 좌석이 100석 이하인 '리저널 제트기'에 속한다.
리저널제트기 시장은 전체 민항기 시장의 5%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일본은 작은 여객기로 시작해 전체 항공기 산업을 키워나가겠다며 신규 시장 진입을 시도했다.
게다가 리저널 제트기 시장의 80%를 장악한 캐나다 봄바디어와 브라질 엠브라에르를 각각 에어버스와 보잉이 인수하면서, 시장에 철옹성이 구축됐다. 중국까지 리저널 제트기와 중형 여객기를 개발해 자국 중심으로 보급에 나서면서, 스페이스제트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일본 정부 주도로 만든 기업 연합을 뜻하는 히노마루(日の丸) 연합의 위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년 동안 세 번의 실패가 있었다.
일본은 1999년 NEC·히타치제작소의 D램 사업을 통합해 엘피다메모리를 창립했다.
당시 반도체 시장을 장악해가던 한국을 타도하고, 1980~1990년대 반도체 산업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것이었다.
2003년에는 미쓰비시전기의 D램 사업까지 흡수해 덩치를 더 키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패색이 짙어졌다.
일본 정부는 2009년 엘피다에 공적 자금 300억엔을 투입하며 지원에 나섰으나 결국 엘피다는 2012년 파산을 신청했고 2013년 미국 마이크론에 흡수돼 사라졌다.
엘피다가 파산한 2012년엔 소니·도시바·히타치의 LCD 사업부를 통합해 재팬디스플레이(JDI)를 만들었다
반도체와 마찬가지로 한국에 밀리자, 정부 주도로 각 기업의 LCD 사업을 모아 승부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수천억엔을 신규 투자했는데도 한국을 따라잡지 못했고, 결국 애플과의 납품 계약까지 잘못되면서 적자가 산더미처럼 커졌다.
경영난 끝에 JDI는 LCD 사업을 대폭 축소했고, 올 들어 주력 공장까지 매각했다.
스페이스제트 사업은 일본인에게 1964년 도쿄올림픽의 영광을 떠올리게 한다.
일본은 1962년 전후 최초의 국산 프로펠러 여객기 'YS-11'의 첫 비행에 성공했다.
당시에도 관민출자회사인 '일본항공기제조'가 개발을 맡았다.
YS-11은 1964년 도쿄올림픽의 성화 봉송에 사용됐는데, 1964년 운행을 시작한 세계 최초의 고속철 신칸센(新幹線)과 더불어 일본 국민에게 전후 부흥의 상징이었다. YS-11은 이후 제트여객기에 밀려 1973년 생산이 중단됐고, 2006년 운항 중단됐다.
스페이스제트는 아무리 늦어도 도쿄올림픽이 열리는 올해 전에 납품 완료될 예정이었다.
올림픽이 예정대로 개최됐더라면 1964년에 이어 또 한 번 자국산 여객기가 성화 봉송에 사용될 수도 있었다.
1964년 초등학교 4학년생으로 도쿄올림픽을 경험했던 기억을 최고로 꼽는 아베 일본 총리가 또 한 번 일본 부흥의 영광을 세계에 알리는 데 최적의 소재가 될 터였다.
그러나 면밀한 분석이 결여된 시작된 이 정부 주도 프로젝트는 소중한 세금과 기업 자원만 낭비된 채 재앙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가 세금을 써서 경쟁력 떨어지는 기업을 통합시킨들, 민간의 리더십이 안받쳐주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2017년 미쓰비시중공업의 미야나가 슌이치 사장(현 회장)은 이렇게 후회했다. "개발에 들어가기 전에 정보 수집과 위험 분석에 대해 좀 더 공부했어야 했다."
일본인들은 국가적인 것을 강조할 때 히노마루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일본이 외국에 맞서 정부 주도로 만든 기업연합을 히노마루연합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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