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新羅 金冠은 왜 美國 銀行에 몸을 숨겼을까

올바른역사,웨곡된역사

by 석천선생 2020. 6. 19. 17:20

본문

신라 금관은 왜 미국 은행에 몸을 숨겼을까

강구열 입력 2020.06.19. 13:13

전쟁 중 파괴된 선림원지 출토 동종

 

성덕대왕신종, 상원사동종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꼽혔던 선림원지 출토 동종은 지금 국립춘천박물관에 불에 녹아 찌그러진 파편으로 전시되어 있다.

 

6·25 당시 이 동종을 보관하고 있던 월정사가 파괴되면서 동종도 처참한 운명을 맞았다.

 

국보1호 숭례문의 석축에는 총탄 자국이 있다. 6·25 당시 서울 시내에서 벌어진 시가전의 흔적이다.

 

전쟁의 아픔은 문화재에도 이처럼 깊다. 상처는 있으되 지금껏 남아 있는 사례라면 그나마 다행일 수 있다. 완전히 파괴되어 볼 수 없는 문화재도 상당수다.

 

그래서 전쟁 중 문화재를 보호하기 노력들이 치열했고, 이제는 신화처럼 회자되는 이야기들이 전한다. 19일 국립고궁박물관이 유튜브 채널을 통해 진행한 ‘6・25전쟁과 문화유산 보존’ 학술심포지엄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여럿 소개됐다.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관(국보 87호), 금제허리띠(〃 88호) 등 당시 국립박물관 경주 분관에 보관되어 있던 중요 유물 139건이 미국의 은행으로 피신을 간 것도 그 중의 하나다.

 

◆미국 은행으로 피난간 금관총 유물

 

북한군에 밀려 전선이 하염없이 남하하던 1950년 7월, 국방부 제3국장 김일환 대령이 국립박물관 경주 분관에 있는 금관 등을 확보했다.

 

북한이 남한 전역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고, 국립박물관 서울 본관, 개성 분관, 부여 분관 등 주요 박물관이 이미 북한군 치하로 떨어진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는 경주 분관의 중요 문화재이라도 지켜야 겠다는 생각에 이 유물들의 미국 피난을 준비한 것이다.

 

미국의 은행으로 피난간 금관총 금관.

 

미국으로 건너간 문화재들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 샌프란시스코 지점에서 보관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장상훈 과장은 “국립박물관 소장품은 국가, 정부의 역사적 정통성을 담보한다”며 “북한의 무력 침공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정부가 중요 문화재를 지키고자 한 이유”라고 밝혔다.

 

장 과장은 “정확한 사정을 드러내는 기록은 없으나 1950년 7월에는 국립박물관 본관, 개성분관, 부여분관이 다 적의 손에 떨어져 국가의 상징유물은 경주 분관에만 남아 있었다.

 

그 상황에서 국가 정통성을 상징하는 문화재가 무엇이냐 했을 때 금관총 금관 등을 떠올린 듯 하다”고 말했다.

 

급하게 피신하기는 했으나 금관총 유물들은 전쟁이 끝나고 미국에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데 활용됐다. 1957년 미국 8개 도시를 돌며 진행된 ‘마스터피시스 오브 코리안 아트’(Masterpieces of Korean Art)에 출품된 것. 금관총 금관 등은 이 전시회가 끝나고 귀국했다.

 

미국의 은행으로 피난간 금관총 금제 허리띠

 

 

◆미국 정부가 거절한 한국 문화재 피난 계획

 

6·25 전쟁 중 문화재 피난이 다시 한번 시도된 적이 있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다시 불리해져 가던 시점이었다.

 

1951년 4월 이승만은 당시 문교부 장관이던 백낙준에게 “우리의 진열품 전체를 미국으로 소산(문화재의 훼손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더욱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일)시킬 계획을 미국 측에 전달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해군참모총장 손원일에게 문화재의 미국 이송을 검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백낙준은 대규모 문화재 소산에 대한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한편 부산에 내려가 있던 모든 박물관의 소장품을 포장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동의안이 통과되면 미국 호놀룰루로 대상 문화재들은 옮겨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학수 한국해양대 초빙교수는 심포지엄 발표문에서 미국 정부의 반대 이유에 대해 “(한국 문화재를 미국으로 옮기는) 그러한 행동은 외국, 특히 공산권 국에게 한국의 문화재를 송두리째 약탈했다는 악선전의 재료를 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정부의 반대로 피난 계획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뜻밖의 제안이 해를 넘긴 1952년 4월 이승만에게 전달됐다.

 

호놀룰루 아트 아카데미의 로버트 그리핑 관장이 협조 의사를 밝힌 것.

 

그리핑 관장은 “한국 정부가 선별 유물의 안전한 보호를 위해 우리 아카데리로 이송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하신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협조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계획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이즈음 전선이 38선 중부 지역에 고착화되면서 굳이 미국행을 결행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