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찬 입력 2020.05.02. 12:01 수정 2020.05.02. 12
“연구원의 개인적 일탈이라 할지라도 자체적으로 기술보호 전 과정을 살펴보고 보완책을 마련하겠다.”
국방과학연구소(ADD) 전직 연구원들의 기밀 유출 의혹에 대해 ADD가 지난달 27일 기자들에게 발송한 입장문 중 일부다.
68만여건의 내부 기밀자료가 유출됐고 혐의를 받는 퇴직자는 드러난 것만 20여명이다. ADD 상급 기관인 방위사업청의 수장인 왕정홍 청장이 국회에서 공개사과하고, 문재인 대통령은 신속한 수사를 지시했다.
ADD의 공적 기능과 존재 의미가 무너진 상황에서 ‘개인적 일탈’이라고 하기엔 국익에 미친 악영향이 크다.
지난달 27일 오전 대전 유성구 국방과학연구소 정문 앞에 관계자가 이동하고 있다. 대전=뉴스1
ADD는 러시아, 스웨덴, 노르웨이, 독일, 네덜란드와 국제기술협력 협의체를 운영한다.
방위사업청도 미국, 프랑스, 영국, 이스라엘, 인도, 싱가포르와 기술협의체를 운영중이다.
협력 범위도 육해공군 분야 핵심기술과 무인전투체계 기술, 민군 겸용 기술, 에너지, 정보통신 분야까지 다양하다. 기술협력과제도 수십~수백개에 달한다.
이들 국가의 정부는 연례회의를 통해 자국 연구기관이나 방산업체가 보유한 기술을 ADD에 알려주는 등 기술협력 매개체 역할을 한다. ADD라는 국책기관의 공신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전직 연구원들의 기밀 유출은 ADD와 공동연구를 진행한 해외 연구기관과 업체들에게 자신들이 ADD에 제공한 기술이 당초 약속된 용도와 다르게 쓰였을 가능성을 우려하게 한다.
육군 UH-60 헬기가 정비를 위해 해체된 채 대기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기밀을 유출한 전직 연구원들이 국내 방산업체에 들어간 것과 관련, 한국 방산업체들이 자신들의 기술을 이용해 신무기를 개발, 해외 시장에서 경쟁자로 나설 수 있다는 우려도 많다.
전직 연구원 중 일부가 아랍에미리트(UAE)를 비롯한 외국 연구기관이나 업체로 옮겼다는 의혹까지 더해지면 ADD에 대한 신뢰는 무너진다.
ADD의 기술통제와 보안에 대한 신뢰가 깨지면, 선진국 정부들은 자국 연구기관 및 업체에 ADD와의 협력을 권고할 명분이 없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드론 등 4차 산업혁명 기술 개발 필요성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ADD는 선진국과의 협력을 통한 기술 격차 해소가 어려워진다
. ADD의 핵심 역할 중 하나인 국제기술협력 기능이 마비되는 셈이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ADD에 선의로 공유한 기술이 잠재적 경쟁자에게 유출됐다면, 앞으로 어떤 국가나 기업이 ADD와 협력하겠냐”며, 이번 유출 사건은 ADD에 치명타를 입혔다고 지적했다.
공군 F-15K 전투기가 훈련을 위해 이륙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방산수출도 흔들린다.
국산 무기를 제작해 수출하는 과정에서 부품이나 장비를 수입해 장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부품과 장비를 수입하려면 해당 국가의 수출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기술 유출 가능성을 우려한 정부가 수출 조건을 까다롭게 하거나 승인을 거부 또는 지연하면 수출에 타격이 불가피하다. 공급망을 단기간 내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터키가 파키스탄에 T129 공격헬기 판매를 시도했으나 미국 정부로부터 엔진 수출 승인을 받지 못해 T129 판매가 좌절된 것이 대표적이다.
2009년 국내 업체가 제작한 전자장비인 ALQ-200의 파키스탄 수출 시도가 미국 정부의 반대로 무산된 사례도 있다.
ADD 기밀 유출 소식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곳은 미국과 유럽 등 외국 방산업체다. 한 외국업체 관계자는 “우리가 제공한 기술은 (우리가) 허용한 목적에 맞게 쓰여야 한다”며 “기술 유출 여부를 확인하고 있지만, 피해 규모 산정조차 불가능한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지난해 10월 16일 경기도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열린 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서울 ADEX 2019)에 한국형 전투기(KF-X)모형이 전시돼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최근 미국측의 움직임이 눈에 띠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는 관측이다.
업체 차원에서 실태 파악이 어려운 만큼 정부가 나선다는 의미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주한 미 합동군사업무단(JUSMAG-K)과 주한미국대사관 등에서 움직임이 활발하다”며 “어떤 기술이 유출됐는지 확인하고자 전수조사를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하다”고 전했다.
한국에서의 기술 유출 의혹에 대한 미국의 시각은 2011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발생한 ‘타이거 아이’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당시 공군은 F-15K 전투기에 장착되는 고성능 센서인 타이거 아이 정비를 위해 미국에 타이거 아이를 보냈는데, 미국 업체가 정비과정에서 봉인이 훼손된 것을 발견했다.
문제의 봉인은 미국 무기를 수입한 국가가 특수 장비의 원천기술을 확보하려고 장비를 임의로 뜯어보는 일을 막기 위해 납품 당시 붙인 것이었다.
공군이 “장착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손상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미 국방부가 그해 8~9월 조사단을 파견해 강도 높은 조사를 벌인 것을 두고 기술 도용 가능성을 의심했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당시에는 적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16일 경기도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열린 서울 국제 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서울 ADEX 2019)에 한국형전투기(KF-X)에 장착될 장거리 공대지 유도무기가 전시돼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당시 미국측은 타이거 아이 봉인 훼손을 주도한 당사자로 공군이 아닌 ADD를 지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무기개발을 담당하는 ADD가 관여했다면, 이는 단순 실수가 아니라는 점에서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미국측 관계자들이 당시 조사과정에서 우리 군 관계자에게 고성을 지르고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막말을 퍼붓는 등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뒷말이 무성했다.
단순한 장비 봉인 훼손에 대해서도 강경 모드였던 미국이 ADD 기밀 유출을 그냥 넘길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반미감정을 우려, 미국이 외교적 문제로 확산하지 않도록 조용히 처리하되 한국에 대한 기술이전과 무기 판매, 한국 무기의 해외수출을 견제할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을 사업으로는 한국형전투기(KF-X)가 지목된다.
KF-X에 미국산 무장을 장착하려면 체계통합 기술과 미사일 관련 자료 등에 대한 미국 정부의 수출승인이 필요하다. 미국측이 기술 유출 위험 등을 명분으로 승인을 하지 않으면 KF-X 개발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미국의 원천기술이 적용된 국산 장비를 탑재한 KF-X가 인도네시아에 넘어갈 때, 미국이 수출승인을 거부하면 진퇴양난이 될 수도 있다.
벙커 파괴용 공대지미사일이 벙커 지붕을 뚫고 내부에서 폭발하고 있다. 미 공군 제공
ADD가 주도하는 장거리 공대지미사일 개발도 어려워진다. 공대지미사일을 만들려면 미사일이 항공기에서 분리되는 기술, 목표로 날아가는 기술, 지하벙커를 뚫고 들어가 폭발하는 하드웨어 기술이 필요하다.
하드웨어 기술은 국내에서는 벙커를 관통하는 기술을 제외하면 어느 정도 확보된 상태다. 반면 전자전 시도를 회피해 표적으로 날아가는 기술과 표적 정보를 자체적으로 획득하는 등의 소프트웨어 기술은 많이 부족하다.
3m 이상 두께의 벙커를 정확히 파괴하는 장거리 공대지미사일 기술 보유국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소수에 불과하다.
기술교류를 통해 관련 기술을 제때 확보해야 개발을 차질없이 진행할 수 있는데, 기술 유출 가능성을 우려한 해외 국가들이 기술이전 요청에 응하지 않는다면 개발 작업은 불가능에 가깝다.
미국 정부가 보증하는 대외군사판매(FMS) 방식으로 도입되는 미국산 무기 운용도 어려워질 전망이다.
우리 군의 정비 범위를 축소하거나 국내 정비를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고, 교범 및 훈련체계 인도나 운용 조건을 까다롭게 할 가능성도 있다.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하기만 해도 우리나라가 받을 타격은 적지 않다.
실제로 FMS로 도입된 F-35A 스텔스 전투기는 공군 내에서 “우리 전투기 맞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운용상 제약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국내에 반입된 글로벌호크 무인정찰기나 2020년대 FMS로 들어올 P-8A 해상초계기 등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군 안팎에서는 오는 하반기에 열릴 안보협의회(SCM)를 비롯한 한미 국방당국간 협의체에서 이 문제가 거론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을 비롯한 한미 외교 및 국방관련 협상과 미국산 무기 구매 과정에서 우리 정부의 협상력이 약화될 우려가 제기되는 대목이다.
지난해 8월 대전 유성구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창립 49주년 행사가 열리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군 소식통은 “미국과 유럽 등에서 사건 경위를 문의하면 우리 정부로서는 답변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다”며 “문제없다는 식으로 답했다가 향후에 지적재산권 분쟁이 발생할까 걱정”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사건이 불러올 파장을 가늠조차 하기 힘든 상황인데도 당사자인 ADD는 상투적 입장만 내놓은 채 침묵하고 있다.
남세규 ADD 소장이 대국민 사과를 해도 모자랄 지경인데 연구소 고위 관계자 중 관련 설명을 하는 이조차 없다. 감독기관인 방위사업청도, 장관이 ADD 이사장을 겸하는 국방부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될 바에는 ADD 기밀유출과 보안실태, 방산업체와의 유착 의혹 등을 철저히 조사해 공개하고 법에 의해 처리하는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1990년대 이후 대형무기도입 사업에서 외국 업체들이 우리나라에 넘긴 기술들은 대부분 ADD의 몫이었다.
국제교류와 정부 예산에 의해 확보된 기술도 많다. 모두가 국민의 혈세로 얻은 기술이다. 힘들게 번 돈을 세금으로 낸 국민들은 ADD가 개발한 기술이 무엇인지, 그 기술이 어떻게 쓰였는지 알 권리가 있다.
기술이 잘못 쓰였다면 책임을 물을 권리도 있다. 국방부와 방위사업청, ADD가 이번 사건에 무한한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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