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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경제

日本동향

by 석천선생 2020. 1. 2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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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아시아의 가장 동쪽에 있는 일본은 국내총생산(GDP) 4조 6,024억 달러(2014년 기준), 국민 1인당 GDP 3만 6,222달러, 총 교역액 1조 4,571억 달러(2010년 기준)에 이르는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다. 1980년대에는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으나 1990년대 초반부터 장기불황을 겪으면서 연평균 성장률이 1~2%로 둔화되었다. 산업구조는 1차 산업 1.2%, 2차 산업 24.5%, 3차 산업 74.3%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 속의 일본경제

    1960년 전세계 국민총생산(GNP)의 2.8%에 불과한 점유율을 차지하던 일본은 1980년 10.1%로 상승하여 20년 동안에 7.3%가 상승하는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국민 1인당 GNP도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하여, 1965년에는 760달러로 미국(3,240달러)의 1/4에 불과했으나 1984년에 1만 474달러로 미국(1만 5,949달러)의 66%로 신장했다.


     그후 1987년에는 1만 9,959달러로 미국(1만 8,714달러)을 앞질렀으며 이와 같은 신장세는 1990년(일본 2만 3,965달러, 미국 2만 2,105달러)까지 계속되었다.


     세계 무역에 있어서도 이와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여 1995년 현재 수출·수입액 모두 미국, 독일에 이어 3위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일본경제는 양적 성장만이 아니라 질적으로도 호조를 보여 왔다.


     1950, 1960년대의 '번영' 이후 1970년대에 들어서 일본 역시 국제통화위기(1971), 제1차 유류파동(1971)에 따른 혼란을 겪었으나 적어도 1970년대 후반 이후에는 다른 구미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이는 마이크로 전자공학(microelectronics) 혁명이라 불리는 신기술 혁신에 의한 산업구조의 자원절감, 지식 집약화, 낮은 실업률 아래서의 안정된 노사관계와 노동생산성의 상승, 안정된 물가수준, 이들을 바탕으로 한 일본제품의 가격·품질 양면에서의 강한 국제경쟁력 등에 의해 실현되었다.


     반면 일본경제의 질적·양적 성장은 무역마찰을 비롯한 국제경제 마찰의 한 원인이 되어 일본에 대한 비판·비난을 불러 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자동차·전기·전자제품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상품의 집중호우식 수출은 수입국의 입장에서 보면 해당산업의 부진과 실업 증대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의 누적되는 무역·경상 수지 흑자는 일본시장의 폐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시장개방 요구가 강화되는 동시에 적자국의 보호무역주의를 대두시켰다.


     이들 대외무역마찰에 대한 대응책으로써 대외 질적투자, 즉 일본기업의 해외진출을 추진하고 있으나 일본기업의 다국적화와, 거기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는 일본경제의 또다른 과제이다.


     또한 개발도상국과의 경제협력에 대한 요구가 점점 높아지고 있으며 양적 규모뿐만 아니라 교육·문화·보건·의료와 같은 폭넓은 장기적 시야에 선 경제협력이 추구될 필요가 있다.


    2012년 아베신조(安倍 晋三) 총리가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시행된 ‘아베노믹스’는 금융통화 완화, 재정지출의 확대, 구조개혁 등의 강력한 양적완화 정책이다.


     이 정책은 일본 증시의 활성화와 대기업들의 수출경쟁력 증가 등의 효과를 거둠과 동시에 수입 원자재 가격 상승 및 재정부채증가 등의 부작용도 가져왔다.

    산업 구조

    제2차 세계대전을 경계로 하여 전전(戰前) 취업인구의 약 절반을 차지했던 농림수산 인구는 계속적으로 비중이 떨어져 1984년에는 11%까지 줄어들었다.


     이에 대해 2차산업과 3차산업의 취업인구는 전후의 고도성장기까지는 모두 비중이 높아졌으나 유류파동을 거친 1970년대 후반 이후에는 2차산업은 축소되기 시작한 반면 3차산업의 비중은 높아졌다.


    국내 총생산의 구성비 역시 전후 도시의 파괴와 식량난에 따른 인구의 귀농으로 1차산업의 비중이 높았지만 1955년 이후의 고도성장기 이후에는 취업인구의 구성비와 같은 경향이 전개되었다.


     이중 제조업의 추이를 살펴보면 전전에는 면과 생사를 중심으로 하는 섬유공업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해 기본적으로 경공업 우위의 구조였으나 전후 고도성장 과정에서 급속하게 중화학 공업화가 이루어졌다.


    1970년대 이후에도 중화학 공업화율은 더욱 높아졌으나 2차례에 걸친 유류파동에 의한 자원절약 및 가격·수요구조의 변화와 신흥공업국의 추격에 따라 금속·화학 등 기초소재산업은 정체하고 부가가치가 높은 가공조립산업인 전기·전자 기계, 자동차, 공작·정밀 기계 산업이 높은 점유율을 차지했다.


     또한 마이크로 전자공학 기술의 발전과 그 응용으로 수치제어(NC)공작기계나 로봇의 보급을 통한 생산공정의 자동화와 함께 제품의 경량화·소형화가 촉진되었다.

    에너지 문제

    일본의 에너지 공급은 전전에는 주로 국산자원인 석탄과 수력에 의존해왔다.


     그러나 전후 중동유전의 개발과 소비지 정제 전략에 의해 원유가격이 대폭 떨어진 결과 국산 석유에서 수입 원료로의 급격한 전환이 이루어졌다.


     1973년과 1979년 2차례의 유류파동으로 원유가격이 급등했으며 이를 계기로 석유·에너지 절약과 대체 에너지 개발시대가 개막되었다. 석유에서 석탄, 천연 가스로의 연료전환,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이 급속히 추진되어 1983년도의 1차에너지 공급구성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율은 60.9%로 떨어졌다(1973년 77.6%).

    운수·통신

    일본의 운수사업은 전전에는 철도·해운이 중심이 되었으나 쇼와 시대[昭和時代]에 들어서 버스·트럭 등의 자동차가 도시근교 수송을 보완하는 형태를 취했으며, 전후 고도성장기 이후 승용차를 포함한 자동차의 비중이 커지고 항공이 새롭게 가담했다.


    철도는 1906년 철도 국유화 이래 시가지 및 도시근교 사철(私鐵)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가가 경영했다(→ 색인:지하철도). 전전 세계 유수의 상선을 자랑하던 해운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타격을 받았으나 전후 정부의 보호정책으로 선박량이 다시 늘어났다.


     그러나 세계적인 선박과잉, 유류파동 이후 세계경제의 정체, 개발도상국 해운의 대두로 인해 사양화되고 있다.


     육상 교통은 고도성장기 이후 자동차화가 급속히 이루어져 여객·화물 수송이 철도에서 자동차로 대이동함으로써 철도의 수송분담률은 1955~84년 약 30년 동안에 여객에서는 82.1%에서 39.0%로, 화물은 52.9%에서 5.3%로 하락했다.


     그결과 국철의 경영은 1964년도 이후 계속 적자를 기록했고, 마침내 1987년 4월 행정개혁의 일환으로 분할·민영화되었다.


    통신은 전전에는 우편·전기통신 모두 정부의 직영사업으로 운영되었으나 전후에 우편을 제외하고, 국내통신은 일본전신전화공사(1952), 국제통신은 국책회사인 국제전신전화주식회사(1953)가 운영하게 되었다. 그후 1985년 4월 일본전신전화공사의 민영화와 내외 전기통신사업의 자유화가 실현되었다.


    일본전신전화공사(Nippon Telegraph and Telephone Corporation)

    일본의 통신회사

    ⓒ shibainu / wikipedia | 2.0 BY CC

    농림수산업

    1960년대에 들어와 농촌에서 도시로 젊은 노동력이 유출되어 농업노동력이 열악해짐으로써 농업생산이 정체되고 농업경영이 악화되었다.


     1960년 606만여 호였던 농가수는 1985년 438만 호로 감소했다. 그중에 전업농가는 14%에 불과하고, 68%는 농업 이외의 수입이 농업 수입을 웃도는 제2종 겸업농가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1970년대 이후 쌀의 과잉생산과 식량관리 특별회계의 적자누적이 문제시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미국으로부터 쌀의 수입자유화 압력이 강해져 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자립경영에 의한 생산성 향상이 급선무가 되고 있다.


    임업·수산업에서는 세계적인 자원부족을 배경으로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임업은 수입재의존율이 1965년 26.5%, 1984년 64%에 도달했다.


     일본은 세계 제1의 수산국이나 고도성장기 이후 연안어업은 남획·매립·공해에 의한 해양오염으로 쇠퇴하고 대신 급성장한 원양어업과 1970년대 이후의 각국의 영해의 확대, '200해리 어업전관구역'의 설정 등의 국제적 조류 속에서 곤란을 겪고 있다.

    무역

    일본무역의 커다란 특징은 원료·연료 수입, 공업제품 수출이라는 수직분업적 무역구조이다(→ 색인:국제무역). 전전의 일본무역은 첫째, 대(對)중국·아시아 면제품 수출, 원료 수입, 둘째, 대(對)미국 생사 수출, 셋째, 대(對)구미 중화학공업품 수입을 기축으로 했다.


     1930년대 이후에는 대(對)아시아 중공업품 수출이 시작되었고 전후에는 산업구조와 국제 정치환경의 변화와 함께 무역구조도 크게 바뀌었다.


    품목별로 보면 수출은 섬유를 비롯한 경공업품이 중심이었으나 1960년대에 들어가면서 철강·기계 등 중공업의 비중이 높아졌고 1970년대 이후 자동차·전기·전자를 중심으로 하는 기계류가 압도적 비율을 차지했다.


     수입에서는 원료·연료 및 식료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일관되게 높고, 특히 2차례의 유류파동에 의한 원유가격의 폭등으로 1980년대초에는 광물성 연료가 수입의 반을 차지했다.


    일본 도요타(Toyota) 

                                                                

    일본 도요타(Toyota)

    일본의 자동차 제조 회사,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 중 하나이다.

    ⓒ Ralf Roletschek / wikipedia | CC의 BY-SA 3.0

    무역의 지역별 구성을 보면 수출에서는 아시아와 북아메리카가 일관되게 각각 1/3을 차지하고 있는데 유럽의 비중은 1950년대 10% 정도에서 1970년대 후반 이후 20%가 되었다.


    수입에서는 1950년대 중반 북아메리카의 비중이 40%, 아시아가 30% 정도를 차지했으나 1970년대 후반 이후 원유가격의 폭등으로 중동의 비중이 커지고, 중국과의 국교회복 영향으로 아시아의 비중이 50%에 달하고 북아메리카의 비중이 20%로 저하되었다.


    일본의 수출은 전후에 계속 세계무역의 신장을 웃도는 속도로 증대해서 각지에서 심각한 무역마찰을 불러일으켜왔다.


    근래에는 두 국가간의 무역수지에 있어서 일본의 수출초과 자체가 마찰의 원인이 되는 경향이 강해짐과 더불어 무역마찰 회피를 위한 대외

    업진출이 현지 자본과의 경합에서 투자마찰을 불러 일으키는 등 대외 경제마찰이 복잡하게 진행되고 있다.

    금융·재정 제도

    일본의 금융제도는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을 정점으로 전국은행(도시은행·지방은행·신탁은행·장기신용은행)·중소기업금융기관(상호은행·신용금고·상공조합중앙금고 등)·농림수산금융기관(농림중앙금고, 농협·어협 등의 신용사업)·보험회사(생명보험, 손해보험) 등의 민간금융기관과, 우편저금·간이보험·공적연자금 등 정부 자금을 자원으로 하는 각종 정부금융기관, 그리고 주식이나 회사채에 의한 자금조달을 매개로 하는 증권회사로 이루어져 있다(→ 색인:도쿄 증권거래소).


    도쿄 증권거래소

    아시아에서 가장 큰 증권 거래소 중 하나

    ⓒ Chris 73 / wikipedia | CC의 BY-SA 3.0

    전전의 재정제도는 메이지[明治] 헌법 아래 의회의 통제력이 약하고 지방재정도 거의 자주제를 갖지 못했다.


     전후 신헌법 아래 제정된 재정법은 재정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랐으며 전시 인플레이션에 대한 반성에서 적자국채의 발행과 일본은행의 국채인수를 금지했다.


    재정제도는 중앙재정과 지방재정으로 나뉘며 각각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로 이루어져 있다.


     지방재정에서는 특별회계 중 독립채산제를 취하는 공영기업 회계 등을 제외한 것을 일본회계와 합쳐 보통회계라 부른다. 모든 회계에는 각 연도마다 세입·세출에 대한 예산·결산이 있으며 이는 국회 또는 지방의회의 의결사항이다.


    연도 도중에 사정 변경으로 추가 수정된 예산을 보정예산이라 하며, 연도 개시전에 예산이 성립되지 못한 경우는 성립될 때까지의 조치로서 잠정예산제도가 있다.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전전 노동조합은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지 못하다가 전후 개혁에 의해 노동기본법이 공인되면서 노동운동이 고양되었다.


     이때 조합조직이 전시중의 산업보국회(産業報國會) 지부 조직을 사실상 계승한 사업소별·기업별 형태를 취하게 됨으로써 종신고용, 연공임금, 기업별 조합이라는 '일본적 노사관계'의 3가지 특징이 생겨나게 되었다.


     당초 공산당의 지도를 받은 산별회의(産別會議)가 운동의 주도권을 갖고 있었으며 1950년 7월에 사회당계의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좌경화된 총평 주류에 대해 우파가 반발하여 1954년 민간산업별 단일조합을 중심으로 한 전일본노동조합회의(전노회의:1964년 전일본노동총동맹으로 발전)가 결성되었다.


     그동안 일본관공청노동조합협의회(관공노)를 중심으로 한 총평은 1955년 이후에는 춘계투쟁(춘투)으로 일본형 임금투쟁의 패턴을 확립하는 한편 당시 중공업 및 사양산업인 석탄산업에서 빈발하는 해고·합리화에 대한 격렬한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고도성장에 의한 노동력 수급의 부족과 함께 재벌해체 후 일반화된 전문경영인의 합리적 노무정책과 민간노조 지도자의 노사협조 노선이 결합하여 일본적 노사관계의 내실이 다져졌다.


     임금인상률 35%의 성과를 올린 1974년 춘투 이후 노동쟁의 건수가 격감하고 노동운동은 침체했다.


     저성장에 의한 고용불안으로 '임금보다 고용'이 노사 쌍방의 주요관심사가 되었으며 구미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노동조합이 산업합리화와 감량경영에 대해 협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면에서는 여전히 여유가 없어 노동·노동시간 조건은 개선되지 않은 상태이다.



    노동시간은 미국, 프랑스에 비해 과중하다. 거기에다 왕복 2~3시간의 통근시간을 더하면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은 거의 없다.


    노동형태로는 주부의 시간제, 학생의 아르바이트와 같은 저임금노동이 성행한다.


    노동자는 노동조합에서 유리되어 노동전선은 더욱 약화되고 있다. 연구조사에 따르면 일본인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가족이며, 국가나 사회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불과 1%이다.

    복지와 사회보장

    메이지 시대 이래 구빈정책과 군인·관리에 대한 은급제도가 있었으며 쇼와 시대에는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건강보험과 후생연금제도가 형성되었다.


    전후 신헌법에 생존권 규정이 채택되고 영국의 비버리지 보고서가 소개됨에 따라 국민의 권리, 사회보장의 제도화가 정부의 책임과제가 되었다.


    사회보장의 중추를 이루는 의료·연금에 대해서 국민개보험이 확립된 것은 국민건강보험과 국민연금제도가 발족한 1961년이다.


     제2차 고도성장 과정에서 공해문제 등 사회문제가 심각해지고 고령화 사회의 도래가 예측됨에 따라 국민의 관심이 복지로 모아졌다.


    1973년 국민연금제 실현과 모든 연금에의 물가 슬라이딩제의 도입, 노인복지법 개정에 의한 70세 이상의 의료비 자기부담분의 공채인수제도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석유위기를 계기로 경제가 저성장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보장비는 팽창하여 재정적자 확대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에 정부는 복지정책을 재검토하여 '자조노력'을 강조한 복지정책의 재건이 시작되었다.


     노인의료나 피용자 보험 본인의 일부 자기부담 도입, 연금개시 연령의 인상 외에 특히 공비(公費) 부담 경감을 위해 의료·연금 양 보험을 통해 난립하고 있는 제도의 조정·통일을 꾀하는 시책이 전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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