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칼럼니스트 조근묵 입니다.
지난 편에서는
‘죄수의 딜레마’ 이론과 ‘사슴사냥’ 모형을 통해
최선이 아님에도 배신을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 인간,
합의를 바탕으로 한 리더십과 팔로우십의 중요성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하여 살펴보면 볼수록 차츰 멀미가 나기 시작합니다.
각종 편향성을 근거로 인간을 비합리적인 존재라고 몰아붙일 수도 있고,
이기심보다는 공동의 이익이
나 공정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성적인 존재로 추켜세울 수도 있으니,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지 헷갈리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매우 복잡한 존재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수십 년 동안 해로한 부부도 죽을 때까지 상대방을 미처 다 알지 못하며
부모와 자식 간에도 알다가도 모를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일단 사람보다 단순한 로봇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로봇은
어떤 내용을, 어떤 순서로, 어떻게 처리하라는 식의 명령 프로그램으로 작동합니다.
즉,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을 파악하면
로봇이 어떻게 판단하고 작동할지 예측이 가능합니다.
반면 사람에게는 로봇처럼 프로그램화된 명령이 없고,
따라서 어떤 내용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표준 알고리즘도 파악할 수도 없으며,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할 것인지 예측이 어렵습니다.
특히나 판단할 시점에서 감정상태가 매우 불안정하거나,
특정 사안에 대한 경험이 강렬하거나, 관습에 따라 직관적으로 판단하는 경우에는
더욱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확률이 높아집니다.
맹자의 사단칠정이나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인간에게도 기본적으로 내장된 알고리즘이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이 있습니다만 이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니만큼 논외로 하겠습니다.
이처럼 어떤 사안에 대하여 논리적이며 순차적으로 해법을 발견해 나가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감정 혹은 습관이나 직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을 일컬어
‘휴리스틱(Heuristic)’이라고 하며,
경험에 따라 판단한다고 하여 ‘경험법칙’이라고도 합니다.
로봇과 인간의 이러한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 바로
인공지능 ‘알파고’와 인간의 바둑 대결입니다.
알파고는 논리적 알고리즘 외에 그 어떤 요소도 개입시키지 않기 때문에
모든 상황에서 정확한 수를 찾아내지만,
인간의 수에는
상황의 유불리에 따른 감정적 요소와 소위 ‘정석’이라고 하는 습관적 요소가 개입되므로
상황에 따라 정확도가 떨어집니다.
바둑은 빠른 계산과 정확한 판단으로 한 집이라도 많이 차지해야 승리하는 게임이니
인간보다 알파고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실제로 인간은 아주 간단한 계산임에도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도 다음의 문제를 계산하지 말고 직관적으로 선택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짝퉁과 명품시계가 섞여 있는 A와 B 두 개의 상자가 있는데, 상자에서 명품을 꺼내면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어느 상자를 선택하겠습니까?
<A 상자에는 짝퉁 10개와 명품시계 1개, B 상자에는 짝퉁 100개와 명품시계 9개>
놀랍게도 실험 결과 대부분의 사람이 B 상자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A 상자는 10%, B 상자는 9%로써 간단한 계산으로도 확률 차이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만,
당장 선물을 받고 싶은 감정이 앞서다 보니
명품시계 1개와 9개의 차이에 현혹되어
B 상자를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A를 선택하신분들은 칭찬해 ^^)
인간의 휴리스틱은 많은 기업의 마케팅에 활용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IMF 외환위기 이후 모 카드사가 내놓은 ‘부자 되세요!’라는 카피의 광고입니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신용카드는 부자를 만들어주기보다
과소비나 카드대출 등을 부추겨 부자 되는 것을 방해하는 상품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이 카드사의 광고를 보면서 마치 금방이라도 부자가 될 것 같은 감정에 휩싸였고,
나라 전체가 부자 열풍에 빠지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서점에서는 부자 혹은 재테크 관련 서적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고조된 국민감정을 대변하였고
이후 금융권의 펀드 열풍까지 이어졌습니다.
위와 같은 마케팅 활용 사례는 동네의 작은 편의점부터 대형마트와 백화점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새로움을 강조하는 ‘New’,
트렌드를 강조하는 ‘Hot’,
고급을 강조하는 ‘프리미엄’,
안전을 강조하는 ‘친환경’
등의 진열대 태그와 상품 마크들이 매장에 가득합니다.
그야말로 온갖 상품들이 경연을 벌이듯 소비자들의 감정에 호소하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휴리스틱 성향은 직장 내 의사결정 프로세스나 조직문화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 중에서 중요한 일들은 대부분 의사결정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안일수록 정보도 부족하고 시간 제약이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완벽하지 못한 조건에서 의사 결정을 하다 보니
많은 책임자는 휴리스틱 접근법으로 의사결정을 하게 됩니다.
당연히 그 의사결정은 오류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유능한 책임자와 무능한 책임자의 경계가 그어집니다.
유능한 책임자일수록 개인적인 감정이나 관습에 휘둘리지 않고
중요 변수들을 찾아 분석하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또한, 의사결정을 한 후에도
차츰 변수를 확대하고 분석하면서 오류가 날 확률을 최대한 줄여나갑니다.
반면 무능한 책임자는 정박 효과(앵커링효과)에 빠져 냉철한 판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정박 효과는 마치 닻(앵커)을 내린 배가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있듯이
특정 정보나 기억에 사로잡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충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능력의 차이와는 별개로 시급한 사안일수록 이런 오류에 빠지기 쉬운데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은 이를 두고 생겨난 듯합니다.
휴리스틱은 낙인효과(스티그마 효과)와 피그말리온 효과의 형태로 조직문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낙인효과는 ‘부정적으로 낙인이 찍힌 사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부정적 행태를 보이며 점차 심화된다’는 이론입니다.
철없던 시절 저지른 죄 탓에 전과자로 낙인이 찍힌 후
점차 흉악한 범죄자가 되어가는 현상이 대표적인 낙인효과입니다.
이런 사례는 크든 작든 직장 내에서도 빈번히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번의 사소한 실수 때문에 영업 기회를 날린 사원이 있습니다.
화가 난 팀장이 팀 영업회의에서 당사자의 무능함을 탓하자
졸지에 그 사원에게는 무능한 사원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 찍힌 사원은 의욕이 떨어져 영업 실적이 곤두박질치고
급기야 쓸데없는 오기까지 발동하여 자사 제품에 대한 험담까지 늘어놓으며
영업기회를 일부러 날리기까지 합니다.
극단적인 사례 같지만, 영업 현장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발생합니다.
조직 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행위’와 ‘행위자’를 정확히 구분하여 비판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잘못된 행위가 의도하지 않은 실수라면 그 행위에 대하여 반성하게 하되
행위자에게 낙인을 찍어서는 안 됩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이와 일맥상통하는 격언입니다.
단, 의도를 갖고 저지른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는 사규와 절차에 따라 엄중하게 징벌을 내리면 됩니다.
낙인효과와는 반대 개념으로
긍정적인 기대나 관심이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효과를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합니다.
이 용어는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자신이 조각한 여인을 사랑하자 신이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그리스신화에서 유래하였으며,
자녀 교육에 많이 적용되는 개념입니다.
유명한 베스트셀러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바로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피그말리온 효과를 강조한 책입니다.
일부 책임자들은 칭찬과 격려만으로 어떻게 조직을 운영하느냐는 비판도 있습니다만,
사규에 따라 신상필벌을 엄중하게 적용하는 조직문화와
칭찬과 격려가 넘치는 조직문화의 양립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지금,
알고리즘에 의해 정확하게 판단하고 작동하는 인공지능 로봇이 지배하는
4차산업 혁명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알고리즘이 아닌 휴리스틱의 명령을 받는 인간이기에
그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므로 적잖은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유전되고 축적된 바둑의 왕좌를
하루아침에 인공지능 알파고에게 넘겨주었다고 하여 위축될 필요 없습니다.
사실 바둑의 진정한 의미는 승부가 아니라 바둑을 두면서 손으로 나누는 대화 ‘수담(手談)’에 있으니,
알파고는 느끼지 못하는 바둑의 맛은 여전히 인간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4차 산업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정교함으로 무장한 생산 수단으로서만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감정과 경험과 습관을 서로 나누며 공존하는 존재로서 더 의미가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하던 많은 일을 기계가 대신하겠지만,
우리 인간은 기계가 해야 할 수많은 일을 만드는 것 자체를 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많은 일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사람마다 다른 감정, 성장 환경, 경험과 습관, 그 불완전한 다양성을 인정하고 나누고 조합하다 보면 일은 끊임없이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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