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승 입력 2019.07.02. 20:43
[뉴스데스크] ◀ 앵커 ▶
한일 과거사 문제의 핵심 중 하나인 위안부 문제를 28년전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의 신문 기자였습니다.
국적을 떠나서 의로운 일을 한, 그래서 우리 입장에선 빚을 진 셈인데요
이 기자는 우경화의 그늘이 짙은 일본에서 그 동안 각종 음해와 협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오늘 마침 관련해서 재판이 열렸는데 고현승 특파원이 직접 만났습니다.
◀ 리포트 ▶
환갑을 넘긴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 신문 기자는 지난 1991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 세상에 알렸습니다.
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로선 아무도 말하지 않던 충격적인 진실을 기사로 썼습니다.
[우에무라 다카시/전 아사히 신문 기자] "(할머니에 대한) 조사 결과를 알려줬고 조사 테이프를 들려줬습니다. 그래서 쓴 기사가 이것입니다."
사흘 뒤, 한국에서 김 할머니의 공개 증언이 나왔고, 관련 보도가 계속 터져나오면서 위안부 문제는 한일 외교문제가 됐습니다.
92년, 일본 미야자와 총리의 사과 발언.
93년, 위안부 모집과 관리 등에 강제성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고노 관방장관의 담화까지 이어졌습니다.
[미야자와 기이치/일본 총리(1992년)] "반성과 사과의 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본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춰낸 일본인 기자.
그러나 이후 그는 우익들의 표적이 됐습니다.
'날조 기사를 썼다'는 근거없는 음해는 물론 살해 협박까지 직장과 집으로 수없이 날아들었습니다.
[우에무라 다카시/전 아사히 신문 기자] "(17살이던 딸을) 죽이겠다는 협박장이 왔다고 딸에게 얘기해줬는데, 정말 많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집요한 괴롭힘에 은퇴 후 대학 강단에 서려던 계획도 좌절됐습니다.
견디다 못한 우에무라 기자는 거짓 기사와 우익들을 상대로 소송을 내며 반격을 시작했고, 정정보도를 끝내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협박과 음해를 중단시키려는 명예훼손 소송에서는 법원이 잇따라 기각 판결을 내렸습니다.
'날조 기사를 썼다'는 우익들의 주장은 공익 목적이 있는 만큼 논평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는 항소했고, 싸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열린 항소심 재판에는 한국의 원로 언론인들이 찾아와 힘을 실었습니다.
"계속 투쟁하겠습니다."
"응원하겠습니다."
[이부영/동아일보 해직 기자] "전두환 노태우 때 많은 사람들이 잡혀 들어갔을 때 재판에 응원하러 갔었잖아요. 똑같은 심정으로 왔어요."
[임재경/전 한겨레신문 기자] "우에무라 기자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 분은 진실을 보도했을 뿐입니다."
우에무라 전 기자는 '위안부 문제는 한국 자신의 문제인데도, 한국에는 이를 추적하는 전문 기자가 없는 것 같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우에무라 전 기자에게 사상 최악이라는 한일관계에 대해 물었는데, 그는 일본 내 3차 한류 붐, 한국인의 역대 최다 일본 방문에서 보듯 민간교류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며 정치와 외교에서 좀더 상대를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삿포로에서 MBC뉴스 고현승입니다.
(영상취재 : 김진호(도쿄) / 영상편집 : 나종석)
고현승 기자 (countach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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