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사진 서성일 기자 입력 2019.06.15. 16:54 수정 2019.06.15. 20:14
[경향신문] 기자는 운명적으로 거짓을 폭로하고 부정과 싸울 수밖에 없다. 폭로하고 싸우는 대상이 거대할수록 기자 평가도 높아진다. 특종의 등급은 얼마나 큰 거짓과 부정과 맞섰느냐로 결정된다. 개인 간 문제보다 집단이나 세력, 나아가 정부가 자행한 부정을 폭로하는 보도가 높은 평가를 받는다. 기자에게 가장 큰 특종은 ‘인류에 대한 범죄’를 고발하고 싸우는 것이다.
한 기자가 있다.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슈칸킨요비(週刊金曜日)> 발행인이다. 일본인인 그는 일본 우익세력과 아베 정권과 싸운다. 민간세력과 권력이 결합한 거대한 상대다. <아사히신문> 기자였던 그는 1991년 8월 11일 한국인 종군위안부 김학순 할머니 사례를 처음 보도했다. 이 보도는 그때까지 일종의 ‘에피소드’로 여기던 일제하 종군위안부 문제를 인륜을 거스르는 전쟁범죄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를 보도한 우에무라 기자는 국익을 해친 ‘날조기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우익세력은 그의 고등학생 딸의 신상을 털고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도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다른 취업길도 막혔다. 하지만 그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의 참담한 현대사가 일본 기자에 의해, 일본 언론에 의해 의제화되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는 점에서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가 자유언론실천재단(이사장 이부영)이 주최하는 강연회(6월 18일 서울 프란치스코 교육관 오후 6시)를 갖는다. 지난 6월 7일 <경향신문> 회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 종군위안부 사례 처음 보도
-일본 우익과 법정싸움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명예훼손 소송은 두 군데서 하고 있다. 도쿄에서 니시오카 도쿄기독교대학 교수와 하고 있고, 삿포로에서는 사쿠라이 요시코라는 우파 저널리스트를 상대로 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삿포로에서 내린 1심 판결에서는 내가 졌다. 판결은 사쿠라이가 나의 명예를 훼손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쿠라이가 인신매매로 위안부가 됐다는 것을 믿은 상당한 이유가 있다는 이상한 논리로 사쿠라이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도쿄에서 1심 재판은 6월 26일 선고된다.”
-법정싸움에서 중요한 쟁점은 무엇인가.
“1991년 8월 11일 내가 쓴 기사는 한국정신대협의회가 김학순 할머니로부터 증언을 조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쟁점은 위안부에 대한 강제성이다. 강제로 끌고 갔다는 할머니 증언만 있고 증거문서는 없다. 나는 보도에서 ‘강제’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은 일본 재판소가 우경화됐기 때문이다.”
-왜 한국인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나.
“1990년 일본 국회에서 사회당 의원이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질의했다. 이에 정부가 ‘민간이 했고 정부는 관계없다’고 대답했다. 이에 한국에서 기독교 여성단체들이 성명을 발표하는 등 반발했다. 당시 나는 오사카 본사 사회부 민권·재일한국인 담당기자였다. 재일한국인은 똑같이 세금을 내면서도 참정권도 없고, 취업은 물론 아파트 입주에도 차별을 받는다. 나는 ‘이웃사람’이라는 연재기사를 통해 이런 차별을 고발하는 기사를 썼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위안부 문제에 문제의식이 있었다.”
-대학시절부터 한국에 관심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와세다대 다닐 때 재일한국인 선배를 만났다. 광주 민주화운동 다음해인 1981년 한국 여러 곳을 여행했고, <아사히신문>에 ‘김대중 무죄다’라는 기고를 하는 등 김대중 구명운동에 참가했다. 1982년 <아사히신문>에 입사했다. 1987년부터 1년간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참, 아내가 한국인이다. 장모가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회원이고, 아내는 그 유족회 직원이었다.”
일본 우익과 법정싸움 아직도 진행 중
-한국 언론도 관심을 가지지 않은 위안부 문제를 일본 언론이 먼저 기사화했다. 이 보도는 일본 사회에서 하나의 에피소드였던 위안부 문제를 전쟁범죄로 비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니다. 내가 보도한 것은 위안부 할머니가 증언한다는 얘기뿐이다. 나중에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통해 다 얘기했고, 이것이 한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비록 내가 기자회견 3일 전에 기사를 썼지만 김 할머니가 용기 있게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다면 내 기사는 그냥 묻혔을 것이다. 내가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니다.”
우에무라는 거듭 자신의 보도에 대한 과대평가를 우려했다. 스스로에 대한 겸손함도 이유겠지만, 진행되는 재판에 대한 영향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어찌됐든 김 할머니는 자신의 얼굴을 내보이며 기자회견을 했고, 1991년 12월 6일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도쿄지방법원에 제소했다. 이 문제는 한·일 외교문제로 비화되면서 1992년 1월 17일 한국을 방문한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했다. 특히 1993년 8월 4일 일본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은 위안부 모집과 이동, 관리 등 전체적으로 강제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죄와 반성을 하는 이른바 ‘고노 담화’를 발표하기까지 이른다. 1995년 일본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만들고,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도 사과하는 등 위안부 문제는 수습단계에 들어선다. 1996년 4월 유엔 인권위원회도 여성 폭력에 대한 결의를 채택했다.
그러나 1997년 일본 자민당 아베 신조 의원에 의해 상황은 거꾸로 간다. 위안부 문제가 기술된 역사교과서에 반대하는 ‘일본의 전도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이 결성되고 아베 의원은 사무국장을 맡았다. 우에무라는 “그때부터 우익들이 고노 담화를 폐기하려는 공격을 시작했고, <아사히신문>도 그 공격 대상이 됐다”고 말했다.
-<아사히신문>도 보수화가 됐고, 결국 우에무라 기자도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나.
“2014년 8월 5일 <아사히신문>은 제주도에서 한 여성이 강제로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증언을 보도한 기사를 취소했다. 이것을 빌미로 우익들이 ‘위안부 문제에 <아사히신문>이 거짓 보도했다’고 주장하면서 내 문제까지 거론했다. <아사히신문>이 보수화된 것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지 않았을 뿐이다.”
-결국 회사를 중도에 그만두지 않았나. 해직기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아니다. 나는 해직기자가 아니다. 대학교수가 좌절됐을 때 <아사히신문>에서 복직, ‘돌아오라’는 말도 했다. 그러나 내가 거부했다. 내가 복직하면 우익들과 계속 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사히신문>은 2013년 한국인 박유하가 쓴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을 번역해 출판했다.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은 위안부는 자발적이고 오히려 일본군과 동지적이라는 관점의 책이다. 그런 책을 낼 정도라면 보수화됐다는 증거 아닌가.
“<아사히신문> 출판부의 판단일 것이다. 계열사이긴 하지만 돈 벌기 위해 아무 책이나 출판하니까. 일본에는 박유하 같은 사람을 믿고 싶어하는 지식인도 있지만 보통은 그 분야에 대해 관심이 없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에 비교적 리버럴한 <마이니치신문>이 ‘아시아태평양상’을 주고, 학술상까지 줬다. 일본 교수와 학자, 비평가, 언론인 등 지성의 수준이 매우 깊고 높은 것으로 알려진 이들도 아베 총리의 극우정책에 속수무책으로 있는 이유는 뭔가.
“일본 지성 수준이 높지 않다.(웃음) 사상의 뿌리가 없어서 그렇다. 우익들이 ‘죽인다’고 하면 두려워한다. 좋을 때는 말하지만 탄압국면이면 말을 못한다. 심지어 어제까지 친구였지만 갑자기 외면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에서 한때 NHK가 이상적인 공영방송의 롤모델로 평가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닌 것 같다.
“NHK도 완전 친정부 방송이 됐다. 이젠 공영방송의 롤모델이 아니다. 그냥 회사에서 일하고 월급받는 ‘회사원 기자’들이 많아졌다. 요즘 그런 후배 기자들이 많다. 나도 소시민적 기자인지도 모른다.(웃음) 그러나 이런 시련이 있어서 오히려 많은 공부를 하고 세계가 넓어졌다.”
우에무라는 1958년 일본 고치현에서 태어나 와세다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82년 <아사히신문>에 입사했다. 오사카 본사 사회부를 거쳐 테헤란특파원, 서울특파원, 베이징 총국에서 근무하다 2013년 4월 조기 퇴직했다. 2010년 와세다대 대학원에 진학했고, 2012년 4월부터 호쿠세이학원대학 강사를 하다 2016년 3월부터 한국가톨릭대 초빙교수로 위촉돼 ‘동아시아 평화’를 강의한다.
가톨릭대학 초빙교수로 강의
우에무라는 지난해 9월부터 일본의 진보적 시사주간지 <슈칸킨요비> 발행인 겸 사장을 맡고 있다. 일주일에 3일은 서울에서, 4일은 일본에서 보낸다. 그는 “<슈칸킨요비>는 <아사히신문> 기자 출신이 창간한 25년 된 리버럴·진보적 잡지”라며 “광고가 거의 없고 정기구독으로 운영된다”고 말했다. 한때 정기구독자가 5만명까지 됐으나 요즘에는 1만3000명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슈칸킨요비>에 재일교포로 1961년 한국에서 사형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과 관련한 기획기사도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사실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로 표현되지만 이런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는 것은 양국 모두의 불행이다. 재일교포에게도 큰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베 총리가 바뀐다고 일본의 우경화가 멈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서 “일본과 한국 국민의 감정이 나빠진 것은 언론의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특히 역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젊은이, 젊은 기자들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역사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면 더 복잡해진다”면서 “한·일관계는 역사를 인식하는 바탕에서 미래지향적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는 2017년 7월 한·일학생포럼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한국과 일본의 기자 지망생이 함께 숙식을 하며 취재와 토론을 하는 모임이다. 첫 포럼은 한국 ‘나눔의 집’을 방문해 위안부 할머니를 인터뷰하고, 두 번째, 세 번째 포럼은 일본 히로시마와 오키나와에서 열렸다. 네 번째 포럼은 한국 5·18 광주에서 열렸고, 서울 남영동 인권기념관도 둘러봤다. 그는 30년 넘는 언론생활에서 자신이 추구한 것은 ‘인권과 평화’라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1991년 위안부 문제를 취재하던 한국 기자는 모두 언론계를 떠났고, 한국 기자들도 역사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글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사진 서성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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