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좌우의 높은 대 위에 앉아 전방을 응시하는 해치(獬豸)의 늠름한 자태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만약 이곳에 해치상이 없었다면 광화문의 위용은 물론 경복궁 전체의 권위가 반감되었을지도 모른다. 궁궐 내에서 볼 수 있는 동물상들은 주로 상서와 길상 또는 벽사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광화문 해치처럼 궁궐 밖에 있는 해치상은 그런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해치의 권위 있는 자태 뒤에는 법과 정의에 따라 광명정대한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조선왕조의 정치철학과 요순의 정치를 이 땅에 펼치려 했던 조선 임금의 원대한 이상이 숨어 있다.
2008년 5월, 서울특별시의 상징동물 선정을 위한 자문회의에서 학자들 간에 광화문 해치상의 정체와 성격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 해치가 시비곡직을 판결할 때 거짓을 말하는 사람을 외뿔로 응징하는 짐승임을 감안할 때 광화문 양쪽의 동물상은 뿔이 없으므로 해치가 아니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해치상은 맞지만 수문장으로 그 성격이 바뀌면서 뿔이 없어진 것이라는 희한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편 송사와 관련 있는 신수(神獸)라면 사법부 건물 앞에 있어야 하는데, 궁궐 정문 앞에 있다는 점이 의심스럽다는 사람도 있었다. 논자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오직 뿔의 유무와 해치상이 놓인 장소에 집중돼 있었다.
그렇다면 우선 광화문 해치상의 외형부터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몸은 동전 모양의 비늘로 덮여 있고, 부리부리한 눈에 주먹코가 돋보이며, 입술 사이로 앞니와 송곳니가 드러나 있으며, 다리에는 화염각(火焰脚, 불꽃 모양의 갈기)과 나선형의 갈기가 선명하고, 꼬리는 엉덩이를 거쳐 등에 올라붙어 있다. 정수리는 약간 불룩할 뿐이고 문제의 외뿔은 나타나 있지 않다.
한편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해치상이 남양주 유릉(裕陵)에 있다. 신도(神道) 양쪽에 도열한 동물상들 중에 포함되어 있는데, 정수리에 솟아난 외뿔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바로 이 해치상 제작을 위한 겨냥도임이 분명한 『순종효황제산릉주감의궤(純宗孝皇帝山陵主監儀軌)』(1926년)에 수록된 해치 그림에는 정수리에 뿔다운 뿔이 묘사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당시의 화원이 해치상을 그렸다는 사실이다. 광화문 해치상도 정수리에 뿔이 표현돼 있지 않지만, 경복궁 중건 당시 석공 이세욱이 이 상을 조각한 것이 분명한 사실이고, 또 모든 사람들이 해치상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누가 뭐라 해도 해치상인 것이다. 이는 동구 밖의 석상을 마을 사람들이 오랫동안 미륵불로 알고 경배해왔을 경우 도상적 특징이야 어떻든 그것이 미륵불로 인정돼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정수리에 외뿔이 솟아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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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광화문 복원과 함께 재차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으나, 원래는 광화문 70~80m 전방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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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
유릉의 해치상 제작을 위해 그려진 의궤 속 해치 그림에는 뿔이 없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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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承政院日記)』를 보면 경복궁 중건 후 2년째 되던 1870년(고종 7) 어느 날, 고종은 광화문 앞에서 아무나 말을 타고 다니는 일이 없도록 사헌부에 규찰을 명하면서 전교를 내렸다.
"대궐 문에 해치를 세워 한계를 정하니, 이것이 곧 상위(象魏, 서울 성문〔城門〕. 상〔象〕은 법상〔法象〕, 위〔魏〕는 '높다'는 뜻으로, 옛적에 법률을 성문에 높게 달았던 데서 나온 말임)이다. 조정 신하들은 그 안에서는 말을 탈 수가 없는데, 이것은 노마(路馬, 임금의 수레를 끄는 말 또는 임금이 타는 말)에 공경을 표하는 뜻에서이다."
이 내용에서 우리는 광화문 해치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첫째 고종이 불렀던 대로 광화문 석수의 이름이 해치이고, 둘째 '상위'는 엄정한 법률제도를 뜻하는 말이므로 해치가 법과 연관이 있는 동물이고, 셋째 해치상과 광화문 사이 지역이 임금의 수레만 들어갈 수 있는 성역으로 설정돼 있다는 사실이다.
끝으로 근대의 월간잡지 『별건곤』에 실려 있는 광화문 해치에 관한 내용을 하나 더 소개한다.
"광화문이란 세 글자의 문액은 정학교의 필이요, 상량문은 이유원이 찬하고 신석희가 썼으며, 문전의 쌍해치(雙獬豸, 치〔豸〕는 신양이요, 음은 해치이니 속칭 해타이다)는 근세 미술대가 이세욱(혹은 태욱〔泰旭〕)의 작이다."(민병한, 「경성 팔대문과 오대궁문의 유래」, 『별건곤』 제23호, 1929년 9월)
위와 같은 기록들이 증명해주고 있으므로 이제 광화문 석수가 해치냐 아니냐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
해치는 해치(解廌), 신양(神羊), 식죄(識罪), 해타(獬駝) 등 여러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중국 고전이나 사전류에서 해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외형적 특징을 상세히 설명한 경우는 드물다. 『사원(辭源)』에서는 양 아니면 사슴일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로 설명하고 있으며, 권위 있는 사전으로 알려진 『사해(辭海)』에서도 그냥 신수라고만 말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사기집해(史記集解)』나 『후한서(後漢書)』 등에서는 다 같이 사슴의 일종으로 설명하고 있고,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소를 닮았다고 말하고 있으며, 왕충(王充)의 『논형(論衡)』에서는 뿔이 하나 달린 일각수라고 적고 있다.
최근 중국 고고학자와 서예가들이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해치 형상은 진나라 이전부터 봉니(封泥)각주1) , 화상석(畫像石)각주2) , 인장(印章)각주3) 등에 자주 나타났으며, 그 기본 형태는 양과 비슷하다고 했다. 산서성(山西省) 혼원현(渾源縣)의 이욕촌(李탐村)에서 출토된 전국시대 청동기 파편에서 해치 형상이 확인되었는데, 그 모양은 짧은 꼬리를 하고 양의 발굽에 뿔 하나를 달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릉 해치상과 같이 정수리에 뿔이 나 있는 것과 광화문 해치상처럼 뿔이 없는 것 두 종류가 발견되고 있다.
해치가 법과 관련이 있다는 점은 '法'(법)의 고자인 '灋'(법)에서 스스로 드러난다. 글자 속의 '廌'(치)가 곧 해치다. 말하자면 '灋'은 '廌'와 '法' 두 글자를 합쳐 만든 글자인 것이다. 그리고 '氵'(수)는 수면이 평평하듯이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뜻을 나타낸다.
각종 고전을 통해 본 해치의 성격에 관한 공통된 내용은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신수라는 점이다. 해치는 정확한 판단력과 예지력을 가지고 있어 언행만 봐도 그 사람의 성품과 됨됨이를 알아차리며, 사람들 상호 간에 분규나 충돌이 있을 때 능히 시비곡직을 가려 이치에 어긋난 행동을 한 자를 뿔로 받는다고 한다. 더군다나 극악한 죄를 지은 사람은 뿔로 받아 죽이고 먹어버리기까지 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해치와 함께 항상 거론되는 인물이 고요(皐陶)다. 그는 순임금을 도와 나라 안팎의 오랑캐를 물리쳐 백성을 편케 하고, 법을 엄격히 적용하여 풍기를 바로잡은 인물로 후세 법관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는 죄의 유무와 경중을 가릴 때 해치의 능력을 빌려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그 뜻을 살려 조선 조정에서는 법관의 옷과 모자에 해치 문양을 수놓았다.
해치상을 궁문 앞에 세우는 제도는 중국 초나라 때부터 있었다. 그 뜻은 대소 관원들로 하여금 마음속의 먼지를 털어내고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으로 법과 정의에 따라 매사를 처리하게끔 하는 데 있다. 광화문 해치상은 단순한 벽사상이 아니라 법과 정의의 상징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관악산 화마로부터 궁궐을 보호하기 위해 해치상을 세웠다는 풍수 관련 속설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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