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반석 입력 2018.12.13. 04:45
前 HID 요원 이순씨 아들 영석씨, 우연히 읽은 책서 6ㆍ25때 선친 행적 발견
보상금 지급 부결 후 소송 내 승소… 이영석씨 “애국이 보상받는 나라로”
“주문,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심의위원회가 원고 이영석에게 내린 보상금 부(不)지급 처분을 취소한다.”
지난달 1일 서울행정법원의 승소 판결을 받아 든 이영석(64)씨는 스물여섯 해 전 세상을 떠난 부친 이순(1927~1992)씨를 떠올렸다. 이순씨는 6ㆍ25 전쟁 때 전선 너머 북한 지역으로 파견돼 비밀작전을 수행하던 육군첩보부대(HID) 요원이었다. 이날 판결은 이순씨가 살아 있을 때 응당 받았어야 할 대접이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누구도 원치 않던 가장 험한 일을 했음에도 역대 정부는 이순씨 같은 이들의 존재를 부정해 왔다. 살아 생전에는 국가가 철저히 외면했던 이순씨 전공(戰功)과 명예가 정전 65년이 지나 아들의 노력으로 비로소 국가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 우연히 책으로 만난 아버지의 진실
2004년 참여정부에서 특수임무수행자보상법이 제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순씨의 아들 영석씨는 우연히 ‘동무! 나 국군이요’라는 책을 읽으며 부친의 자취를 발견했다. 저자는 1951년 6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함경남도와 강원도 접경인 영흥만 일대에서 공군 특무대원으로 활약한 이세환(전 한국일보 기자)씨였다. 그 책에는 육군HID 소속 이순씨가 각종 첩보활동에 참여한 기록이 적혀 있었다.
영석씨는 부친이 6ㆍ25 전쟁에 참전해 전선을 넘나든 사실은 알았지만 이 책을 통해 HID 특수임무 수행과 관련된 구체적 활약상을 처음 알게 됐다. 부친과 관련된 다른 기록과 동료대원들을 찾아 다니게 된 계기다.
영석씨가 어렵게 수소문해서 만난 이세환씨는 부친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세환씨는 자신이 52년 6월 전장을 떠날 당시 동료들의 송별사를 모아 둔 비망록을 펼쳤다. 비망록에는 ‘가거라 벗이여! 기약 없는 작별을 동해바다 새벽에 호소나 하리’라는 구절과 함께 부친 이름이 적혀있었다. 눈에 익은 부친 필체였다.
아들이 발견한 부친의 활약은 대단한 것이었다. 6ㆍ25 전쟁 당시 육지를 점령한 북한군과 해상을 장악한 미 해군 함정 사이 대치가 이어지던 함경남도 영흥만에서 북한군 정보를 파악하고 납치ㆍ암살하는 등의 비밀 임무는 원산 앞바다에 있는 여도 섬에 근거지를 둔 HID 등 북파 첩보원의 몫이었다. 주로 이북 출신 피난민이었던 이들은 모선을 타고 엔진소리가 들리지 않을 거리까지 이동한 뒤, ‘뗌마’라 불리는 목선을 타고 노를 저어 상륙했다. 북한군 군복을 입어 위장하거나 무장을 갖춰 적지에 침투했지만, 삼엄한 경비에 정체가 들통나 총알 세례를 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 국가가 외면한 아버지 전공(戰功)을 찾아서
그러나 53년 7월 정전 협정과 함께 이순씨와 같은 영웅들의 존재는 역사에서 지워졌다. 북파 첩보원들에게는 아무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고, 특수임무 경력이 공식 복무기록에 남지 않아 군대에 다시 끌려가기도 했다. 북파공작원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좋지 않아 취업이 어려웠고 제대 후엔 동향 파악이나 감시를 당하기도 했다. 국가는 정전협정을 위반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90년대까지 활약했던 북파 공작원 존재 자체를 부정해왔다. 2004년 뒤늦게 이들에 대한 보상법과 관련조직(특수임무수행자 보상심의위원회)이 구성됐지만, 이순씨처럼 이미 세상을 버린 이들이 많아 보상이 이뤄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뒤늦게 부친 행적을 찾은 영석씨는 “국가로부터 외면 받은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겠다”면서 2014년 보상심의위원회에 자료를 제시하고 보상금을 요청했다. 이순씨가 전쟁 기간 육군 4863부대 36지구대 2지대(여도)에서 북파 공작원을 배에 태워 해안까지 침투하는 등 특수임무를 수행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보상심의위는 “단순 협조자로 잠시 근무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자료가 없어 첩보부대 채용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며 보상금 지급 부결 처분을 내렸다. 이미 전공이 인정된 이순씨 후배 공작원들이 이순씨 활약을 증언했지만 이마저도 무시됐다.
◇ 정전 65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명예회복
결국 영석씨는 부친의 명예를 찾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지난해 법원에 소송을 냈다. 영석씨는 법원에서 우종환(81)씨 등 당시 동료대원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순씨가 △영흥만 인근 적지에 침투하는 공작원을 침투지점까지 안내 및 호송하는 임무 △적지에서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는 공작원을 적지 해안선에서 접촉해 기지로 복귀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보상심의위는 “당시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은 이순씨를 위험한 임무에 투입했을 리 없다”는 입장을 폈다.
법원은 지난달 영석씨 손을 들어줬다. 포성이 멎은 지 65년, 아버지가 세상을 뜬지 26년이 지난 시점이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부장 김정중)는 판결문에서 “동료들의 진술이 일치하고 구체적이며, 공작기록부 등의 자료가 멸실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이순씨가 호송임무를 수행했고, 이는 보상법 대상인 특수임무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호송임무는 공작원들의 정보수집 임무 수행에 필수불가결하며, 수시로 적들의 공격을 받아 희생되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이번 판결은 호송임무를 보상법 대상인 특수임무로 인정하지 않았던 기존 법원 판례를 뒤엎은 판결이기도 하다.
보상심의위가 1심 판결에 불복, 항소하면서 영석씨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석씨는 12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말씀하셨던 애국이 보상받는 나라, 억울함이 없는 나라를 꿈꾼다”며 “끝까지 법정에서 아버지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밝혔다.
북파 공작원은 1951년부터 1994년까지 총 1만3,000여명이 양성돼 7,800여명이 사망 또는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졌다. 보상심의위는 지난해까지 신청자 9,175명 중 6,369명을 보상 대상자로 확정하고 2,468명은 기각, 222명은 신청을 취하했다. 116명은 아직 심의 중이다. 4차례 개정을 통해 신청기간을 연장했지만 여전히 보상을 신청하지 못한 유족도 남아 있다. 첩보부대 내 호송, 통신, 지원 업무를 담당한 이들이나 첩보부대와 유사한 임무를 수행했던 사람들이 배제됐다는 비판에 국회 내 법 개정 움직임이 있다.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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