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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민간인 학살과 일제의 그림자

올바른역사,웨곡된역사

by 석천선생 2018. 2. 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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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 리쓰메이칸대 코리아연구센터 연구고문

 

입력 : 2018.02.21 10:26:00 수정 : 2018.02.21 20:56:5

[동서남북인의 평화 찾기]베트남 민간인 학살과 일제의 그림자

동아시아 현대사를 뚫고 흐르는 국가 폭력과 저항의 발자취를 찾아, 5년 만에 베트남을 찾았다. 화가, 만화가, 사진가, 소설가, 스님 등으로 구성된 10여명의 기행단의 목적은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현장 답사와 소년·소녀 종군화가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2015년 10월, 홍성담 화가와 함께 일본 도쿄 롯폰기에 있는 모리미술관에서 ‘딩 큐 레이(Dinh Q Le)’전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딩은 1978년, 열 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와 함께 보트피플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술가가 되었고, 지금은 저명한 작가로서 베트남과 미국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그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딩의 작품은 전쟁 당시 열너댓 살의 소년·소녀들로, 1년간 미술교육을 받고 전선에 배치됐던 종군화가들과의 인터뷰를 묶은 비디오 작품이었다. 그들은 전선에서 전사들 하나하나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고, 때로는 전사들을 위하여 고향 마을의 풍경과 베트남의 자연을 그려 빨랫줄에 집게로 매달아 밀림 속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중 한 소년은 1975년 사이공 해방 시에 전차에 올라타고 입성하다가, 유탄이 눈을 스치는 바람에 눈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흐르는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즉석에서 호찌민의 초상화를 그렸다. 다분히 영웅적인 이 이야기는 베트남 인민해방군의 격렬한 저항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나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꼬마 종군화가들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딩에게 연락했다. 비서로부터 딩은 출장 중이지만, 우리가 베트남에 머무는 2월9일부터 13일 사이에 돌아온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런데 이틀 전에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비서에게 연락을 했더니, 딩이 사는 사이공(호찌민)으로 오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그가 하노이에 있다고만 믿었는데 일반적인 선입견이었다. 이렇게 우리 답사의 제1 목표가 사라져, 하노이에서는 호찌민 묘와 호아로(화로) 감옥을 견학하고 다낭으로 떠났다. 

죽으면 장례를 지내지 말고 유해를 조국의 산하에 묻어달라고 했던 그의 유언과 달리 방부처리돼 유리상자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들어있는 ‘호 아저씨’와 오랜만에 대면했다. ‘독립과 자유’를 외치며 끝까지 싸워 제국주의자를 몰아낼 것을 주문한 그는 세계사에서도 드문 ‘성공한 혁명가’이며, 청빈 검소함으로 인민의 사랑을 받은 구도자적인 위인이다. 그가 중국 광시(廣西)성의 감옥에 1942년 4월 말부터 1년 반 투옥된 시기에 한시로 쓴 <옥중일기>를 호찌민기념관의 서점에서 샀다. 열악한 옥중생활에서도 항상 유머와 위트를 잊지 않은 그의 일기는 다음의 시로 시작한다.

“이 몸은 옥중에 있어도/ 정신은 밖에 있다/ 큰일을 이루려면/ 더 큰 정신이 필요하네(身體在獄中/ 精神在獄外/ 欲成大事業/ 精神更要大).” 

하노이의 감옥은 19세기 말 프랑스가 만들었는데, 해방 전에는 베트남의 혁명가들이 한번은 거쳐가는 장소였다고 한다. 도시 한가운데에 있고 그다지 위압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방에는 벽에서 벽까지 족쇄가 달린 쇠기둥이 가로로 박혀 있었다. 수인들은 거기에 노예처럼 묶였다. 옥중에는 프랑스에서 가져온 두 대의 단두대가 눈길을 끌었다. 

베트남 전쟁 중에는 격추된 미군 비행사 등을 수용했으며, ‘하노이 힐튼호텔’로 세계에 알려졌다.

1964년부터 파병된 한국군은 거의 상륙과 동시에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2015년 베트남 노동당 정치국 전쟁범죄 조사보고서는 베트남 전쟁 기간 중 한국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 희생자를 5000여명으로 보고하고 있고, 민간인 학살 연구자들은 중부지역에서 작전을 전개한 한국군에 의한 학살은 약 80건, 90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는 광응아이성의 미라이와 빈호아, 꽝남성의 퐁니·퐁넛, 그리고 하미 등 네 군데를 찾았다. 

미군의 소대가 송미마을 주민 504명을 학살한 미라이사건의 현장은 훌륭한 자료관과 더불어 잘 보존되어 있었다. 거기서 작년에 퇴직한 팜 탄 꽁 관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사건 당시 여덟 살,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세 명 중 한 사람이다. 해방 후 고아원을 거쳐 교육을 받아 관장까지 되었다고 한다.

하미 학살사건은 1968년 2월22일 한국 해병부대가 꽝남성의 하미마을을 급습하여, 생후 두 달의 갓난아기를 포함한 아녀자들을 중심으로 135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한국군의 수법은 거의 마찬가지다.

마을 사람들을 집합시켜놓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무차별 사격과 수류탄으로 학살한 후 마을을 불사른 악귀와 같은 만행이다. 

이러한 만행에 대해 한국에서는 일찍이 강정구·한홍구 교수가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고 자기들의 피해성만을 볼 것이 아니라, 가해성도 봐야 한다”며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일으켰다. 요즘은 ‘한국·베트남평화재단’을 중심으로 국가배상 청구 소송도 제기되어 있으며, 관심이 고조되어 있다. 물론 미국의 압력이 있었다 하더라도 한국 정부의 책임은 추궁되어야 마땅하며, 인도주의니 정의의 심판이니 하는 일반적인 접근만으로 미흡하다고 생각한다. 한국군 만행의 현장을 보고 증언을 들으면서 바로 제주 4·3사건이나 거창 학살사건, 백선엽군이 지리산 일대에서 벌인 잔인무도한 ‘토벌’작전이 떠올랐다. 거기서 작전을 지휘한 장성들은 일제의 군사교육을 받고 만주에서 전략마을을 만들어 항일운동을 소탕한 ‘간도특설대’나 관동군 또는 만주군 출신자들이다. 베트남 인민들이 당한 천인공노할 학살 만행은 만주에서, 제주에서, 지리산에서 우리 민중들이 이미 당해온 고난인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이른바 ‘친일파’가 아직도 생생하게 이 사회의 중심부를 장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박정희와 학살 군사지휘관들의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속의 일제 잔재 청산을 완수해야만 베트남인 학살사건에 대한 진정한 과거 청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과거 청산에 가장 부정적인 우익들은 한국군의 베트남 인민 학살사건에 매우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한국인에게 “너희들이 한 짓은 뭐야?”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 만행은 일찍이 아시아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일이고, 일본군의 전통을 이어 받은 한국군의 폭력적인 군사훈련에 의해 단련된 일본군의 분신들이 저지른 악행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2211026001&code=990100#csidx0a337372cdeb128af2c548e277810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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