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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의 시 '승무', 최승희 춤 때문이었어?

韓國歷史와 人物

by 석천선생 2012. 12. 8.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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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의 시 '승무', 최승희 춤 때문이었어?

오마이뉴스 | 2012.12.07 11:24

[오마이뉴스 박도 기자]



'최승희 평전' 표지

ⓒ 눈빛출판사

내가 '최승희'라는 무용가의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것은 고교시절인 1963년 어느 늦가을로 짐작이 된다. 그때 학교 문예반에서 시인 조지훈 선생과 소설가 오영수 선생을 초빙한 특강이 있었다.
그때 훤칠한 체구의 조지훈 선생은 반코트 차림으로 굵은 테 안경을 쓰셨는데, '시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당신의 수작 < 승무(僧舞) > 의 시작 과정을 말씀해 주셨다.

선생은 이 '승무'라는 시를 잉태하기까지 세 가지 승무를 사랑한 바, 첫 번은 한성준의 춤, 두 번째는 최승희의 춤, 세 번째는 이름 모를 승려의 춤이라고 하여 당신의 시작 모티브에 '최승희'라는 무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 조지훈 '승무'에서

그런 탓인지 조지훈 '승무'에는 한 무희의 단아한 승무가 담겨져 있다. 그때 받은 인상 탓인지, 나는 조지훈 선생이 계신 대학에 진학하여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지금도 승무를 떠올리면 그때가 떠오른다.



최승희의 '장검무'(1942)

ⓒ 눈빛출판사

한 가련한 예술가의 초상

이 겨울, 함박눈이 펑펑 쏟아진 날에 나는 < 최승희의 평전 > 을 읽으며 아름다움과 행복한 감동 속에 빠졌다. '한류 제1호 무용가 최승희의 삶과 꿈'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는 한 예술가, 그것도 망국민으로서, 분단 민족으로서 그 시대를 피해 갈 수 없었던 한 가련한 초상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나는 책장을 넘기며 때로는 환희를, 탄식을 쏟으며 오랜만에 긴 겨울밤을 독서삼매경에 빠졌다.

사람들은 그녀를 쉽게 평가한다. 친일파다! 월북자다! 공산주의자다! 해방 전의 일본인도 그녀를 평가했다. 불령선인이다! 반일자다! 친미파다!

모르겠다, 나는 그런 식의 평가는 내리고 싶지 않다. 그건 나라를 잃고 남북으로 갈리고, 전쟁을 겪은 세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그 아픔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아름다움이다. 기법이 무엇이든 형식이 무엇이든 사상이 무엇이든 아름다움이 있어야 예술인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에는 좌우가 없다. - 강준식 지음 < 최승희 평전 > 5~6쪽

저자의 서문에서 최승희의 삶이 평탄치 않음을 직감할 수 있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랐던, 그리고 살았던 서울 종로구 내수동, 체부동, 팔판동, 가회동은 모두가 나에게도 인연이 있는 정겨운 서울 북촌이요, 그녀가 다녔던 숙명학교는 나의 고교시절 담 하나 사이의 이웃학교로 선망했던 숙명학교가 아닌가. 그런 탓인지 책을 읽는 내내 마치 나의 고모나 이모의 이야기처럼 읽혀졌다.

불령선인



최승희의 보살춤(1934)

ⓒ 눈빛출판사

망국민의 설움과 비애는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헤아릴 수 없다.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石井漠) 문하생으로 도쿄에서 무용수업을 할 때였다.
다이쇼(大正) 천황 운구 행렬 때 모든 도쿄 시민들이 엎드려 숨을 죽이는 순간, "최승희는 왠지 등을 돌린 채 우뚝 서 있었다"고 할 만큼 그녀는 '불령선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기 예술을 꽃피우기 위해 친일파를 감수해야했고, 남편을 찾아 북으로 갔기에 월북자가 되고, 그 사회에서 숨 쉬고 살아야했기에 공산주의 예술가로 낙인이 찍힐 수밖에 없었다.

최승희의 첫 귀국공연이 경성공회당에서 열렸다.

이윽고 시간이 되자 바라 소리가 울려 퍼지고 불이 꺼졌다.

얼마나 장엄하고 마음이 조이는 순간이랴. 고향에 돌아온 최승희 양과 그의 춤 동무 이시이 에이코 양이 공연하는 '금붕어' 라는 춤이 시작되었다.

최승희는 참으로 고운 소녀였다. 그 정돈된 육체며 옥같이 흰 살결, 빛나는 동공, 전신에 어울리는 팔과 다리,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무용가로서 체격에 부족한 점이 없다는 은사 이시이 씨의 말처럼 그의 자태가 무대에 나타나자 장내가 무너질 듯 우레 같은 박수가 일어났다.

- 매일신보 1927. 10. 27.

나는 절대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왜 그러냐고요. 돈 많은 사람과의 결혼은 항상 도박적이거나 정략적인 결혼이 되기 쉬우니까요. 나는 생활만을 위한 노예결혼은 하기 싫어요. - 강준식 지음 < 최승희 평전 > 85쪽

그녀가 남편으로 택한 안막은 제2고보(경복고)를 다니다 5학년 때 학생집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로 퇴학처분을 당했다. 그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공부하고 카프에서 활동한 작가였다.



최승희의 조선 전통 춤 '에헤라 노아라' (1933)

ⓒ 눈빛출판사

시대의 꿈과 이상을 창조하다

최승희가 서양무용의 동작원리에다 조선적인 정서를 넣은 자기 식의 춤으로 만든 '에헤야 노아라'는 조선 춤의 한 형태로 신선한 경지를 개척했다. 남장여인의 이 춤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일본 신문들은 "무서운 신인 출현"이라는 제목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최승희를 신진여류무용가 가운데 제일로 꼽았다.

최승희의 유럽공연 순회공연 중 벨기에의 한 신문은 "그녀의 춤을 보고 있으면 주술적인 몸짓으로 눈에 안 보이는 공중의 요정을 환기하여 그녀의 주위에 미묘한 마술이 떠도는 것 같다. 그녀의 성공은 최고의 것이었고, 세계적인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라고 격찬했다.

최승희의 파리 공연에서 그녀의 춤에 반한 피카소는 객석에서 연필로 스케치한 모습을 공연이 끝난 뒤 선물하면서 "진정한 예술가는 시대의 꿈과 이상을 창조적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당신이 바로 그런 예술가요"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남편 안막은 아내 최승희에게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말없이 최승희 앞으로 밀었다.

구라파 한복판에서

조선이 움직이고 있다

석굴암의 벽조(壁彫)

마음의 장벽을 뚫고 비끼운다

백조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불빛 속에 고요히 움직여 나온다

…………

조선 춤의 부활


숙명여고보시절의 최승희(1925)

ⓒ 눈빛출판사

살아 있다면 최승희는 금년 101세다. 그러나 검은 뒷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흰 저고리를 입고 있는 1925년의 그녀는 사진 속에서 나이를 먹지 않는다.

단아함과 기품이 엿보이는 소녀의 해맑은 얼굴이 저자인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인생의 시작이다.

이후 일본 → 조선 → 중국 → 구미 → 남한 → 북한의 변화무상한 환경에서 한 평생 310편의 이상의 작품을 창작하고, 2천5백 회 이상을 공연하며 살았던 그녀의 궤적을 따라가 보니 너무도 치열한 삶이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삶은 누구에게도 치열하다.

문제는 그 삶을 이끄는 주체가 무엇이었느냐 하는 점이다. 꿈이 이끌 때 그 삶은 아름다워지는 것이고, 꿈이 없을 때 그 삶은 구차해지는 것이다.

그녀의 삶을 이끈 꿈은 조선 춤의 부활이었다.

- 강준식 지음 < 최승희 평전 > 424쪽

지난 시대 예술가들의 삶은 아름답다. 그 시대가 어렵고, 아픈 세월이었기에 더 아름다운지도 모르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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