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움직임에 재계와 방위산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35년간 국산 항공기 개발에 매진해온 베테랑 엔지니어인 류광수 전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부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류 전 부사장은 국산 초음속 전투기 KF-21 계약, 개발, 시험 등에 깊숙이 관여한 ‘산증인’이자 ‘KAI맨’이었다.
그런 그가 최근 한화에어로스페이스 고위 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난해 9월 강구영 사장 취임 직후 해임된 지 3개월여 만이다.
한화 측에서는 “단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지난해부터 끊이지 않는 한화의 KAI 인수설과 맞물리면서 류 전 부사장의 행보는 KAI 민영화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국내 주요 대기업과 국내외 방위산업체의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직원들이 전투기에 탑재될 엔진을 점검하고 있다. 한화 제공
한화는 지난해 초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관련해 “관심없다”는 입장을 밝힌 지 수개월만에 인수를 발표한 전례가 있다. KAI 본사가 있는 경남 사천과 진주 일대에서 ‘한화 인수설’이 널리 퍼진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평가다.
현재 한화를 포함, 국내 대기업집단 순위 15위권에 이름을 올린 기업이 거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심항공교통(UAM)과 방산수출 효과를 노렸다는 해석이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2021년 서울 에어쇼에서 공개했던 UAM 형상. KAI 제공
책 ‘출퇴근의 역사’에서 저자인 이언 게이틀리는 “19세기 산업혁명과 철도 발달로 일터와 집이 분리돼 ‘통근’이라는 현상이 탄생했고, 도시 주변에 교외가 발전했다”며 “자가용, 지하철, 자전거 등의 교통수단과 점심식사 같은 새로운 의식주 문화 등장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도시화와 인구 증가로 인한 대중교통 과밀, 도로 정체라는 부작용도 초래했다.
정부의 인프라 투자에도 도심 주행속도는 30㎞에 그칠 정도다. 도로에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한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분출하며 타인과 갈등을 빚었고, 직장과 인접한 곳에 거주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이는 도시 과밀화와 환경 오염 등의 문제를 초래했다.
도시에서 수직이착륙하는 개인용 비행체로 이동하는 공중 교통 체계인 UAM은 이같은 문제를 해소할 도구로 평가된다.
활주로가 필요 없고, 최소한의 수직이착륙 공간만 있으면 운용이 가능하다. 전기를 사용해 탄소 배출이 없고, 저소음으로 도심에서 운항할 수 있다.
한화가 지난해 7월 영국 판버러 에어쇼에서 전시했던 UAM. 한화 제공
UAM으로 ‘교통지옥’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지금보다 도심에서 더 먼 곳에서 살면서도 더 빠르게 출퇴근할 수 있다. 도시 과밀화는 완화되고 환경, 부동산 등의 문제도 개선된다.
소재, 배터리, 모터, 전자제어칩과 빅데이터, 인공지능(AI), 5G 등의 첨단 분야와 더불어 건설(인프라 구축), 금융(보험), 보안 등의 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이는 새로운 경제·문화·기술적 기회를 국민과 기업에 제공한다.
확보된 기술을 군사 분야에도 적용, 4차 산업혁명에 의한 과학기술군대 건설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파급력이 국가 전반에 미치는 UAM에서 주도권을 얻으려면 기술적, 상업적으로 먼저 인증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이슈를 선도하고 관련 기준과 표준 마련을 주도, 막대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
해외에선 보잉·에어버스 등 항공기 제작사와 GM을 비롯한 자동차업체, 승차 공유 서비스업체인 우버와 신생 스타트업에 이르기까지 200여개 기업이 UAM 개발에 나선 이유다.
정부도 2025년 상용화를 목표로 내년 8월 실증 비행을 시작하고, 드론과 로봇을 활용한 공동주택 물류배송도 내년 말 실증에 들어간다고 밝힌 바 있다.
국내에서는 한화시스템과 현대차그룹이 적극적이다. 하지만 선진국 대비 항공기술 부족으로 단기간 내 국산 UAM 상용화는 쉽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장기간에 걸쳐 막대한 투자가 요구되는 UAM에서 성공하려면, 규모의 경제 확보 및 효율적 기술 개발이 필수다. 그렇지 않으면 기술과 자본의 한계로 시장에서 도태된다.
KAI 인수는 두 가지를 한 번에 해결할 방법으로 거론된다. KAI는 무인기를 포함한 항공기를 국내에서 가장 많이 개발·생산했다. 유·무인기 기술이 충분히 있다면 UAM 개발도 한층 쉬워진다.
경남 사천 KAI 공장에서 FA-50 전투기가 조립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F-16은 제작사 록히드마틴의 사정으로 신규 기체 구매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
중고 물량은 부족한 실정이고, F-35A는 일부 국가만 구매할 수 있다. 때문에 해외 전투기 시장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 전까지 큰 관심을 받지 못하던 FA-50의 가치가 올라간 상태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업계에서는 자주포나 군함과 달리 전투기는 수출 ‘대박’이 터지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폴란드 계약으로 ‘항공도 돈이 된다’는 인식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한화가 KAI 인수하면…업계 지각변동 가능성
한화는 류 전 부사장 영입으로 KAI 인수 의사를 간접적으로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22년 기준 대기업순위 7위인 한화는 UAM 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레이더와 엔진을 비롯한 KF-21 탑재 장비와 국산 로켓 누리호의 엔진 등도 생산한다. 반면 항공기 체계개발 및 생산 경험은 없다.
KAI가 만든 수리온 헬기 조종훈련체계. KAI 제공
자본력과 탑재 장비에 강점이 있는 한화와 체계통합 경험이 풍부한 KAI의 결합은 한화가 지향하는 ‘한국판 록히드마틴’을 완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평가다.
록히드마틴은 주요 전자장비와 유도무기부터 전투기, 로켓, 군함까지 제작하는 세계 1위 종합 방산업체다.
이를 통해 KAI는 독자 연구개발 능력을 대폭 확충할 수 있다. 현재 KAI로서는 독자적인 대규모 기술개발 투자가 어렵다. 하지만 한화의 자본력이 뒷받침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업체 차원에서 신기술과 신제품을 선도적으로 개발하면, 한국군은 필요한 무기를 빠르게 인수할 수 있다. 수출용으로 개발돼 세계 잠수함 시장을 석권했던 독일 209급처럼 업체 차원의 수출용 항공무기를 제작, 판매도 가능하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만드는 KF-21 탑재 F414 엔진 모형이 2021년 서울 에어쇼 전시장에서 전시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한화가 KAI를 인수하면, 한화의 투자를 통해 특수임무기 시장 진출을 꾀할 수 있다.
해당 시장에서 수요가 높은 분야는 해경용 초계기다. 세계적으로 밀수 및 밀입국 단속과 재난구호 등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해경 초계기 시장이 확대되고 있다.
비즈니스 제트기나 수송기에 레이더와 적외선 및 광학장비를 결합하는 모양새라 기술적 난도도 낮다.
해경용 초계기에 미사일과 어뢰, 섬광탄, 음파탐지기 등을 추가 탑재하면 해군 초계기로 바뀐다. 해군이 차기 해상초계기 도입을 장기소요로 설정한 상황에서 해군 요구에 부합하는 기종을 국내 기술로 빠르게 제작할 수 있다.
그룹 차원의 지원이 더해지면, 군용 완제기가 없는 이스라엘 IAI이나 캐나다 봄바디어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
지난해 7월 19일 경남 사천공항 활주로를 이륙한 국산 초음속 전투기 KF-21이 시험비행을 무사히 마치고 귀환하고 있다.
수출이 성공하려면 든든한 자본력과 높은 수준의 마케팅이 필요하다. 하지만 KF-21과 관련해 KAI(체계개발)와 한화(장비납품)의 현 구도로는 한계가 있다. KF-21 시험비행이 거듭되고 있지만, 해외에서는 뚜렷한 구매 움직임이 없는 실정이다.
2030년대 6세대 전투기가 등장하기 전 단계에서 KF-21이 세계 시장에 진출하려면 KF-21 개발 및 전력화 일정을 최대한 앞당겨야 한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쉽지 않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한화의 자본과 영업능력이 결합한다면, 이같은 국면이 바뀔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수출 대상국 요구사항에 맞게 업체 차원의 투자를 통해 KF-21을 개조할 수 있고, 이는 국내용 KF-21 개발 및 전력화 시기를 앞당기는데 도움이 된다.
지난해 열린 대한민국방위산업전에서 한화시스템 부스에 다기능레이더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와 관련해 한화 측은 정부의 KAI에 대한 지배력을 어느 정도 유지한 채 인수해 독과점 논란을 피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KAI의 ‘주인찾기’는 지난해 폴란드 수출로 ‘잭팟’을 터뜨린 국내 방산업체의 지각변동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대한항공이나 LIG 넥스원 등을 압도할 규모와 기술을 갖춘 대형 업체의 등장은 민수와 군수 분야에서 상당한 파장을 낳을 수 있다.
“사람 하나 이직했다고 인수합병이 되겠느냐” “KAI 민영화는 과거 정부에서도 실패했다”는 회의적 시각도 있다.
그래도 업계의 관심이 작지 않은 것은 현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의지가 강하고, 실현됐을 경우 그 파급력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한화와 KAI의 올해 행보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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