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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Q, 天皇제를 폐지하고 共和헌법을 만들다

日本의 歷史와 思想

by 석천선생 2020. 7. 8.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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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GHQ, 천황제를 폐지하고 공화헌법을 만들다

2019.11.03 08:28:25

 

고사령부와 일본 정부



천황제의 폐지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은 1945년 10월 맥아더 GHQ 사령관과 시데하라 총리의 회견 중이었다. 맥아더는 현행 대일본제국 헌법의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하며 민주주의를 전면 수용한 신헌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당시 천황 히로히토는 전범 혐의로 다른 군부 인사들과 함께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 중이었으며, 궁성에 남은 황실 가족들도 GHQ 관할 아래에 철저히 감시를 받고 있었다.





시데하라 총리는 헌법 개정에 대하여 맥아더와 토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맥아더의 말에서 한순간 '역린'을 듣게 되었다.




''알다시피, 우리 본국을 비롯한 승전국 진영에서 귀 국가의 군주제 폐지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소. 따라서 차기 헌법을 제정할 시, 전범 청산 및 정치 개혁의 일환으로 천황과 황실 제도를 우선 철폐시킬 계획이오.''




시데하라는 순간 가슴이 일렁거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속으로부터 떨려오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국체 존속 포기라면 절대 곤란합니다, 사령관님. 이 나라의 단결 중심이자 정체성 그 자체인 천황을 없애버린다면, 임금을 빼앗긴 국민들의 분노와 반항이 높게 솟구쳐 하늘까지 치닫을 지도 모릅니다. 사령관님께서도 1억 민중의 총옥쇄가 열도에서 실현되는 것을 원하진 않으시잖습니까?''





''그건 걱정 마시오, 총리의 말씀대로 1억 총옥쇄가 진짜 실현되었다면 이미 천황을 체포했을 시점에 들고 일어났어야 했을 테니까. 그렇지만 현실은 다들 평화롭지 않소? 게다가 일본인들은 요즘 본인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던데 말이지. 특히 여성들에게는 아이를 낳아주겠다는 편지도 많이 받는다오, 하하하 ''




총리의 항변에 맥아더는 마치 별 것도 아닌 얘기를 들었다는 듯이 털털 웃음을 터트리며 썰렁한 농담으로 되받아쳤다. 그것으로 논쟁은 마무리 되었다.



(사실 맥아더의 농담은 지극히 '사실'이였다. 일본 시민들은 히로히토 천황의 압송에 아무 동요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히로히토의 체포를 명령한 맥아더를 새로운 천황으로 모시며 지극정성으로 받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민들의 입장에선 단순히 최고존엄이 서양 코쟁이로 바뀐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






그래도 일본 정부는 포기하지 않고 몇 번이나 사령부에 찾아가 '헌법을 완전 갈아엎어도 좋으니 국체만은 제발 보존해 달라' 라며 부탁하였다. 하지만 그럴 수록 GHQ에서는 천황제 폐지의 원칙은 결코 바꿀 수 없다며 강경한 태도를 고수할 뿐이었다.




여러 번의 헛발길질 끝에 결국 정부는 국체 존속, 즉 천황제를 유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12월, 시데하라 총리는 각의를 통해 GHQ의 방침을 따르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헌법​ 제정​

 

​ ​

 

한편 일본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소련을 위시한 공산 체제의 등장으로 극히 혼란에 치달아 가고 있는 중이었다.

 

중국대륙에서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과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이 부딪혀 국공내전이 시작되고, 북쪽은 소련군이 빠르게 남하하여 한반도 북부를 점거, 일본 열도까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이 상황을 누구보다도었던 GHQ는 공산 세력이 일본에까지 마수를 뻗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정치 체제 개혁을 완료하여 일본 사회의 조기 안정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천황제 폐지에 일본 정부의 사전 동의를 얻어낸 사령부는 1946년 1월, 총리 신년 선언을 통해 공화정 수립을 골자로 하는 개헌을 공식 발표하였다.(물론 연설을 듣고 옥쇄를 일으킨 국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본격적으로 신헌법 제정에 시동을 걸었다.





맥아더는 생각이 낡고 고리타분한 일본 관료들에게 을 맡기고 싶진 않았다. 비록 헌법 개정에는 동의했다지만 나중에 그들이 어떤 식으로 뒷통수를 칠 지 모를 일이었다. 아마 관료들은 구시대적인 천황제에 대한 미련을 못 떨친 채 무슨 수를 서라도 천황과 황실을 존속시키려 안간힘을 쓸 것이다.



그러나 GHQ가 대놓고 개입해서 신헌법 작업을 주도하자니 미국이 일방적으로 자기들만의 제도를 강요했다며, 극동위원회, 특히 소련의 비난을 거세게 받을 것 같았다.




한참 고민을 하던 맥아더는 신박한 묘안을 떠올렸다. 그는 민정국장 휘트니를 불렀다.



''실무는 우리가 다 처리하고, 정부 관료들에게는 형식적인 절차만 맡아 달라고 합시다. 민정국에서 헌법 초안 작성부터 최종 안 완성까지 전부 담당하고 일본 정부는 완성된 개헌안을 넘겨받아 국회에 제출만 하면 되잖소?''





휘트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맥아더는 다음 날, 그에게 참모를 모아 새 헌법의 초안을 만들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곧장 장교 16명, 민간인 8명으로 구성된 24명의 워킹그룹이 활동에 돌입했다. 맥아더는 휘트니에게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1. 천황제는 청산하며, 새 헌법의 국가 체제는 오직 공화제만이 허용된다. 나라의 주권을 가지고 있는 주체는 국민이며, 그들을 대표하는 의회와 정부가 일본을 이끌어 나​갈 것이다. 세부 정치 제도에 관해서는 ​운영위원회에서 ​ 민간학자 측과 상의하여 결정한다.



2. 국가주권 행위로서의 전쟁은 폐지된다. 분쟁해결, 심지어는 안전 보장을 위해서도 전쟁은 일본의 도구가 될 수 없음을 천명해야 한다. 일본은 스스로의 방위와 보호를 위해 오늘날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좀 더 숭고한 이상에 몸을 맡겨야 한다. 일본에서는 그 어떤 형태의 육군, 해군, 공군의 존재도 인정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형태의 교전권도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3. 일본의 봉건제는 중단될 것이다. 그 어떤 이도 지금 앞으로는 황족이나 귀족이 될 수 없다. 지금의 황족/귀족은 특권을 박탈당하고 일반 국민​ 과의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 ​




이 세 가지 원칙에 따라 헌법 초안 작성을 목적으로 민정국에 입법권, 행정권 등의 분야별로 조문 기초를 담당하는 8개의 위원회와 전체의 감독과 조정을 담당하는 운영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기초 작업은 극비리에 이루어졌다.




휘트니 국장과 워킹그룹 중 헌법학을 전공한 사람은 전무하였기 때문에, 젊은 학자들로 구성된 일본의 민간 단체에게 주로 조력을 구하였다. 미국 독립선언, 프랑스의 인권선언,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 국제연합 헌장 등 외국의 법률도 초안 작성에 많이 참고되었다.




8개 위원회의 시안은 삼 개월의 기간을 거쳐 각각 차례로 만들어졌다. 이들 시안을 바탕으로 운영위원회가 총괄 작업하여 원안이 작성되고, 이후 여러 차례 수정의 손길이 가해졌다. 그리하여 6월, GHQ에 의해 일명 '맥아더 초안'이 완성되었다.






신헌법의 공포, 그리고 일본국 건립​




맥아더 초안은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히 입각하여 만들어진 아주 뛰어난 법안이었다. 종전의 파시즘적 천황 제도를 철폐하고 민주공화정 체제를 들여왔으며, 구체적으로 '인민주권’, '기본적 인권의 존중', ‘출생, 지위, 성별, 인종, 국적에 의한 차별금지’, ‘황족/귀족제 폐지’, ‘노동자 권익의 광범위한 보장’ 등을 명시하였다.

 

어찌 보면 메이지 시절 자유 민권운동을 펼친 사상 개혁가들의 꿈이 70여 년만에 이루어진 셈이었다.




정치 체제는 민정국과 일본의 학자들이 깊이 논의를 나눈 끝에 의원내각제의 요소를 기반으로 하는 대통령중심제, 즉 국회에서 대통령이 선출되어 정부를 구성하는 '의회 대통령제'를 채택했으며, 국회는 신분제의 잔재인 귀족원을 폐지하고 남은 중의원을 단원제로 재편하였다.






한편 맥아더 초안을 GHQ로부터 제시받은 일본 정부는 이를 법문화하여 7월, '일본공화국 헌법안'을 국민에 정식 공표하였다. 형식적으로는 일본 정부가 주체가 되어 제정한 헌법이었기에 극동위원회 등지에서 태클을 걸 구실도 없었다.




직후 추밀원으로 넘어간 일본공화국 헌법안은 9월 심사에서 통과하여 다시 중의원으로 넘어갔다. 중의원은 신국가의 명칭을 '일본국'으로 확정하고, 국무장관의 국회의원 겸임을 의무화시키는 등 헌법안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11월 의원투표로 통과시켰다.



(당시 군부파 갈등/대립을 가지중의원 의원GHQ가 전범 청산을 명으로 전원 공직에서 추방시켜 버렸으며, 이에 남은 의원들은 새 헌법 제정에 대체로 동의하는 입장을 표하였다. )




이어서 귀족원에서 일본국 헌법안을 받아 2개월 동안 심사한 후 1947년 1월 투표로 통과시켜 국회의 의결이 최종 완료되었다.



5월, 시데하라 총리는 '일본국 헌법'을 공포하였다.




​오늘, 일본국 헌법을 공포하였습니다. 이 헌법은 민주 공화국 건설을 목표하고자 제정한 것으로, 국가 건립의 기초를 인류 보편의 원리에 따라 자유롭게 표명된 국민의 총의에 의해 확정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일본은 스스로 전쟁을 포기하고 전 세계에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영원한 평화가 실현되기를 염원하며, 항상 기본적 인권을 존중하고 민주주의에 기초해 국정을 운영해 나갈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공화국 건설이라는 대목적을 달성하고 이 헌법이 이상(理想)으로 하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국민을 받들 절대적인 노력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정부는 진정으로 국민 여러분과 일체가 되어 이러한 대목적 달성에 매진하겠다는 각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긴 시간 동안 수고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명하 제 소회를 마치고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 5월 3일, 국회에서 시데하라 기주로 총리의 기념 연설​




 

총리 연설을 한 지 며칠 후, 단원제 국회 선거가 실시되었, 외무상 출신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자유당'이 과반석을 차지, 압승하였다. 그리고 당대표 요시다 시게루는 국회 간선 대선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7월, 요시다 대통령이 취임식 겸 건국기념식에서 공화정 일본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일본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이 건국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GHQ가 신헌법 제정 방침을 세운 지 약 1년 9개월 만이었다.







​그 후 이야기​




GHQ의 천황제 폐지 및 신헌법 제정 계획은 당초보다 시간이 훨씬 소요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성공으로 끝났다.



일본국의 초대 대통령 요시다 시게루는 외무상 시절 맥아더와의 친분으로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수월히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친미 정책을 집행하며 GHQ의 지시를 성실히 따랐다.




히로히토 천황은 극동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되어 스가모 교도소에서 무기징역수로 복역을 시작하였다. 황족들은 공화국 건국 직후 일반인으로 격하되었으며, 그들의 황실 재산은 전부 몰수되어 국가로 귀속되었다. 황실 직계 가족도 소급의 보상금만 지급받은 채 궁성에서 강제로 퇴거 조치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천황제에 대한 일각의 미련과 집착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황실 제도 폐지에 처음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한 곳은 다름 아닌 군부 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정부의 신헌법 제정 선언에 자극을 받아 비밀리에 무장 단체를 조직하였다.

​1950년, GHQ 본부와 구 궁성, 그리고 옛 내각총리대신 관저를 개수한 대통령 집무실에서 군부 단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기습 무력 투쟁을 벌였다.

 

투쟁은 금방 연합군에 진압되었고 조직 인사들은 강력한 처벌을 받았으나, 이 사건을 기점으로 천황 폐위 강행에 대한 강경 보수파들의 반발의식이 표면에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게 되었다.




한편 집권 정당인 자유당에서는 기시 노부스케 등을 중심으로 천황 사면을 요구하는 계파가 형성되었다. 대다수는 GHQ에 의해 공직 추방을 당했다가 미일조약 체결 이후 복귀한 강경 우파 정치인들이었다. 이들은 요시다 계파와 똑같이 친미를 내세웠지만 정책적으로는 군대 재보유, 자주 국권회복, (신토 제사장직으로서) 천황 부활 등을 내세우며 은근히 미국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1955년, 요시다를 이어 기시 노부스케가 후임 대통령에 취임했다. 정권의 후광을 받아 강경 보수파들이 적극적으로 히로히토 사면 운동, 또는 나아가 천황제 복구 운동(물론 명분은 신토 총괄 제사장직 신설이었다) 을 벌였다.




기시 대통령은 안보 투쟁 사건으로 인해 재선에 실패, 퇴임하고 동시에 강경파의 입지도 자유당 내에서 크게 줄어들었지만 속칭 '황당파'라 불리는 이들의 활동은 사회계로 영역을 옮겨 오히려 세력을 넓혀 나갔다.




천황 석방을 요구하는 정치인들은 거대 우익 단체를 조직하였으며 (이 단체는 훗날 '일본회의'의 전신이 되었다) 일부는 히로히토와의 면회를 위해 주기적으로 스가모 교도소에 찾아갔다.

 

민간에서는 미시마 유키오라는 사람이 천황제 부활을 성토하며 자위대에게 쿠데타를 설득하다 할복한 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대학은 황당파 학생들이 좌파 대학생 연합 '전공투' 세력과 틈만 나면 시비가 붙어 서로 치고 받는 일이 일상이었다.





그러다 1973년, 히로히토 천황이 72세의 일기로 옥사하자, 황당파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떤 이는 비통한 마음으로 육체를 던져 천황을 뒤따라갔고, 어떤 이는 공화국 정부에 대해 반란을 기획하였다. 어떤 이는 히로히토의 직계 가족을 찾아가 후대 천황에 즉위해 달라며 간청하였다(물론 거절당했지만)

그러나 대부분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공화정을 인정하는 쪽으로 전향하였다. 이미 공화제에 익숙해진 다수 국민에게 황당파는 그저 '구시대적 시스템에만 집착하는 꼰대 늙은이 집단' 정도로 인식되어 매우 경멸될 뿐이었다.



결국 단순간에 몰락한 황당파는 천황 히로히토와 함께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흘러 21세기, 일본인들은 공화제에 완전히 적응하였다.

​그들 중 천황제 부활론(황실복고)을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나마 있어도 극우에게조차 꼴통 취급을 받고 배척당할 뿐이다.

현재 일본의 일상 속에서 남아있는 천황의 흔적이라면, 극소수의 우익 단체들이 기원절이나 히로히토의 탄생일에 황실 문양 깃발을 걸고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행진하는 것 정도다.



GHQ가 일본에 세운 헌법의 민주주의 공화국 질서는 오늘날에도 별 탈 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










 

@ 글자 크기가 둘쑥날쑥해서 수정하고 새로 재업함



@ 현실성을 고려하여 GHQ가 처음부터 헌법 개정을 주도하는 시나리오로 바꿈



@ 헌법 개정 과정과 에필로그 분량을 늘려서 적은 건, 그냥 이야기가 실감나라고.. (노잼이면 죄송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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