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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어라,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新소재,新 과학

by 석천선생 2019. 3. 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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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돈규 기자 입력 2019.03.02. 03      

폴더블 폰 시대 접기 문화의 역사

뭔가를 펴고 접는 행동은 본능에 가깝다. 아기가 걸음마를 익히려면 다리를 곧게 펴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3300년 전 고대 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접이식 의자가 발굴됐다. 접는 우산은 고대 중국에서, 접는 부채는 6~9세기 일본에서 발명됐다고 한다. '접이식 문화'는 문명을 지탱해 온 기둥이다. 무엇보다 책의 역사가 증명한다.

'폴더블(foldable·접히는) 폰' 시대가 열렸다. 삼성전자가 지난 20일 '갤럭시 폴드(Galaxy Fold)'를 공개했다. 접으면 4.6인치, 펼치면 7.3인치. 화면과 자판이 분리된 피처폰과는 차원이 다르다. 디스플레이 자체가 접힌다. 1550만명이 본 코미디 영화 '극한직업'의 대사를 빌리자면 이렇다.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스마트폰인가 태블릿PC인가?"

접히는 탁자나 자전거가 그렇듯이 그동안 접는다는 것은 보관 또는 이동을 의미했다.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제 폴더블 폰이 그 문법을 깼다. 접힌 채로도 쓸 수 있으니까. 디스플레이가 종이처럼 접히고 다시 180도로 펴진다. 우리는 낯설고 흥미로운 세계로 가는 탑승구에 서 있는 셈이다.



삼성전자가 최근 공개한 폴더블 폰 ‘갤럭시 폴드’. 화려한 나비 이미지로 가볍게 접고 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 삼성전자

5G 폴더블 전쟁 시작됐다

'접어야 산다.'

스마트폰 업체들이 요즘 외는 주문(呪文)이다. 오는 4월 출시 예정인 갤럭시 폴드는 접으면 양복 주머니에 들어가고 펼치면 보통 태블릿PC보다 작다. 펼친 화면에서는 게임과 영상을 비롯해 세 앱을 동시에 쓰는 멀티태스킹이 가능하다. 중국 화웨이는 질세라 지난 24일 폴더블 폰 '메이트X'를 급하게 선보였다. 애플도 접는 디스플레이 특허 기술을 새로 등록하며 폴더블 폰 출시를 준비 중이다. '접지 않으면 망한다'는 위기감이 감돈다.

메이트X는 화면을 펼치면 8인치(접으면 6.6인치)로 갤럭시 폴드보다 크다. 안으로 접히는 갤럭시 폴드의 인폴딩 방식과 달리 바깥으로 접는 아웃폴딩 방식을 채택했다. 메이트X의 디스플레이 두께는 펼치면 5.4㎜, 접으면 11㎜. 미국 IT 매체 더버지는 "갤럭시 폴드보다 홀쭉한 라이벌이 등장했다"고 전했다. 갤럭시 폴드는 복합 폴리머(polymer) 소재로 기존 스마트폰 디스플레이보다 50% 얇다고 알려졌을 뿐, 두께 수치를 공개하진 않았다.

스마트폰은 세상에 나온 지 12년 됐다. 대중은 웬만한 신상품엔 시큰둥하다. 근본적 변화에 대한 갈망이 길었고, 폴더블 폰은 앞선 스마트폰들을 멍청하게 만들 잠재력이 있다는 평가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의 장점을 합쳤다는 점에서 과거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미국 CNN은 보도했다.

갤럭시 폴드를 공개할 때 화면에는 나비 이미지가 담겨 있었다. 왜 하필 나비일까. 화려한 색상의 날개를 펴고 접는 모습이 폴더블 폰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나비는 얇고 가볍기도 하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의문을 제기했다. 주머니에 넣기엔 불편하지 않을까? 디스플레이를 구부릴 수 있다면 떨어뜨렸을 때 더 부서지기 쉬운 건 아닐까?

접히는 게 손에 있다면 심심할 때마다 펴고 접기 마련이다. 내구성이 훨씬 더 중요해진 것이다. 크기와 두께, 배터리는 물론 사용자 경험이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김국현 IT 평론가는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는 현재 구글과 애플이 공식적으로 폴더블 폰을 지원하지 않고 있는데, 급하지 않다는 뜻"이라며 "제조사만의 지원으로는 어중간한 체험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비싼 가격도 걸림돌이다. 갤럭시 폴드는 미국 시장 기준으로 약 222만원, 메이트X는 292만원에 이른다.



① 접이식 날개를 가지고 있어 도로 주행과 비행이 모두 가능한 플라잉 카 ‘삼손 스위치 블레이드’. /삼손스카이 ② 세계에서 가장 작게 접히는 자전거 ‘브롬튼’. / 브롬튼 ③ 르꼬끄의 ‘폴더블 롱패딩’은 접으면 이렇게 가방으로 변신한다. / 르꼬끄 ④ 차체를 반으로 접을 수 있어 주차 공간을 덜 쓰는 접이식 전기차 ‘아마딜로T’. / KAIST

폴더블 롱패딩, 접이식 날개 단 차

우리는 접는 데 익숙하다. 옷이나 이부자리는 겹치거나 접어 포갠다. 마음 좀 알아달라며 숱하게 접는 종이학은 기도에 가깝다. 문장을 기억하려고 책 모서리를 접기도 한다. 서양에선 냅킨 접기도 예술의 한 분야다. 탁자나 의자, 병풍이나 다리미판만 접히는 게 아니다. 짐을 쌀 땐 접어야 부피를 줄일 수 있다. 영국 '브롬튼'은 세계에서 가장 작게 접히는 자전거로 불린다. 접이식 교량도, 날개가 접히는 전투기도 나왔다.

접이식 문화를 응용한 혁신은 패션 업계에도 있다. 스포츠 브랜드 르꼬끄는 최근에 '폴더블 롱패딩'을 내놓았다. 입으면 롱패딩, 접으면 가방이다. 벗으면 거추장스러운 롱패딩인데 휴대도 수납도 간편해졌다. 근년 들어 '폴더블 슈즈'도 유행이다. 평소에는 멀쩡한 형태로 신다가 뒤축을 자연스럽게 접어 신을 수도 있다. 맨발을 강조하는 편안한 스타일링이다.

공상과학 영화로만 보던 '플라잉 카(flying car)'도 올해 출시된다. 미국 삼손스카이와 테라퓨지아 등이 선보인 플라잉 카는 도로를 주행할 때는 접이식 날개를 숨겨놓고 비행 모드로 바꾸면 날개를 펼친다. '삼손 스위치블레이드'는 도로에서 최고 시속 201㎞, 4000m 상공에선 시속 322㎞까지 낼 수 있다.

혼다가 판매 중인 소형 SUV(HR-V)는 둘째 줄 시트를 수직으로 접어 새로운 공간을 창조할 수 있다. 짐칸에 넣기 어려운 화분이나 수직형 물건을 싣기 수월하다. 접히는 자동차도 있다. KAIST는 2013년에 차체를 반으로 접어 일반 자동차 1대가 주차할 공간에 3대까지 세울 수 있는 초소형 접이식 전기차 '아마딜로T'를 개발했다.

좀 다른 얘기지만 축구에도 접기 기술이 있다. 드리블을 하고 전진하다가 발 안쪽으로 공을 세우거나 방향 전환을 해서 상대 수비수들을 속이는 동작을 말한다. 영어로는 'inside cut'이라 부른다. 그래야 패스나 슈팅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손흥민이 이 기술로 수비수를 따돌릴 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잘 접네, 잘 접어!"

종이 접기, 공학이 되다

공학에 종이 접기(origami)를 접목하려는 시도는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국제우주정거장(ISS)이나 인공위성에 붙어 있는 태양전지판이 대표적이다. 미국 브리검영 대학교 연구진은 종이 접기 기술로 태양전지판을 곤충 날개처럼 9분의 1로 압축하는 데 성공했다. 지구에서 가져간 2.7m 길이 태양전지판을 우주에서 25m까지 펼칠 수 있는 기술이다.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조규진 교수는 종이 접기를 응용해 접히는 바퀴를 개발했다. 지난해에는 이른바 '가제트 팔'을 만들었다. 압축 길이보다 17.5배로 늘어나고 무게의 400배까지 지탱할 수 있는 로봇 팔을 만들어 드론에 장착한 것이다. 드론이 로봇 팔을 늘어뜨리면 공중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곳까지 촬영할 수 있다. 조 교수는 "자리를 차지하고 일정한 동작을 반복하는 게 과거의 로봇이었다면, 이제는 접어서 들고 다니기 편하고 필요할 때 사용하는 식으로 발전하고 있다"며 "타이어 광고로도 나온 접히는 바퀴나 로봇 팔이나 종이 접기를 로봇 디자인에 접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디스플레이를 서너 번 접을 수 있다면 20인치 이상의 화면도 구현할 수 있다. 책 크기로 접을 수 있는 '돗자리 폰'을 펼치고 누워 있다가 돗자리가 부르르 떨리며 영상 통화를 받는 세상이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김국현 IT 평론가는 "미래에는 벽처럼 모든 면이 정보 공간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는데, 딱딱한 유리보다는 폴더블 벽지가 더 쓸모 있다"며 "마이크로소프트 제품 브랜드 중에 서피스(surface·표면)는 윈도(window) 다음의 정보 공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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