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05.06. 14:29
[주간동아]
“믿어라. 그러나 검증하라.”
1970년대 중반 소련이 동독 등에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SS-20을 배치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위협하자 미국은 서독 등에 퍼싱-2를 배치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그러자 서독에서는 퍼싱-2 배치를 거부하는 강한 반미(反美)운동이 일어났다. 미국 시카고대 핵물리학자회가 ‘운명의 날 시계(Doomsday Clock)’를 만들어 “핵전쟁이 일어나 지구가 멸망하기 3분 전”이라고 발표한 것도 큰 역할을 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미국과 소련이 서로를 직접 겨냥한 무기지만, 사거리가 짧은 IRBM은 동맹국에 전진 배치해놓아야 제때에 사용할 수 있다. IRBM이 많이 배치되면 냉전이 강화된다. 1981년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소련을 ‘범죄와 거짓과 속임수를 일삼는 집단’이라며 ‘악의 제국’으로 규정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소련이 발사한 ICBM을 요격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현 미사일방어(MD)체계에 해당한다. 이는 우주에서 핵미사일끼리 싸우게 하는 것이라 ‘스타워즈’로 불렸다. 1972년 일찌감치 미·소는 요격미사일(ABM) 수를 제한하는 ABM 협정을 맺은 바 있다. 레이건 행정부는 미국의 첨단기술을 토대로 ABM 성능을 개량해 ABM 협정 파기를 검토했다.
이것이 ABM 분야에서 뒤처진 소련을 자극했다. 미국이 펼치는 군비(軍備)경쟁을 따라갈 수 없다고 본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ABM 협정 준수를 주장했다. 이에 레이건 대통령은 냉전 강화를 초래한 IRBM부터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국은 ABM 협정을 유지함으로써 미국이 개량형 ABM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대신, IRBM을 포함해 양국이 가진 모든 중거리핵전력(INF)을 폐기하는 조약을 1987년 맺었다.
한국에 의한 사찰이 빠졌다
이 협상 때 레이건 대통령이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바로 러시아 속담인 “믿어라. 그러나 검증하라”였다. 러시아에 대해 잘 아는 수잔 매시가 “이 속담을 인용하면 대화가 잘될 것”이라고 조언했기 때문이다. INF 조인식에서도 레이건 대통령이 이 말을 하자,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또 그 소리입니까”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이로써 긴장이 해소돼 1988년 서울올림픽은 성공적인 대회가 됐다. INF 조약과 스타워즈 추진은 훗날 냉전 및 소련 붕괴에 결정적 역할을 했기에, 미국은 신형 핵항모 이름을 ‘로널드 레이건함’으로 명명했다.
4·27 판문점선언에 빠진 것이 바로 ‘검증하라’다. 판문점선언은 ‘믿어라’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 선언 이후 KBS에 출연한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남북 사이에 강한 신뢰가 구축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회 위원장은 1월 1일 신년사에서 “미국 본토 전역이 핵타격 사정권에 있다. (중략) 핵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 있다는 것이 위협이 아닌 현실임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고 호언했으니, ‘검증’이 빠진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사찰(=검증)은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할 일이라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고 반론을 펼 수 있다. 그러나 이 반론은 ‘북한이 핵탄두를 이제 막 시험발사한 화성-15형에 실어야만 미국을 공격할 수 있지만, 한국을 상대로는 실전배치된 1000여 기의 스커드와 노동미사일에 탑재하면 된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빈말’이 된다. 미국이 자국에 위협이 되는 것만 사찰해 폐기를 확인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핵 위협에 놓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시 봐야 할 것이 1992년 노태우 정부가 주도해 발효한 한반도 비핵화선언이다. 판문점선언은 달랑 한 개 항에서만 비핵화를 거론했지만, 이 선언은 6개 항을 담고 있다. 4항에서는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를 만들어 상호사찰을 한다’고 규정해놓았다. 그때도 북핵은 미국과 IAEA가 사찰한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노태우 정부는 북핵을 우리도 사찰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판문점선언에선 우리가 주도하는 사찰이 빠져 있다.
지난해 문재인 정부가 적극 추진했던 탈핵정책은 비정부기구(NGO) 출신들이 주도했다. 그와 비슷하게 3차 남북정상회담도 북한과 통해온 NGO들이 큰 역할을 했다. 오래전부터 북한과 연락을 유지해온 이들은 중국 등에서 북한 대표를 만나 판문점선언 합의문에 들어갈 내용과 행사 계획을 논의하고 이를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이끄는 준비위원회로 보내 취합하게 했다. 이에 정부기관은 의전과 경호에 대한 실무회담만 하게 됐는데, 이것이 검증이 빠진 합의문을 만든 한 이유로 보인다.
그러나 3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1등 공신은 NGO가 아니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라는 의견이 훨씬 많다. 북한이 5차 핵실험을 한 후부터 트럼프 정부는 확실하게 북한을 압박했다. 미국은 다른 나라를 상대할 때는 외교(D)뿐 아니라 정보(I), 군사(M), 경제(E) 분야도 활용한다(이를 DIME이라 한다). 경제로 다른 나라를 상대하는 방법이 바로 무역과 환율로 가하는 압박 및 혜택인데, 미국은 한국에도 통상 압박을 가하며 몰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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