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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통일, 불가능했고 불가능하다

교양(특수견의세계)

by 석천선생 2012. 6. 26.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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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통일, 불가능했고 불가능하다”한겨레 | 2012.06.22 21:00

[한겨레]<전쟁과 인민-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성립과 인민의 탄생>

한국전때 북한 주민이 경험한
대량학살과 미군의 폭격 공포
반미 키우고 수령통치 기반돼
그 씨앗은 섣부른 흡수통일론

흡수통일이 과연 가능할까? 한국 보수주류가 집착해온 이 방안은 실은 새로운 게 아니다. 이미 60여년 전에 북한 거의 전 지역을 상대로 실행해 봤다. 그리고 실패로 끝났다. 지금 다시 시도하면 성공할까?

한국전쟁 발발 62년에 맞춰 나온 <전쟁과 인민>은 그런 시도 자체가 왜 무모한지, 문제의 근원을 파고들어 보여준다.

서울 탈환 10여일 만인 1950년 9월30일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 명령을 내린다. 한국군 3사단은 10월1일 38선을 넘었다. 10월4일 유엔 총회는 38선 돌파를 묵인하는 8개국 공동결의안을 의결했고, 그 이틀 전 임병직 외무장관은 유엔에서 남한 정부 주도로 한반도를 통일할 것이라고 연설했다. 미국 육군 참모부가 작성한 북한 군정실시 3단계 구상이 그달 12일 유엔에서 통과됐다.

그렇게 해서 약 두달 동안 북한 대부분 지역(점령지)에서 진행된 흡수통일 시도의 첫번째 장애는 유엔과 이승만 정권 간의 갈등이었다. 미국이나 유엔은 남한 정부가 북 체제를 대체하게 놔둘 의도가 애초 없었다. 10월12일 유엔은 유엔군이 북한 행정책임을 장악하도록 결의했고 미 10군단 민사처 고문관을 중심으로 한 유엔 군정반이 북한 행정을 인수했다.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라던 대한민국 주권은 38선 이남에 국한됐다. 이승만이 개인 자격으로 평양에 가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개월 동안 실제로 북한 지역을 통치한 것은 이승만이 파견한 남쪽 내무부 선무공작대(전국학련)와 국방부 정훈국 학도의용대, 경찰, 군, 서북청년단을 흡수통합한 대한청년단 북한총단부 등 우익 청년조직들이었다. 북쪽 사정에 어두운 미군의 북한 단독 통치는 불가능했다. 선거가 실시될 경우 친미 세력이 이길 수 없다고 봤기 때문에 이승만 체제의 북쪽 지역 확대를 차라리 묵인하고 지원하는 쪽이었다. 1950년 8월18일 미 중앙정보국(CIA) 정보보고는 자유선거가 실시되면 공산주의자들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지 모른다는 분석을 담고 있었다.

최대 장애는 중국군 개입이었다. 주젠룽 일본 도요가쿠인대 교수가 쓴 <마오쩌둥의 조선전쟁>을 보면, 당시 북한을 점령한 유엔군은 13만이었고 대적한 북한군은 4개 사단뿐이었다. 10월 하순 약 30만의 중국군이 북에 들어왔고 이후 3년간 300만 가까운 중국군이 파병됐다. 그들 중 13만3000여명이 전사했다. 건국 1년 만에 국운을 건 대규모 해외파병(마오쩌둥 아들도 전사했다)을 중국은 왜 감행할 수밖에 없었을까? 60여년 지난 지금, 거대한 힘을 축적한 중국이 남한 주도 통일로 그 뒤의 한-중 국경에서 미국과 맞대면하게 될 상황을 좌시하지 않을 이유는 더욱 분명해진다.

또 하나의 장애는 이승만 정권의 준비되지 않은 흡수통일 시도 자체였다. 사실상 점령지 통치세력으로 군림한 우익조직들은 이념, 사적 원한과 보복감에 사로잡힌 '정치적 교정작업'으로 대학살을 자행했다. 그 2개월 사이 북한 주민 15만명이 처형되거나 납치된 걸로 추산한 통계가 있고, 북한의 공식발표로는 17만2000여명이 학살당했다. 이승만은 학살을 묵인·방조했다. 물론 북한 체제에 저항한 수많은 인사들 역시 학살당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북한 지도부는 '반동분자' 처리를 위한 최고위급 특별위원회까지 꾸렸다.

북한 주민들 마음이 남쪽으로 쏠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북한 주민의 대규모 월남 사실을 증거로 들이댄다. 하지만 월남의 주된 이유는 끔찍한 미군 공습과 원자탄 투하에 대한 공포와 강제이주 정책 때문이었다고 이 책에선 썼다.

북한의 인민 형성,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된 애국주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또 하나의 요인은 반미의식이다. 그 원체험은 바로 공포의 미군 공습이었다. 미 극동군 폭격부대 지휘관 오도널은 1951년 미 상원에서 "한반도 전역이 거의 거대한 쓰레기더미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파괴됐다.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증언했다. 그런데도 민간 주택 밀집 지역과 농부들, 피난민들을 가리지 않았던 미군의 북폭은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조인 때까지 쉬지 않았다. 1㎢당 평균 18개의 폭탄이 투하된 북한 전역은 초토화됐다. 폭격으로 북한 민간인 28만2000명이 죽고 그 와중에 실종·납치된 사람이 79만6000명에 이르렀다. 전쟁 기간 죽은 북한 주민은 모두 150만명(당시 북 인구의 15~17%) 정도로 추산됐다. 1950년 11월30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핵무기 사용을 늘 고려하고 있다고 한 발언이 북한 주민 사이에 불러일으킨 공포는 상상을 초월했다.

결국 60여년 전 흡수통일 시도는 북한 주민들의 민심 얻기에 실패했고,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역사적 경험은 분단 극복보다는 오히려 이를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학살의 광기를 겪으면서 남북은 '우리'와 '적'으로 나뉘고, 서로 타자를 설정해 배제하고, 끼리끼리 결속을 다지면서 공동의 정체성을 만들어 갔다. 2개월의 피점령기간 동안 체제위기에 봉착한 북한 지도부는 군중심판 등을 통해 내부 규율을 강화했고 50년대 말까지 수령이 영도하는 전일적인 지배체제를 완성했다. 북한의 인민은 주권자로 존재하기보다는 집단으로 대중화됐다. 인민민주주의 쇠퇴와 정치권력의 1인 집중은 어떤 정치적·시민적 공간도 생성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국가권력과 개인의 긴장관계와 갈등을 중재하는 시민사회의 미형성은 지금 북한체제가 안고 있는 여러 모순의 기원이며, 향후 정치적 균열의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전쟁과 인민>은 북한 주민들이 왜 사회주의 체제를 택하고 반미를 내세우게 됐는지, 그리고 인민이라는 정체성을 왜 기꺼이 받아들이게 됐는지에 대한 전쟁사회학적 탐구다. 그 작업을 북한 주민들을 중심에 놓고 진행했다는 것이 이제까지 나온 한국전쟁·북한 관련 연구서들과는 다른 점이다. 이를 위해 미국이 전쟁 때 노획한 대량의 북한문서 등 1차 사료들을 적극 활용했다.

한승동 기자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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