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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과의대화"

교양(특수견의세계)

by 석천선생 2012. 6. 24.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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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과의 대화](40) 사람이 짐승과 다른 건 죽은 자에 대한 애도고, 예의였지  

 

 

 

 

 

소설가·평론가 김형수=선생님! 운명의 형식에 대해서 생각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 많은 시대, 하 많은 장소 중 하필 그때 그곳에서 삶을 시작했을까, 이런 것들 말입니다.

고은=숙명은 필연이고 운명은 우연이라는 말도 있을 만하네 그려. 내가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 내가 어느 나라 어느 고장에서 태어난 것, 하필 내가 어느 시대에 태어난 것은 필연이지. 그것은 그 무슨 수작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나 이전부터 깊이 개입되어 있는 숙명에 말미암은 바 아닌가. 이 ‘말미암기’가 모든 것의 시작의 씨이고 동기이고 원인 아닌가.

김형수=아무리 떠나도 결코 떠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고은=‘인(因)’이란 어떤 것에 의(依)한다는 뜻이지. 이런 필연으로 태어난 나의 삶의 행방에는 우연이라는 운명의 가변성이 더해지게 되지. 내가 저 고대 한사군 시대에 태어나지 않고 1930년대 초에 태어났다는 것으로 이미 내 숙명은 기정사실로 되었지. 내가 태어난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식민지 한복판 아닌가. 게다가 만주사변, 중일전쟁이 이윽고 미·일의 태평양전쟁으로 발전하는 확대로서의 세계대전 시대를 이름 없는 삶으로 있게 되지 않았던가.

김형수=1933년생은 많습니다. 하지만 옥구가 아니라 군산, 서울보다 큰 곳에서 태어나도 자아 서사의 무대를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부터 설정하는 이는 드물 것입니다.

고은=내 체질에는 대륙이나 대양에의 유전적 몽상이 들어있는지 모르겠네. 그렇다 치고 그런 우연에 던져진 것은 또한 16세기 임진·정유왜란 당시에 내가 살았다면 내 운명이 어떻게 되었겠는가라는 가정으로 위안 받을지 모르지. 정유재란 당시 지리산 및 남원 어느 골짜기에서는 아기 엄마가 왜병을 피해서 달아난 뒤 며칠 동안 굶주린 끝에 정신 이상이 되어 태어난 지 얼마 안되는 젖먹이 아기가 중병아리로 보였어. 그 아기를 솥단지에 넣고 삶아 먹다가 제정신이 돌아온 참극도 있었지. 엄마란 누구인가, 엄마란 제 자식의 목숨을 위해서는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존재 아닌가. 그런 모성의 본능마저 망가지는 정신해체 상태의 극한을 바로 전쟁의 기막힌 곡절이 만들어냈지.

김형수=물론 그때보다 더 험한 시대도 있었을 겁니다. 또한 참혹한 세월에도 존엄을 버리지 않은 삶도 있겠고요.

고은=그 당시 그곳에서 도공들도 잡혀가서 규슈의 심수관(沈壽官) 몇 십 대로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것이네. 그 당시 허균의 피난기록을 본 적이 있는데 지극정성이던 아내를 그때 잃고 말더군. 난세의 품위가 진짜배기 품위이기도 하겠지.

김형수=어미가 자식을 잡아먹던 시대보다 선생님의 시대가 비극성의 크기에서 더 작았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고은=내가 살아남은 6·25를 앞두고 이런 사실들로 위안 받는 것은 수많은 전쟁 체험들에 대해서 퍽이나 요행이 아니었나 싶어서라네. 나는 6·25 생존자니까 말이네. 6·25가 또 하나의 임진왜란과 같은 한반도 유린의 비극이라는 사실은 그 이전의 불안한 해방시기 신생국가로서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어. 38선에서 습관적으로 있게 되는 총소리 촌극이야 으레 그러려니 하는 당연한 갈등현상쯤으로 알아버린 것이지. 북위 36도선의 나는 북위 38도선이 가진 거대한 재앙의 징후를 전혀 알 길이 없었지.

김형수=<문익환 평전>을 쓸 때 일본에서 정경모 선생님을 뵈었는데, 말씀 중에 “우리 세대야 고은 시인을 보면 알지만…”을 여러 번 하셔요. 그때 문득 ‘한 세대가 체험한 격정의 적자일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고은=기이한 것은 그 전란 전 3년이 고향에서 내가 무척이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는 거라네. 가족의 화목도 유난스러웠지. 할아버지의 주란(酒亂)도 없어져서 늘 관대한 표정으로 분가한 세 아들네 집을 오갔고 한 차례의 콜레라 사태와 흉년을 지나면서 우리 집은 의식주가 퍽 풍족해졌어. 내가 가족의 축복 속에 있었던 것은 아마 이때뿐이 아닌가 하네. 아버지는 책 사는 것을 꾸짖은 적이 없어. 우리 집뿐 아니라 시집 간 고모네도 외갓집도 이모네집도 그리고 두 삼촌네나 당숙들의 가세도 다 안락한 상태였어. 외삼촌도 식민지시대 내내 만주로 인도네시아로 떠돌던 삶을 접고 돌아와 있었지. 집이라는 것, 가족·가정이라는 것의 가치 안에 내가 잠겨있었던 그 2~3년의 고향은 지금껏 특이한 기억이네.

김형수=과거를 회고하면서 ‘소속 공동체로서의 집’을 연민하시는 건 처음이 아닐까 합니다.

고은=가족공동체란 국가공동체와 달리 비강제적·비정치적으로 더운 피가 도는 곳이지. <아라비안나이트>에서는 집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어엿한 집 한 채가 뚝딱 눈앞에 지어지지만 집이라는 것은 선사시대의 혈거 이래 아주 오래된 인류사적 염원의 첫째인지 몰라. 원시시대 씨족사회, 부족사회가 이 가족 단위의 자연발생으로 가능했지.

김형수=다들 놀랄 거예요. 선생님의 시에 매혹되는 이유가 대개 ‘귀기로 말미암은 아포리즘’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서늘함’을 동반하는 것이라 ‘저 먼 이승 밖의 눈’처럼 여겨져요. 지금의 ‘가까운’ 온기, 생명의 부드러움…들은 조금 낯선 영토입니다.

고은=그렇기도 하겠네. 나도 어떨 땐 나 자신이 낯설다네. 아무튼 어린 시절의 화재로 몸채 네 칸이 전소된 뒤 별채 두 칸에다가 달아낸 세 칸을 더한 다섯 칸 초가에서 가족은 단란하기 짝이 없었어. 단 하나의 불행은 막내삼촌 맹식의 이혼이 거듭된 일이었지. 다섯 번이나. 어찌해서 결혼하면 곧 이혼하고 곧 이혼했지. 신부 숙모가 수레에 짐을 싣고 보따리 하나 들고 돌아보고 돌아보며 눈물바람으로 짧은 시집살이 신혼살림을 작파하고 떠나는 모습이 나 같은 소년에게도 연민을 일으켰어.

김형수=수사학적으로 탁월했던 그 삼촌이지요?

고은=그 삼촌은 이혼의 의식을 베풀고 나서 그렇게 다음날 여자를 보냈어. 개사곡 있지 않은가. 이별의 사연을 노랫말로 지어서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 같은 애조가 담긴 유행가 곡조에 실어서 그것을 불렀어. 국민의례 애국가처럼 말이네. 조촐한 안주가 놓인 소반 위의 두 잔에 술을 가득 부어서 삼촌과 떠날 숙모 새댁이 마시는 것이지. 이별주였어.

김형수=통상적 관념에 비추어 얼마나 파격인지 모르겠어요. 신기한 것은 그게 가능한 환경을 두고 선생님이 불원간 숙명처럼 미지를 항해했다는 겁니다.

고은=그러니까 가족의 단란함이란 이런 가족의 이례적인 불행에 바로 이웃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지. 더욱 애통한 것은 그토록 자애덩어리이던 할머니의 별세에 이어 내 밑으로 어린 아우가 마마를 앓다가 젖내음이 가시지 않은 어린 몸에 보랏빛 반점들이 돋아났고 그 빛깔이 점점 거무스름한 것으로 바뀐 나머지 끝내 숨을 놓았던 일이지. 어머니는 나를 낳은 뒤의 산후 출혈로 달거리 하혈을 하는 고질증상 10년 뒤에야 그 증세가 사라져서 아우를 잇대어 출산했어. 그렇게 태어난 아우 둘이 곧장 세상을 그만둔 것이지. 하루쯤 안방 윗목에 하얀 홑이불로 덮었다가 저녁나절에 뒷산에 묻었지.

김형수=삶과 죽음을 같은 장소에서 체험하던 시대와 지금 우리는 너무 멀리 있습니다. 존재의 탄생도 소멸도 혼자의 것이 아닌데. 결국 요즘 문학의 서사 결핍도 신세대의 잘못이 아니라 당대 문명의 몫 같아요. 그게 재앙이면 문명도 재앙이죠.

고은=가족이란 한 밥상에서 밥 먹으며 식성도 닮아버리고 한 이불 속에서 자는 이 세계의 기초 단위로서의 공동체이지. 그래서 모든 타자들로부터 자신들이 방어되고 보존되는 최소 공간을 이룬 가족의 공간인 가정이 거기서 확인되지. 바로 가족은 서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삶의 내면인데, 바로 그 내면관계가 파괴당하는 이혼이나 사망 같은 이별의 고통도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네. 부부라는 것도 평생 해로라 하지만 언제 한쪽의 부재 상태가 될지 모르는 불행 없이 성립될 수 없지. 아내가 먼저 눈감을 때 남편의 아픔과 허망감 그리고 지아비가 죽었을 때 지어미의 그 절망과 비통이야말로 가족이 설정하는 조건이기까지 하지 않은가. 모자 사이에서도 어미 잃은 고아의 삶이나 아이 잃은 어미의 애 끓이는 아픔은 그 무엇에 견주겠는가. 고아 과부 그리고 늙은 독거인 등의 생존 소외는 동서고금을 통한 삶의 어둠 쪽 아니었던가. 또한 가세가 기울어서 아이 하나는 숙부에게 또 하나는 외숙부에게 맡겨질 때 어머니가 남의 집 침모나 식모, 찬모 노릇을 하며 흩어진 새끼들을 보살필 때도 가족이란 지켜내기 어려운 원초적인 가치이겠는가.

김형수=지난번 ‘시간의 대륙’에서 얻은 영감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소설 <조드>에 바이칼 호수를 그리면서 웅덩이의 길이보다 인간의 수명이 짧기 때문에 그 둘레를 걸어본 사람이 없었노라, 썼어요. 삶을 오래 걸은 언어, 생의 대륙을 종단한 언어를 단막극 속에서 읽을 것 같은 걱정이 제게 있어요.

고은=고조선시대 한반도 북동부 옥저 유적지에서 가족 공동묘를 발굴한 적이 있었어. 거기에는 대가족 중의 일원이 사망하면 초분(草墳)으로 장사 지낸 뒤 육탈 유골을 모아 그 공동묘에 안치하고 다른 일원이 죽으면 그렇게 해서 안치함으로써 길이 10m쯤 되는 길고 큰 무덤 공간에 사망 순서대로 유골을 병치하지. 요컨대 죽은 뒤에도 생전 그대로의 가족과 가정을 무한 연장하는 장례였던 것 아닌가. 뭐랄까, 영원한 가족이랄까, 이승·저승을 아우르는 초창기 가족이랄까. 후대 주자가례의 묘지에서도 부부합장 정도로 된 것보다 훨씬 가족적인 장례였다네.

김형수=죽어서 우주 속으로 돌아가는 형식이 장례라면 그건 근본적으로 자연의 부름에 대한 응답 같아요. 물고기를 따라 바다로 갈 것인지, 새를 따라 하늘로 갈 것인지, 흙 속에 없어질 것인지 허공 중에 사라질 것인지, 모두 자연이 정해준다는 거죠.

고은=본디 현생인류에게 다른 동물들의 삶과의 경계란 죽은 자에의 애도이고 죽은 자에 대한 경건한 예의를 다한 사실, 그래서 죽은 자를 방치하지 않고 매장했다는 사실에 있지 싶네. 고(古) 이스라엘 원시인도 구약세계 따위와 상관없이 12만년 전의 현생인류 호모사피엔스가 첫 장례를 시행한 조상이라 하더군. 지금의 이스라엘의 황야 언덕 동굴 무덤에서 해골과 부장품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나왔다네. 그 뒤로도 지금의 이라크 어느 동굴에서 6만년 전의 어린이 화석뼈와 그 어린이 이마 부근에 놓인 히아신스 꽃 화석이 나왔지. 한국의 충북 단양 어느 땅 속에서도 소년 해골 화석 옆에 국화 한 다발의 화석이 나왔지. 애도와 내생 발원이야.

김형수=옛 사람도 꽃을 사용했네요? 모든 사물의 끝은 허공인데 그 끝이 허공이 아닌 게 꽃이라는 말을 서정주 시인이 했는데. 애도에 꽃이 동원되는 건 그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고은=죽은 자에의 애통과 추도야말로 인간의 신성한 사명이 된 것이지. 나는 20대부터 50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여러 공동묘지에 사로잡혀 있었지. 제주도 시대에는 제주 한라봉 공동묘지에서 술 취한 채 잠들기도 했어. 그 무렵 쓴 시가 ‘묘지송’이지. 김수영이 무척 좋아했지.

김형수=고등학교 문예부 때 신구문화사에서 나온 <52인 시집>을 끼고 살았습니다. 거기서 처음 ‘묘지송’을 읽을 때 고구려 벽화 같았어요. 지금도 으스스합니다.

고은=그 이전에도 통영 미륵도 공동묘지, 익산 황등 공동묘지, 동작동 국군묘지, 수유리 4·19묘지 그리고 망월동 묘지 등 내 생애의 여러 고비에 무덤들이 밀물처럼 넘쳐 있었어. 어느 묘지는 무덤이 몇 백 몇 십 개인가도 알고 새로 생긴 무덤은 반드시 나에게 신고를 해야 했지. 이런 사실이 알려졌는지 어쨌는지 독일의 무덤 전문 사진작가가 곧 한국에 와서 나의 무덤 편력 사진을 찍게 됐네.

김형수=저는 공동묘지를 무서워했어요. 장터에서 보던 수많은 ‘삶의 난리’들 중 가족들과 연계를 잃은, 후손에게 계승되지도 못하는 역사 단절의 종지부들이 당시에는 공동묘지로 갔잖습니까? 그곳은 필시 귀신의 마을일 것으로 보았던 거죠.

고은=아무려나, 가족이란 이런 가족 중의 사자 애도까지도 가족 안에 두어야 하는 가족의 윤리를 발생시켰어. 최근까지도 지아비 시신과 생전 그대로 몇 해 동안 동거한 사실도 있다네. 지금이야 인간생존의 복지 향상으로 유아사망이나 단명이 줄어들어서 어린 쪽과 늙은 쪽 다 길이가 늘어진 상태가 되었지만 나의 식민지 시대로부터 몇 십 년 내내 한국의 유아사망은 상당했네. 아기의 출생과 출생 초이레, 그리고 백일잔치, 돌잔치 따위를 입도선매로 빚 얻어 동네잔치를 벌인 허례는 생명존속의 절박성에서 생긴 것이지. 백일 지나면 돌 지나면 생명이 일단 보장되니까. 아무리 쪽박신세의 가난일지라도 탄생이나 사망에는 인간의 품위를 갖추어 맞게 했지. 개는 개새끼 죽어도 코끝을 한두 번 대어보고 아무런 표현을 하지 않지. 피붙이 근친이나 부부 도리 따위의 집착이 없는 생존이지. 그러므로 인간의 가족은 가족의 불행이나 비극까지도 감당하는 개념이 가족끼리의 행복한 밥상의 하루하루와 동행하는 것이라네.

김형수=조심스럽지만, 가정에 대한 연민에 찬 진단 앞에서 거듭 선생님의 변화를 감지해 봅니다. 언제나 존재의 비극을 가로지르는 지상의 횡단자로서 세계의 규범들과 맞서고, 홀연히 떠나는 이미지였는데.

고은=나는 1970년대는 가족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타락 원인이라고 여겼네. 심지어는 시와 철학과 혁명에는 가족은 적이라고 까지 외쳐댔어. 그런 니체적 극단이 계속 지속되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겠지.

김형수=아까 바이칼 호수의 비유를 빌리면, 선생님이 어떤 큰 웅덩이의 둘레길을 다 돌아서 이제 등 뒤에 남겨둔 자리로 되돌아온 느낌이랄까, 아니, 일방적 흐름을 속성으로 가진 강의 시대를 마감하고 바다의 미학을 시작하는 느낌을 주신다는 겁니다.

고은=가족 또는 가정이 아무리 인간의 사회적 존엄성을 가능케 한다지만 그러나 이 가족의 개념이나 일부일처의 규범들은 원시유교의 가부장제나 사도 바울의 윤리명령이기보다 실제로 동물에게서 배웠는지 몰라. 새들을 봐. 새 수컷이 암컷이 부화시킨 새끼들에게 헌신적으로 먹이를 물어다 대는 것이나 암컷과의 지극한 관계로 새끼들이 독립할 때까지 협동하는 그 생존의 성실성이야말로 유교의 가풍지상주의 따위보다 훨씬 위쪽의 본연 아닌가.

김형수=가정의 단란함을 자연 즉 원시로 보는 것은 정착문명에 대한 통렬한 비판 같아요.

고은=그런데 나는 고향에서의 가족 축복이 나의 전부는 아니었네. 나는 이런 가족 안에서 점점 나 자신의 세계 지향이라는 욕망이 자라났지.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엄마 품을 벗어나 이웃집 또래 아이들과의 만남을 서두르지. 나 역시 가정이라는, 부모라는 울타리 안의 꽃보다 그 밖의 들꽃에의 꿈이 커져가며 고향 마을에서 8~10㎞ 밖에 있는 바다에 처음으로 가게 되었네.

김형수=바다를 처음 보았다는 말씀입니까?

고은=물론 할미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보이는 무표정하게 누워있는 저녁바다 한 쪼가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바다 전체가 아무런 정신의 대비도 없는 내 앞에 막강한 위세로 펼쳐질 때 나는 숨이 막혔지. 그런 나머지 간신히 그 숨이 트였지. 바로 두 발바닥에 쥐가 나버리더군. 그래서 마구 썰물이 밀물로 바뀌려는 즈음의 개펄에 마구 두 발을 문질러대며 소리 질렀지.

김형수=지금도 ‘먼 곳’에 관대하고 ‘가까운 곳’에 냉정한 사유형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은=바다의 크기는 공포와 경이의 크기였어. 지금은 육지로 되어 그 몇 가호의 섬이 다 없어졌지만 입이도(入耳島)라는 곳에 밀물이 들어오는 줄 모르고 건너갔다가 마구 쫓겨나왔어. 그 입이도 저쪽에 노래섬이라는 무인도가 있었어. 가도(歌島)라 표기되었지.

김형수=하나의 나무가 어떤 가지를 하필 그 방향으로 뻗어가게 만드는 힘이 내부에서 솟구친 생명의 의지인지, 외부에서 가해진 햇빛 탓인지 알 수 없어요.

고은=겨울철 사나운 황파 속에서 침몰한 어선의 어부 넋이 겨울 서북풍이 불어닥쳐 섬의 솔바람 소리와 파도소리가 합칠 때 나는 소리로 재생됨으로써 원혼의 노랫소리가 난다 했지. 그래서 그런 멋진 이름이 붙은 섬이야. 이 섬이야말로 나를 시인이 되게 한 내 시의 씨앗 섬인지 몰라. ‘노래섬’은 내 이탈리아어판 두 번째 시집 제목이기도 하지. 바다와의 첫 만남! 저녁 낙조와의 첫 만남! 그 오도 가도 못할 커다란 공간으로서의 바다 가득히 지워져가고 지워져가는 파도소리의 무한으로부터 나는 영영 놓여날 수 없었지. 워즈워스가 200년 전의 밀턴을 예찬하면서 바다 같은 목소리라 했지만 지금껏 나에게 바다의 삶이 들어와 있는 사실은 아마도 그 첫 만남 이래 내 형이상학의 바다 역시 그 기억의 원산지를 저버리지 않는 사실에 고개 숙이고 있지.

김형수=감동입니다. 몽골 유목민이 서울에 오면 각종 문명의 구조물이 제공하는 편의보다 시야와 발길을 차단하고 속박하는 것들에 숨 막히다가 바다를 보여주면 한없는 자유의 표정을 되찾습니다. 선생님도 사회적 관념이나 구속에 대한 해방자로서 저 거친 자연의 소리들 앞에서 자유롭고 개방적인 모습을 보이시네요.


묘지송(墓地頌)

비록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나 그대 자손은 차례차례로 오리라.
지난밤 모든 벌레울음 뒤에 하나만 남고 얼마나 밤을 어둡게 하였던가.
가을 아침, 재보(財寶)인 이슬을 말리며 그대들은 잔다.
햇빛이 더 멀리서 내려와 잔디 끝은 희게 바래고
올 이른봄의 할미꽃 자리 가까이 며칠 만의 산국화가 모여 피어 있구나.

그대들이 지켰던 것은 비슷비슷하게 사라지고 몇 군데의 묘비(墓碑)는 놀라면서 산다.
그대들이 살았던 이 세상에는 그대들의 뼈가 가마귀 깃처럼 운다 하더라도
이 가을 진정한 슬픈 일은 아니리라.
오직 살아 있는 남자에게만, 아니 뭔가 잃어버린 남자에게만
가을은 집 없는 산길을 헤매이게 한다. 절도 절의 종소리도 없어야 한다.

그대들은 이 세상을 마치고 작은 제일(祭日) 하나를 남겼을 뿐
옛날은 이 세상에 없고 그대들이 다만 옛날의 예감을 이루고 있다.
어쩌다, 잘못인지 노랑나비가 낮게 날아가며
이 가을 한 무덤 위에서 자꾸 저 하늘에도 무덤이 있다고 일러 준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데 그대들은 이 무덤에 있을 뿐 그대 자손들은 곧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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